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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pr 03. 2016

케이스: 2016도합99999

(사건부제: 몸부림)

본 글은 픽션이며, 멜빌의 책 <필경사 바틀비>에서 변호사의 질문에 답하는 바틀비의 재해석입니다. <필경사 바틀비>에 대한 간단한 줄거리는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사건번호: 2016도합99999
재판 일자: 2016년 4월 2일


사건 일지:


재판장은 S와 사회 두 사람을 각각 피고와 원고 좌석으로 보냈다. S의 앞에는 '피고인'이라는 명패가 세워져 있고, 사회의 앞에는 '원고'라는 명패가 있다. S는 서로의 명패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이내 재판장의 눈치를 본다. S와 눈이 마주친 재판장이 먼저 입을 연다.

"본 재판은 원고 사회와 피고 S의 재판입니다. 원고는 소장을 진술하고 피고는 답변서를 진술합니다."

사회가 말했다. "소장을 진술합니다."
S가 말했다. "답변서를 제출합니다."

재판장이 말한다. "서증 제출하시죠"
사회가 말했다. "갑 1호부터 3호 증까지 제출합니다."
S가 말한다. "을 1호부터 3호 증까지 제출합니다."

재판장이 다시 말한다. "원 피고 서로 상대방이 제출한 서류 인부 가능합니까?
사회가 말한다. "차회 하겠습니다."
S가 말한다. "차회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말한다. "더 할게 있습니까?"
S가 말한다. "증인으로 S를 신청하겠습니다. 입증 취지는 S가 고용인 S의 주인이자 고용주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이 말한다. "채택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말한다. "원고 더 할게 있습니까?"
사회가 말한다. "증인으로 사회를 신청하겠습니다. 입증 취지는 사회가 고용주 S와 같은 개인들이 모여 구성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일반성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이 말한다. "채택합니다."



"두 증인은 순서대로 자리에서 나와 선서하세요." 재판장이 말했다.


저, S는 형사소송법 제157조 2항에 의거하여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이제 사회의 차례다. 사회가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석으로 이동한다. S와 서로 어깨가 스친다. 사회가 마이크 앞에 서더니 오른손을 들었다.


저, 사회는 형사소송법 제157조 2항에 의거하여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둘은 선서를 마치고 각각 증인의 자리에 섰다. 이제 S와 사회는 서로의 입장을 대변한다. S는 S의 고용주로서, 사회는 S와 같은 개인들이 모인 공간의 주체로서다. 고용주 S는 사회의 불합리를. 사회는 대중들의 시각에서 S의 행동의 불합리를 규탄한다. 먼저 고용주 S가 고용인 S, 피고의 입장을 옹호한다.



원고 '사회'는 능력과 일률이 최고의 덕목이 되는 공간을 조장했습니다. 그리고 능력이 없고 일률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노력'과 '시간'이라는 자원을 대신 사용하도록 생각의 길을 텄습니다. 사회는 이것을 법으로 규제한 적은 없지만 승진과 더 나은 인생을 담보로 많은 구성원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잘못 살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것을 '자기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했습니다. 이에 현혹된 구성원들 중 영향력이 있는 자들은 '자기개발'이라는 이름의 서적을 내며 무지한 다수를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십시오. 영향력 있던 자들 중 다수가 자신이 이뤄낸 것으로 노후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성공학 서적'의 인세로 생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이것을 고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회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만큼이나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입니다. 사회가 '말하지 않길 희망하는 것들' 때문에 고용인 S는 지금도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S가 만든 올가미가 아닙니다. 올가미를 만들고 가져다준 것은 사회이며, S의 잘못이라곤 그것을 자기 목에 걸고 스스로 위협을 느낀 것 뿐입니다. 피고는 원고를 위해서 과도한 시간을 소모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재판장은 가만히 피고측 증인을 응시한다. 이제 재판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원고를 바라본다. 재판장은 원고측 증인에게 묻는다.

"증인 사회, 할 말 있습니까?" 재판장의 말이다. 원고측 증인이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고용인 S는 근로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월급과 회사(=사회)의 인프라를 무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사회에 찍힌 CCTV에는 사회의 인프라를 피고가 즐기고 있는 듯한 표정 까지 잡힌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법정은 저, 사회에게 '법정 기준 근로시간'을 고지한 바 있습니다. 노동 시간은 한 주에 40 시간. 하루 8 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규칙입니다. 이것은 제가 구성원들을 착취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지금까지도 잘 준수해왔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용인 S는 자신의 넘치는 능력과 시간이 있으면서도 이러한 재능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피고는 이런 나태한 모습 속에서도 사회의 인프라를 즐겼습니다. 이제는 고용인 S가 사회를 착취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피고 S는 능력과 그 가치가 남아있는 한, 주당 40 시간 안쪽에서 '사람답게' 일을 해야 합니다.


재판장은 이제 깍지를 낀 채,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리고 있다. 지그시 감은 그의 눈은 역-착취의 개념에 대하여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고용인 S, 할 말이 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재판장님. 고용인 S가 처음부터 원고의 요구에 불복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고용인 S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바 있습니다. 늦게까지 스스로 공부했으며, S의 상사가 회사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묻는 카톡에도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말에 날아오는 이메일에 몇 시간씩 답변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피고의 증거 <을 2호>에 그것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해당 문서에 적혀 있듯이 고용인 S는 이것을 '간접 근무 시간'이라는 용어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근무시간에 합산하면, 고용인은 법정 기준 근로 시간을 초과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입니다.

간접 근무 시간을 포함한 노동. 원고는 이것에 대해서 근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접 근무 시간은 고용인 S가 갖길 원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피고는 '사회인'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자기개발이란 말은 허울일 뿐입니다. 이것은 사회 개발입니다. S가 독서를 할 때면, 그것은 기호에 의한 독서가 아니었습니다. S는 사회를 위한 관련 업무 독서, 외국어 공부 등 근로 시간 외에도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피고는 법제화된 시간 외에도 스스로를 착취해야만 '사회인'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도 이러한 사실에 동의합니다.



재판장은 원고의 증인을 바라본다. 원고 측 증인이 진술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사회는 너그럽습니다. 비록 사회가 피고를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최고 기관입니다만 S 역시 스스로 사회에 종속할지, 아니면 이를 거부할지에 대한 자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S의 자유입니다. 원고인 사회는 그런 S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해고나 고용을 할지 선택하는 것일 뿐 입니다. 사회는 S에게 악감정이 없습니다. 사회는 S의 상태를 가지고 고용과 해고 여부를 결정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피고가 근로의 의무에 대하여 최소 기준을 운운하는 것은 사회인 전체의 능률을 시험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사회의 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 S가 사회 전체의 능률을 시험할 권한이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피고 측 증인, 이러한 원고측 증인의 주장에 피고가 증인에게 표출한 말이나 행동이 있었나요?" 재판장이 묻는다.


그렇습니다 재판장님. 피고는 사회 측이 진술했던 주장과 달리, 자신은 사회를 선택하고 버리고 할 권리조차 주어진 적이 없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또한 피고는 자기개발의 과열과 환상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자기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속에는 의무와 생존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 촘촘하게 얽힌 머리카락 덩어리가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덩어리가 맑게 흐르던 인간 정신을 막아버리고 하수구의 물이 빠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물질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물로 치면 사회의 그물은 너무나 작고 촘촘하다고도 했습니다. 사회의 그물은 법이라는 굵고 검은 그물망 말고도 '꽌시(關係·관계, 타인의 시선)'라는 더 얇고 촘촘한 낚싯줄로 만든 그물망이 하나 더 있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피고의 증거 <을 1호>에 '간접적 압박'이라는 용어가 그것입니다. 사회는 꽌시라는 규칙을 구성원들에게 심어두고는 서로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피고가 노력을 하기 싫다고 선언한 것은 타인이 자신 앞에서 보이는 노력의 과열 때문이며, 이것은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사주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원고 변론하고 싶습니다." 사회가 손을 들며 말했다.
"원고, 변론하세요." 재판장이 말했다.


피고 측 증인이 말한 바와 증거 <을 1호>는 사실이라 할 수 없습니다. 피고가 증거물로 제출한 어떤 논문도 꽌시를 수치화하여 제시하지 못 했습니다. 다만 원고는 피고의 부서와 그 주변 환경이 유달리 경쟁이 치열한 환경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피고 측 증인이 언급했던 '낚싯줄로 만든 그물망'은 어디서도 발견된 적이 없으며, 그저 큰 그물 안에 있던 물고기들이 자기만의 방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피고가 그물망으로 오해한 것일 뿐입니다.


증인 S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한다. 피고는 그런 증인을 바라보며 대신 위로를 받는 기분을 느낀다. 피고 S는 목구멍으로부터 두껍게 올라오는 무언가를 깊게 삼킨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목소리는 떨리지만 차분한 어조로 발언권을 신청한다. 재판장. 그런 피고를 보고 변론을 허락한다. 피고는 재판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원고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원고는 그물이 없다고 밝혔지만, 만약 그런 그물 없이 자신의 영역을 마구 침범당하는 세상에서 물고기들이 과연 며칠이나 살 수 있을까요? 무한 경쟁과 개발 과열을 애써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물고기들은 '도태'라는 이름의 침입자들 때문에 폐가 눌리고 다 터져서 입 밖까지 내장이 튀어나올 텐데요. 만일 이러한 물고기들의 죽음이 단순히 개인 간의 갈등과 심화 때문이라면 나는 몸부림치길 멈추겠습니다. 나의 복부와 등가죽 앞뒤로 녀석들이 올라타고 비벼대는 통에, 나의 입에서 내장이 비집고 튀어나오는 한이 있어도 원고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오직 개인이 '재수 없는' 분야에 배치됐기 때문이라면 말이죠.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는 몸부림치길 멈추겠습니다.


피고는 무언가에 홀린듯 했다. 재판정은 싸늘했고, 피고는 이제 분노의 눈빛에서 피로감이 가득찬 눈빛을 지녔다. 그는 두 눈 가득찬 피로의 결정을 재판장에게 흘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기된 발언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평소라면 단단히 주의를 주었을 재판장이지만 이번에는 경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 피고는 고개를 숙였다. 재판장이 말했다.

"더 할게 있습니까?"

둘은 침묵했다. 판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려봤다. 가운데 있는 판사가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결을 위해 잠시 휴정합니다."
판사들은 무겁고 두툼한 법복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나무 문을 열고 세 명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판결 내용:


제99 형사부는 2016년 4월 2일 S가 사회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이 사건은 법정 근로시간의 초과뿐만 아니라 최소 근로시간에 대한 의무의 준수를 고지하는 사건이다. 간접 시간에 대한 피고의 증거물은 산술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으며, 최소 근로시간의 비 준수는 개인의 효율성보다는 공익 목적을 해하는 것"이라며 사회는 S에게 해고 또는 그에 상응하는 징계를 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 이후:


씁쓸한 표정으로 피고 S의 어깨를 잡고 있는 고용인 S.
원고가 둘 쪽으로 다가간다. 그는 가만히 악수를 청한다. 사회는 이제 살짝 웃고 있다.

사회가 S에게 묻는다.

"지니까 기분이 어때?"


S는 그런 사회의 반응이 우습다는 듯, 맞받아치며 대답한다.

"나는 네가 재판에서 이기고, 나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습다.

나는 통쾌하다.
법정의 판결이 내게 주는 좌절감보다 네가 위증하지 않겠다고 선서했던. 위선자의 모습을 평생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너는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렸다. 개인의 노력과 압박이 자신이 사주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것은 거짓 진술이다. 너는 법정에서 이것을 부인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차피 이 재판의 결정은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스스로를 기만했다. 나의 정의와 너의 정의가 부딛쳤고, 내것이 깨졌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거기까지다. 나는 법정에서 너가 양심을 저버리는 것을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판결을 준수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나의 패배'보다 더욱 귀한 '너의 위증'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마치 미치광이와 악수를 하고 있다는 듯, 맞잡은 두 손을 슬쩍 빼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알바가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살짝 움츠리면서 이내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S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은근한 미소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힘 없이 서 있었다.


Fin.


이 글에서 등장하는 선언문은 '형사재판 증인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 말하는 피고(S)와 원고(사회)는 자신이 법정 논쟁의 대상임과 동시에 대상을 관찰하고 함께 겪은 증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신문(訊問, 알고 있는 사실을 캐어 물음) 이전에 법정 선언을 하는 것이며, 판결이 난 뒤에 두 주인공이 나누는 조소 섞인 대화는 자신들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타인에게 건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이야기에 대한 해설을 더 진행하기 이전에 민사재판의 증인 선언문과 형사재판의 증인 선언문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민사재판 절차에서 채택된 증인이 법정에 출석한 경우, 증인 선언문은 "보태지 아니하고 / 거짓말을 하면"이라고 말을 합니다. 반면 형사재판의 경우 증인은 "보탬이 없이 / 거짓말이 있으면"이라고 말합니다. 전자는 의지나 감정이 개입된 과장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고, 후자는 사실을 전함에 있어 의지나 감정의 개입이 '사실'이라는 범주에 해당하는 사항이 아님을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해석했습니다. 즉, 본 재판에서 피고가 드러내는 감정은 피고가 겪은 '사실'이며 의지나 마음이 동요해서 나타나는 말맛(nuance, 뉘앙스)이라기보다는 이미 드러나버린 감정의 거친 표면입니다.

사건번호는 2016년 4월 2일에 쓴 글이기에 사유의 행위와 판단을 하기 시작한 2016년이며, 접수번호 99999가 의미하는 바는 필자(S)가 할 수 있는 저항의 끝에 존재하는(참다 참다 제기하는) 소송과 재판이라는 점에서 그 숫자가 붙었습니다. 본 재판은 3심이며, 사건부호의 '도합'이 의미하는 바는 아래 첨부한 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자세한 정보는 법원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부제가 '몸부림'인 이유는 몸부림은 그 영향력이 적은 저항이기 때문입니다. 몸부림의 피해자가 다수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육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3m 세제곱 평방 안에서 온몸을 편 채로 갇힐 수 있으며, 해당 공간에서의 몸부림의 영향력은 크게 잡아야 3 세제곱미터입니다. 그리고 재판 결과를 통해 확인하셨듯이 법은 이 몸부림마저도 허락지 않습니다. 몸부림의 좌절입니다. 그러나 좌절은 현상일 뿐 저항의 정신은 그치지 않습니다. 재판이 끝난 뒤 S는 사회에게 웃으면서 말을 합니다. "이기고 졌다는 법정의 판결보다 네가 네 양심을 저버렸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S는 재판이라는 승/패를 확인하는 공간에서 '양심'이라는 새로운 재판을 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승리합니다. 이것은 사실관계의 정(正)과 반(反)의 결투에서 삶과 죽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심(합, 合)을 향해 초월함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저항의 방식은 정해져 있지만 승리의 방법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물론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S는 사회와의 형사 재판에서 패소했고, 사회의 처분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재판에서 S는 항소의 횟수와 관계없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차원에서의 승리가 현실계의 승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잠재성의 세계이며 '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의 타뷸라 라사(tabula rasa)입니다. 이것은 이율배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비옥한 땅의 존재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애석하게도) 판결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정신의 공간은 둘 다 존재할 수 있으며, 어느 한쪽의 생존이 다른 한쪽의 절멸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공간의 중요성과 경중은 독자마다 다를 수 있으며, 독자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로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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