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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Mar 19. 2016

무명의 주드

결말 각색하기

줄거리


주드는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라벨라와 성급하게 첫 결혼을 한다. 주드는 곧 아라벨라와의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공부와 꿈을 찾아 도시로 떠난다. 그는 도시에서 사촌인 수 브라이헤드를 만난다. 그녀는 혈색이 붉고 밝은 미소를 가진 여성이다. 주드와 수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 둘은 사촌지간 이상의 정을 느낀다. 수는 이런 감정을 지닌 채 다른 남자를 만나보지만 마음은 부메랑같이 주드에게로 향한다. 결국 수는 주드에게 마음을 연다. 수와 주드는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둘은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 떠돌이 신세가 된다. 우연히 정착한 마을에서 주드와 수는 아라벨라와 재회한다. 아라벨라는 주드와 자신 사이에 자녀가 있음을 고백한다. 주드와 수는 그 아이를 거두기로 한다.

이제 주드와 수 아래 자식은 셋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라벨라와 주드의 아이가 수의 아이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처마에 목을 맨다. 둘은 자식을 모두 잃게 되고, 수는 자신이 저주받은 사랑을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자기 자식들이 죽었다며 자책한다. 수는 아라벨라와 주드 사이의 자식을 타인의 씨앗으로 분리시키고, 주드의 자식이 자신의 자녀들을 살해했다며 통탄한다. "바늘로 나의 몸을 무한히 찔러 나의 죄를 속죄할 수만 있다면 백 번이고 그렇게 할 것이다." 수의 눈물 어린 고백이다. 그녀는 옳지 못한 관계를 후회한다. 이 이야기는 상실의 아픔과 죄 사함을 갈구하는 수의 고백으로부터 이어진다.




(Sue)는 꼬박 말이 없었다. '몸 안에 있는 악을 모조리 뽑아내고 싶었다'는 그녀의 절규에 응답이라도 하듯, 신은 죄 대신 그녀의 목소리를 뿌리째 앗아가 버렸다. 그녀는 나를 침묵으로 대했다. 아이들의 장례식이 있었던 그날 이후부터, 나는 그녀의 얼굴보다 뒷모습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는 그런 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을 새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의 홍매화 같던 입술과 생기 넘치던 볼의 굴곡은 숨이 죽은 지 오래였다. 나는 그녀의 갈라진 피부에 익숙해져야 했다. 날 향해 짓던 풍성한 표정은 침식됐다. 대신, 나는 극지의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받아들였다. 나의 마음에도 겨울이 드리웠다. 수를 사랑하는 마음 위로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리는 어느새 만년설처럼 오돌토돌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다섯이 둘로 줄었다. 우리의 공허함은 배가 됐다. 한때는 귀찮기까지 하던 아이들의 조잘거림에 온기가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나와 수는 여전히 같은 침대를 썼다. 하지만 이불은 작은 잠꼬대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우리의 집은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 마른기침 소리, 그리고 마루 위로 삐그덕 대는 소리 말고는 울리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창밖을 지나는 마차 소리가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내는 소리 같았다. 집에는 분명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둘은 식어버린 체온의 존재였다.



Helga series, Andrew Wyeth


나는 여전히 수를 사랑했다. 수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고, 나를 항상 등지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수는 표현에 신중한 사람이다. 그녀의 입에서 사랑의 고백이 나올 적에도, 나에게 바라는 어떤 것을 말할 때에도 그랬다. 그녀의 고백은 마치 장미를 처음 만지는 아이 같았다. 너무나 아름다워 꽃잎에 손을 대고 싶지만 가시가 그를 해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 말이다. 수는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들어찰 때까지 입을 굳게 닫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것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쏟아질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할 때. 수는 오로지 그때에만 언어로서 마음을 고백했다.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수가 나를 사랑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도 그것이 사랑으로 피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듯이, 그녀의 얼음장 같은 감정의 고백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나는 낮에는 교외로 나가 벽돌을 날랐다. 예전처럼 묘비를 깎거나 성당을 조각하며 그들을 추모할 순 없게 됐지만, 신은 우리 가족에게 최소한의 연명이 가능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수는 내가 일을 나가면 성당엘 나갔다. 수에게 기도는 이제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됐다. 그녀는 기도를 할 때 다른 사람들처럼 중얼거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살포시 감고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쥘 뿐이었다. 그것이 수의 기도법이었다.


그녀는 신을 찾아 손을 모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집에 그가 머물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가장 따뜻하던 여름날에도 우리의 집은 동굴처럼 차가웠다. 계절은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았고, 우리는 침묵으로 한 해를 보냈다.



Witching hour, 1977, Andrew Wyeth


땅거미가 내리고 손끝에 한기가 느껴질 무렵. 나와 수는 저녁 식사를 위해 마주 앉았다. 우리의 양 편으로 주인 없는 의자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수." 나는 마른 입술을 떼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꺼낸 이름이었다. 내 귀가 다 낯설었다.


수는 빵을 향해 뻗던 손을 멈췄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두 팔을 가지런히 올렸다. 그녀의 시선은 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미안해."


그녀는 잠깐 동안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이내 입술을 굳게 닫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아직 당신을... 사랑해."


수는 이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 위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자식이. 내 아이들을 죽였어요." 그녀는 작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당신의,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말했다.


"아니요. 모두 우리의 잘못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나는 나쁜 여자예요. 당신은 그런 나를 사랑한 악마예요. 그리고 나도 악마예요. 악마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어요. 악은 그저 한 곳에 머물면서 그것이 부정한 기운을 퍼트리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최선이에요. 우리의 죄가 한 아이를 더럽혔어요. 두 천사를 타락시켰어요. 나는. 부정한 여자예요."


그녀는 이제 나뭇가지 같은 손을 부들거리고 있다. 고개 숙인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서릿발 두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의 나뭇결이, 그 질감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주드. 나는 당신을 떠나지 못해요. 우리는 세상에 잘못 떨어진 악마 한 쌍이에요. 어쩌면 하나의 몸뚱이에서 갈라진 둘 일지도 몰라요. 저는... 여전히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을 원하는 마음만큼, 나의 또 다른 목소리가 당신을 밀어내고 있어요.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어 질 때면, 아이들이 꿈에 나와요. 어느새 제 손에는 아이들의 더운 피가 적셔 있어요. 고개를 돌리면 천사들의 선혈이 제 옷에도, 얼굴에도 발려 있어요. 그 작은 몸에서 왈칵왈칵 뿜어져 나온 더운 온기가. 이 부정하고 더러운 여인을 씻어내겠다고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요. 주드. 나는 당신의 아이와 우리가 천사들을 갈가리 찢어놓았다는 사실을 씻어내고 싶어요. 이것을 씻어버리고 싶다고요."



Christina's World, Andrew Wyeth


그녀는 이제 기도하듯 두 손을 꼭 얽어 쥐었다. 어찌나 세게 그것을 쥐고 있는지, 그녀의 마른 손등 위로 손가락이 움푹 파였다. 수의 성마른 목소리는 떨림이 점점 커지고 있었고, 손끝에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태연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일을 나갈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어요. 어느 날 깨달았어요. 당신은 나와 아라벨라의 자녀들의 상실 때문에 두 배로 괴로운 게 아니라는 것을요. 주드, 당신은 두 집안의 자녀를 잃었기에 두 배로 슬프지 않아요. 오히려 그 절반이죠. 당신은 나와 아라벨라 자식들의 몸을 절반씩 갈랐어요. 그리고 딱 그만큼만 괴로워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태연하게, 짐짝 놓듯이 침대 위로 올릴 수 없어요. 주드, 난 당신을 저주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수를 바라봤다. 나의 목은 간질을 일으킬 듯 떨렸고, 반사적으로 고개가 꺾였다.
"아니야, 주드. 나도 슬퍼. 그런데 나는 신께 무엇을 빌어야 하는 줄 모르겠어. 나는 그냥.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아픈 것이 나는 너무나도 괴로워."


수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빛은 살의가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수는 침을 크게 한 번 삼켰다.


"나는. 사실 그 빌어먹을 신한테 어떤 것도 빌지 않았어요. 그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 귓속에 사람들의 저주가, 수군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거든요.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척하는 동안엔 당신이 말을 걸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말을 걸어보려는 당신의 그 젠장맞을 눈빛을 외면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악마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사슴 같은 눈을 가지고 있는 거죠? 위선자, 당신은 위선자예요."


"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늘 다 하도록 해줘.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야."


수가 말했다.

"그래요, 그럴 거예요. 당신은 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요. 결혼도, 공부도, 욕정도, 자녀들도 데려오고 싶으면 어떻게든 눈앞에 갖다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죠. 당신은 나를 배려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내게 해 준 모든 것들은 다 당신의 머릿속을 만족시키기 위한 위선에 불과해요. 당신은 모두가 다 당신 뜻대로 되어야만 하죠. 그런데 그 끝은 어땠죠? 당신은 모두 실패했어요. 결혼도, 공부도, 당신의 잘난 감정도, 자녀들도 모두 당신을 떠났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가 1년 동안 품었던 마음은 이렇게 냉랭했던 것일까. 우리가 나누었던 따뜻하고 행복했던 사랑의 언어들은 그녀의 겨울 앞에 모두 말없이 얼어 죽고 있었다.


수는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등 위로 빨갛게 손톱자국이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찬장을 열었다. 수는 차 두 잔을 끓여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엄지손가락만 한 약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수는 그것을 찻잔에 두 방울씩 떨어뜨렸다.


"마셔요." 수가 말했다.


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라고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셔요. 아무 말 말고." 수는 나의 입을 닫았다.


차 속은 겨울밤 하늘처럼 검었다. 건너편에 마차가 지나고 있는 걸까. 찻잔 속 표면이 잘게 파동을 그렸다. 잔잔해진 수면 위로 한없이 슬픈 눈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달그락."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수는 찻잔 바닥을 비우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달칵." 찻잔이 테이블을 때렸다.
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코피가 주룩 하고 흘렀다.

수는 살짝 흰자위를 보이더니 이내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쓰러졌다. 나는 그녀 곁에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아아... 아아...."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정수리 피막 안쪽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아팠다. 울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청 속에 꼭꼭 들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피를 토했다. 눈은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그녀의 말라붙은 볼 위에 피눈물이 흘렀다.


"아아...."

나는 그녀의 성마른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기침을 했고, 핏덩이가 나의 손 위로 툭툭 떨어졌다.


"안돼. 안돼. 수... 제발."
나는 그녀를 더욱 넓게 끌어안았다.

죽음이 그녀의 등판 아래서부터 서서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의 몸과 팔은 딱딱한 가지처럼 굳고 있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가슴은 해머로 맞은 듯 답답했고, 숨은 판막처럼 펄떡였다. 그녀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기까지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남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날은 어느새 어두웠다. 나는 살짝 몸을 틀었다. 그녀의 손이 마루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그녀를 눕히고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몸은 찬장에 의지해서야 떨림을 멈췄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떨어진 의자 위로 시선을 옮겼다. 시선은 등받이를 타고 테이블로, 다시 테이블에서 나의 찻잔으로 움직였다. 나는 이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Spring, 1978, Andrew Wyeth


우리의 보금자리는 그녀가 있던 때처럼 고요했다. 나는 비틀거리느라 마루를 삐걱대고 있었고, 그녀는 옛날처럼 말이 없었다. 우리는 1년 전과 다를게 없었다. 그녀가 평소보다 조금 더 차가울 뿐이었다. 축 처진 나의 손 위로 그녀의 온기가 중력을 따라 흘렀다. 그것은 손등에서 손 끝으로 한 방울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동동 동동.
찻잔의 중심에 잘게 파동이 일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표면을 응시했다. 파동은 점점 커지다가 찻잔 벽에 부딪치며 불규칙적으로 부서졌다.

"달그락 달그락."


멀리서 마차 소리가 들린다. 찻잔은 이제 말발굽 소리에 맞춰 느릿느릿 춤을 추고 있다. 나는 터질 듯 차오르던 울음을 삼켰다. 목젖은 나의 턱심을 따라 그것을 꾸욱 밀어 넣었다. 이제 진동과 묵직한 두통이 나의 머릿속을 홍수처럼 채웠다. 나는 시선을 편히 둘 곳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이런 소란 사이에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속삭이고 있었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다가 이내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지막하게, 그렇지만 분명히 귓가에 어떤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마차 소리와 함께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 고.. 요.

. 고요한 가족의 방,
주인이 왔다.'


내가 그것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소리는 내 귓가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찻잔의 진동과 공명했다. 나의 시선은 찻잔 속 칠흑 같은 그것에 휩쓸려 불안하게 떨리고 있다. 이 불안을 멈추려면 찻잔 속 슬픈 눈의 남자를 꺼트려야 한다. 나는 더 이상 그 남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들어 나의 검은 입 속으로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Fin.


영화 <주드 Jude (1996)>과 토마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Jude the obscure)>를 읽고 결말을 각색하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눈치채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은 과제 제출본입니다. 그리고 모든 과제가 그렇듯 이 글은 몇 시간만에 완성한 글입니다. 생각의 시간은 길었지만요.


저는 <주드>를 보면서 주드와 수가 말이 없던 그때부터, 어쩌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은 인류의 관습에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둘을 묶어 놓은 것도 아니었고, 혈연이라는 관계 때문에 사랑의 재갈을 물린 상태에서도 둘은 서로를 갈구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사랑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저에게는 죽은 시간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글의 초반에 주드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마차 소리가 때론 우리 집의 주인 같다'는 말입니다. 수가 침묵으로 주드를 등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됩니다. 1년이라는 기간 속에 수의 침묵은 1년 동안의 무명(無命, no-life)의 삶과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무명을 단명으로 맺었습니다. 단명의 삶이 영원한 사랑의 연장인지, 속죄의 길인지, 그것이 무엇인지 주드는 모릅니다. 그러나 수가 주드에게 외쳤던 모성의 절규는 주드가 그녀의 길을 따르게 만드는 경종이 되었습니다. 둘은 사촌지간입니다. 만약 그들의 세계에 내세가 존재한다면, 수와 주드의 절명은 둘의 공통 조상에게 수의 자녀들의 죽음과도 같은 아픔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이 둘이 저지른 극단적인 선택은 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가족의 상실이고, 사랑의 다른 모습이며, 아픔의 반복입니다. 단지 그들이 무명(obscure)이라서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70억이 사는 세상에 어쩌면 다른 무명 씨는 지금 이 순간 주드의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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