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토피아(2016)>
스포일러 주의
영화 <주토피아(2016)>는 필자가 본 디즈니 영화 중 중하 또는 보통의 영화다. 감상이 두 가지인 이유는 이 두 가지 부류의 감상자에 따라서 평가를 달리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자(중하)는 이 영화가 인간 사회를 말하고 있다는 평가를 하시는 분들, 그리고 이 영화를 자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고, 후자(보통)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화로 가볍게 감상하신 분들을 위한 이야기다. <주토피아>는 좋게 쳐봐야 중박이다. 그리고 두 구분과 관계없이 이 영화는(심의 등급 기준) 15세 이하의 아이들이 절대로 보아선 안된다.
비평을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만 먼저 이야기하자. 첫 번째. 필자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러 피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 피하지 않은 애니메이션의 수가 남들 보는 만큼은 된다. 만약 독자분께서 '얘는 애니메이션을 싫어하니까 몇 개 보지도 않으매 이런 글을 쓰는 거야.'라고 생각하신다면 여기까지만 읽고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셨으면 좋겠다. 필자가 독자를 가릴 수만 있다면 이런 분들은 필자가 글을 보여드리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둘째는 서두에 했던 말의 번복이다. 필자는 이제 계속해서 이 영화가 디즈니의 것들 중 최악이라고 말할 것이다. <주토피아>를 보면서 인간의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동물들은 인간의 행위를 모사한다. 하워드 감독은 "주토피아의 구성원들은 인간의 세계를 살아간다"고 발언한 바 있다. <주토피아>의 이야기는 인간의 얘기다. 그리고 이제 <주토피아>에 중박은 없다.
우리가 싫어하는 어떤 것을 맞닥뜨렸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가장 빠르고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이다. 필자는 이것을 가장 경계한다. 거부반응에 대한 자의식은 평론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도 같은 부탁을 드리고 싶다. 이 글은 귀여운 동물들에게 비평의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한다. 이 글의 날은 창조자들을 향해 섰다.
<주토피아>를 경계해야 할 다섯 가지 이유.
<주토피아>는 전체관람가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패러디, 오마주, 이스터 에그는 절대로 아이들의 것이 아니다. 먼저 영화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소재는 마약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 영화는 정신착란성 식물을 암시장에 유포하고 동물을 납치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2008~2013)>의 오마주다.
<브레이킹 배드>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제조업자 주인공 월터 화이트(Walter White)와 마약 중독자 제시 핑크맨(Jesse Pinkman)의 이야기를 다룬다. 드라마는 살인, 마약 제조, 마약 유통,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주토피아>에서 정신착란제인 '밤의 울음꾼'을 제조하는 양의 동료 이름은 울터(Woolter)와 제시(Jessie)다.
영화의 주인공인 주디(토끼)가 첫 출근을 하는 날 여우를 퇴치하는 약을 두고 가다가 다시 가져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알코올 중독의 오마주다. 영화 <플라이트>에서 알코올 중독인 주인공이 술을 마시지 않으려다가 다시 가져가는 장면을 따라했다. <주토피아>에선 술 대신 여우 퇴치제다.
주인공 닉(여우)는 불법으로 아이스크림을 제조한다. 그리고 이 아이스크림의 소비자는 레밍들이다. 레밍이 근무하는 은행의 이름은 레밍 브라더스(Lemming Brothers Bank)다. 레밍은 생각 없이 줄줄이 무허가 아이스크림을 구매한다. 레밍은 시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한다. 이것은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희화화 한 것이다. 영화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과실을 유머를 사용하여 가볍게 세탁한다. 트릭이다.
<주토피아> 속 조직 두목으로 나오는 미스터 빅(쥐)은 <대부>의 패러디다. 말투와 목소리 톤이 비토 콜리오네를 빼다 박았다. 그러나 <대부>는 갱스터 영화의 전설임과 동시에 폭력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가장 많이 받은 영화다. <주토피아> 속 미스터 빅은 품위 있는 조직 폭력배의 우두머리다. 영화에서 닉과 주디는 콜리오네와 함께 정찬을 든다. 마피아가 상류층 신사의 문화를 즐긴다. 미스터 빅의 협박 방식은 우아한 동사(凍死, 얼려 죽임)다. 우아한 살생이다. 영화는 다시 한 번 폭력을 미화한다.
<주토피아>는 얼핏 보면 '공존'과 '한계의 극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은근한 시선으로 관객들을 조롱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차별의 해소(노력)를 말하는 척하면서 그것을 타협할 수 없는 전제(종)에 깔고 있는가 하면, 배역과 설정으로 미국 우월주의를 주입시킨다. 관객들을 웃으면서 기만한다.
a. 설정 속 차별
주토피아(Zootopia)는 주(Zoo, 동물원)와 유토피아(Utopia, 이상 세계)의 합성어다. 이곳은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완성된 이상계다. 그러나 주토피아는 이상이라는 명분으로 본성을 잘라낸 개체들의 집합이다. 동물원이다. 동물들은 유토피아라는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제 발로 우리에 들어간다. 이상계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본성의 거세다. 영화는 이를 '사회화'라 말한다.
주토피아는 육식이나 초식과 같은 강/약자의 논리가 사라진 세계다. 그러나 이들의 속성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토끼는 영민하고, 번식력이 왕성하다. 여우는 간사하다. 나무늘보는 느리다와 같은 것들이다. 문제는 이런 동물들의 속성이 '공통 직업군'에 다수의 개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토피아는 능력이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종자의 한계를 분명하게 긋는다. 유리천장과 종차별이다.
영화 속 교통 관리국 공무원들은 모두 나무늘보다. 느린 행정처리를 희화화하기 위한 설정이다. 나무늘보가 다른 직업으로 묘사된 바는 없다. 이는 자신이 가진 속성을 직업에서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리먼 브라더스를 패러디한 레밍 브라더스의 레밍(나그네쥐)도 그렇다. 레밍은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다. 이들은 단체 생활을 하면서 앞선 레밍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다. 레밍은 이러한 속성 때문에 절벽에서 단체로 떨어져 죽는 동물(죽음의 행진)로 유명하다. 영화에서 레밍은 자신의 한계에 순응하고 앞 레밍의 행동을 모사하는 동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어떤 레밍도 월급쟁이 은행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사자는 <라이온 킹>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주토피아>의 사자는 권력자다. 한때 언론을 통제하려다가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꾸준히 재기를 꿈꾼다. 사자는 스캔들 이후에도 여전히 기득권이다.
주토피아는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도시를 말한다. 그러나 주인공 둘을 제외한 모든 구성원들은 천성대로, 주어진 대로 산다. 주토피아는 '타고난 것들'이 지배적으로 세상을 굴리는 도시다. 구성원들은 동족끼리 짝을 이뤄 세력을 구성한다. 세력은 그 구성만으로 다른 존재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종자 차별이다.
b. 캐스팅 배우
<주토피아>는 평등과 이상 사회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러나 캐스팅은 그렇지 못하다. 캐스팅은 백인 중심이다. 주요 캐릭터 중 흑인은 두 명뿐인데, 그마저 한 명은 영화에서 주인공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는 캐릭터다.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웃지 않는다. 흑인의 역할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캐스팅까지 끌어오며 인종차별을 논하는 것이 웃기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웃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전혀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세계 3대 영화 시상식 중 하나인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들의 시상식'이라는 오명이 있다. 몇몇은 좋은 작품과 인종은 관계가 없다고 못을 박기도 하지만 미국 배우들의 인종에도 유리천장은 존재한다. 할리우드 내 인종과 성차별은 공공연하다. 이 작품에 캐스팅된 배우의 인종과 그 역할을 비중 있게 보아야 한다. <주토피아>의 조물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영향력으로 주토피아를 지배하는 '시장'은 J. K. 시몬스가 연기했다. 그는 영화 <위플래쉬>에서 권위적인 스승을 연기한 바 있다. 시장은 권위주의적 역할의 연장선이다. 그는 여기서도 권력을 쥐고 휘두른다. 시장은 유토피아 속 정치를 대표한다. 그의 인종은 백인이다.
영화에서 가수 '가젤'을 연기하는 사람은 가수 샤키라(Shakira)다. 샤키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엔터테이너다. 그녀는 라스베이거스를 연상시키는 무대에서 독무대를 갖는다. 샤키라는 유토피아 속 '대중문화'를 상징한다. 그녀의 인종은 백인이다.
영화 속에서 자의식을 가지고 독립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인물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모두 백인이다. 이도리스 엘바(흑인)가 연기한 경찰 서장은 보좌관과 시장을 의식하고 두려워한다. 보좌관과 시장을 연기한 배우들의 인종은 백인이다.
c. 디렉터
다양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 주토피아. 그리고 이를 제작한 국가인 미국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승진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과 '기회의 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아래 디렉터 제작발표회 사진에서 백인 외의 인종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백인이 애니메이션을 디렉팅 하는데 더욱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주토피아 속 종차별과 다를 바 없다. 마치 주토피아 속 나무늘보가 모든 동물들의 자리를 빼앗고 공무원을 차지했듯이 말이다. 주토피아 속 종차별은 미국의 종 차별의 투사체다. '동굴의 비유'다.
d. 아메리카니즘
영화는 다분히 미국적이다. 이상 세계의 설정부터 주인공이 사용하는 것들은 모두 미국의 것이다. <주토피아>의 아버지가 애니메이션이라면, 어머니는 미국이다. 둘 사이의 자녀가 아무리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할지라도 부모의 그늘을 벗어날 순 없다.
문제는 이것이 관객들에게 미국 우월주의(아메리카니즘, Americanism)를 심어준다는 것이다. 영화는 주토피아의 밝은 미래를 그린다. 최첨단 기술과 모두가 조화롭게 사는 이상 세계를 묘사한다. 주토피아는 설정상 모국이 없다. 이상 세계다. 그러나 이 세계는 미국의 형상을 닮았다. 무릉도원은 미국 맨해튼의 풍경으로 관객들 앞에 구현된다.
잠시 <주토피아>에서 한 걸음 나와 보자. "왜 세상 모든 히어로들은 영어를 쓸까?"라는 물음은 아메리카니즘 담론을 여는 훌륭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것의 유력한 답들 중 하나는 "미국이 악당을 막지 못하면 세계가 멸망한다는 전제 조건 때문"이다.
슈퍼맨의 파랗고 빨간 슈트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파란색과 빨간색, 그리고 미국인 주인공이라는 단서로 성조기를 연상한다. 미국(슈퍼맨)은 악당을 물리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아메리카니즘 영화는 주인공의 긍정적인 모습을 미국과 동일시하면서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입한다. 그 메시지는 미국은 우월한 국가이며,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메시지다.
영화 <록키>나 <캡틴 아메리카>처럼 노골적으로 성조기를 등장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구닥다리 방식이다. 이미 수많은 비평가들과 문화 연구자들이 노골적인 성조기 등장 씬을 거세게 비판했다. 때문에 최근 아메리카니즘 영화는 그것의 메시지를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화면에 녹인다. 아래는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이다. 성조기를 찾아보자.
성조기를 찾았는가?
이렇듯 미국 우월주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은밀하게 그 메시지를 주입한다. <주토피아>는 <아바타>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아메리카니즘을 설파한다. 이 새로운 기법은 바로 제품 간접 광고(Product Placement, PPL)다. PPL은 아래에서 더욱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유토피아 세계의 경찰 제복은 미국 국장의 그것과 같다. 미국 경찰 정복은 세계를 수호하는 제복이다.
디즈니는 다분히 미국 중심적이고 차별적인 주제를 주토피아라는 이름으로 전개한다. 영화는 인간의 이야기다. 여기서 해결되지 않는 몇 가지 부조리가 등장한다. <주토피아>는 이런 떡밥을 회수하지 않는다. 묵인한다 봐도 무방하다.
- 불법 노점 판매원 (불법 애니메이션 DVD 판매)
- 세금 탈세
- 교통경찰이 '진짜 경찰'이 아니라며 직업을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표현
유토피아는 직업 차별이나 탈세쯤은 눈 감아주는 세상인 걸까.
디즈니가 훌륭한 실험을 했다. <주토피아>에서는 제품 간접 광고를 볼 수 있다. 영화 속 제품 간접 광고는 제작비 절감과 흥행 실패시 금액적 부담을 덜어준다. 디즈니는 제품 광고를 실물 영화뿐 아니라 애니메이션에서도 위화감 없이 사용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PPL은 작품 몰입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2-d. 아메리카니즘 문제처럼 특정 사고방식을 주입할 수도 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아이폰, 혹은 제조사를 모르는 안드로이드 휴대폰(케이스가 씌워져 있다)을 사용한다. 통신사는 AT&T다. 삼성폰은 등장하지 않는다. PPL과 동시에 아메리카니즘이다.
영화에서 '쥐 세계'의 백화점 마우시스(Mousy's)는 미국을 대표하는 백화점인 메이시(Macy's)의 패러디다.
빠르게 등장하는 PPL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는 생소함과 이를 찾는 재미에 작품 몰입을 방해한다. 더 많은 제품 광고를 발견할수록, 집중력은 점점 흐트러진다.
<주토피아>는 한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실험과 담론을 건드렸다. 그러나 열어 놓은 담론들의 수에 비해 관객들에게 충분한 사고의 여지를 주지 못했다. 영화는 이상 세계를 말하면서 미국에 본적을 두었고, 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종 차별을 극복하지 못했다. 교통경찰을 하대했으며, 주디는 자신이 맡은 임무 외의 모든 범죄에 눈을 감는다.
이는 벌린 실험은 많은데 이 모든 단서를 회수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말로 갈수록 점점 더 엉성해지다가 종국에는 '공존'이라는 키워드로 대충 묶어버린다. 종차별의 반발로 또 다른 차별을 자행하는 벨 웨더(양)의 단죄를 통해 갈등의 원인을 제거(푸코의 권력 이론)한다는 메시지는 좋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건드린 담론들은 하나같이 현대 사회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주제들이다.
떡밥 회수를 제대로 하지 않았음에도 관객들이 분명한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모든 구성이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모든 구성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주제를 향해 내달릴 수 있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거나 과장된 몸짓을 한다거나, 극적인 화면 연출로 주요 메시지만 짧고 굵게 전달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만이 가진 장점이다. 그러나 장점은 관점에 따라 한계가 되기도 한다. <주토피아>는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좋은 말로 하자면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잘 이용한 작품이고, 나쁜 말로 하면 꼼수를 부렸다.
지금까지의 비평과는 달리 작품은 북미와 해외에서 호평이다. 필자는 디즈니가 너무 많은 실험을 한꺼번에 했다고 표현했지만 저명한 비평가들은 그런 도전의식을 높게 샀다. 필자는 주제의식을 급 전개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언급했지만, 비평가들은 디즈니의 메시지 전달을 끈기 있다고 칭찬했다. 둘은 같은 사실에서 자라난 다른 관점이다. 지금까지 <주토피아>를 지적한 근거 중 몇몇은 <주토피아>를 반드시 봐야 할 강력한 유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데빌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주토피아>가 디즈니의 문제작이며 아메리카니즘을 주입한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은 실제 영화와는 다르게 가상 세계로의 투영이 담겨 있다. 애니메이션과 관객 사이는 영화와 그것 간 사이보다 가상이라 불리는 렌즈가 하나 더 들어간다. 예민한 담론을 건드려놓고 (시간상) 황급히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은 제 할 말만 늘어놓고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리를 뜨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토피아>는 메시지를 주입시키느라 관객에게 소통의 여지를 주지 못했다. 마치 시간에 쫓기다가 질문 없이 급하게 자리를 뜨는 연사를 보는 것만 같다.
이 연사는 눈이 맑고 귀여운 토끼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