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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pr 27. 2016

그래픽 디자인 展 | 03

일민미술관 (3.25 ~ 5.29), 3층

그래픽 디자인전, 2005-2015, 서울


전시장소: 일민미술관

전시기간: 2016.3.25 - 5.29


1편 보러 가기/2편 보러 가기

일민미술관은 기존 대형 미술관들이 보여주는 입문하기 쉽고, 주제가 명확한 행보보다는 조금 더 감각적이고 이해가 필요한 주제의 전시를 한다. 이번 전시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큰 제목을 중심으로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본 주제와 호흡하고 표현하는가를 드러냈다. 이것 때문인지 전시장에는 그 흔한 리플릿 하나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그래픽 디자인(포스터, 책, 잡지, 로고타이프, 그리고 전단지 등)이 본 전시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전시를 복기하며 계단을 오른다. 우리는 1층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을, 2층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표현하는 예술을 읽었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지난 전시를 돌봤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래픽 디자인은 어디에나 있었다. 교과서의 통계 자료 속에,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CD 표지에, 책상 서랍을 열면 한 두개쯤 들어 있는 추억의 팸플릿 속에 그들의 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그래픽 디자인인지 몰랐다. '누군가 그린 예쁜 작업물' 정도? 아니, 누가 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들의 산물을 향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3층 전시실>


3층의 입구 어귀에는 <걸작이로세!-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이하 <걸작이로세!>)이 세 편으로 상영 중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임근준(홈페이지)의 서사로 전개되는 세 편의 영상은 본 건물에서 전시 중인 작가들의 작품이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어떤 모양으로 시각화하는지를 설명하는 작업이다.


(왼쪽) Sasa [44]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임근준(a.k.a 이정우), (오른쪽)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가 밝히는 제 작업의 개요, 임근준 서사
<걸작이로세!-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미술 디자인 평론가 임근준과 그래픽 디자이너 김규호·조은지가 함께 만드는 디자인 걸작선 동영상 강의 연작이다. 작품은 그래픽 디자인을 더 폭넓은 시각성과 미술의 역사에 연관해 바라본다. 강의와 촬영은 전시장에 설치된 세트에서 전시 기간에도 이어진다.


안 들으시면, 제가 써도 될까요?


(왼쪽)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와 *걸작이로세!를 감상중인 관객 (오른쪽)


필자가 <걸작이로세!>의 한 강연을 듣고는 감상에 취해 있다가 들었던 말이다. 임근준 평론가, 그래픽 디자이너 김규호, 조은지의 강연은 울림이 크다. 그리고 재미있다. 작품은 우리가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래픽 디자인이 디자인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가를 낱낱이 밝힌다. 강연은 평론가로서 작품을 해제하는 것에도 충실하다. 임근준 평론가는 한 작가가 '작가의 작업 세계가 덜 성장해 있던' 때부터, 자신의 방법론을 선언하는 시기까지 어떠한 사심도, 감정적 동요도 없이 작품을 연대별로 차분하게 설명한다. 한 작품의 상영시간은 20분 내외로, 절대 짧다곤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흡인력이 대단해서, 어느새 임근준 평론가 특유의 말투와 스타일에 푹 빠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픽 디자인> 전시가 그래픽 전시가 아니라 그래픽에 대한(about) 전시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필자는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가 밝히는 제 작업의 개요(오른쪽)를 재미있게 들었다. 상영시간은 25분 내외다


여기 임근준 평론가가 해제한 <그래픽 디자이너 김영나가 밝히는 제 작업의 개요> 중 일부를 싣는다.


김영나가 재구성한 오틱 노이어라는 폰트는 일종의 폰트 우상(FONT-IDOL)의 의미, 즉 의인화된 폰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서체는 기본적으로는 김영나 씨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동료 일러스터이자 디자이너인 칼 나브로(KARL NAWROT)씨가 디자인한 오틱 노이어(OTIK NEUE)입니다. 그렇지만 김영나 씨가 일부 알파벳을 유사한 형태의 약물로 교체했으니 정확하게 이름을 새로 붙인다면, '재구성된 오틱 노이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칼 나브로가 디자인한 오틱 노이어(왼쪽)와 김영나의 재구성된 오틱 노이어(오른쪽)


'오틱'이라고 하는 것은 체코의 피노키오 설화입니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피노키오 설화와 체코의 오틱 설화는 다릅니다. 자식이 없는 부부가 사람 형상의 나무를 주워와 어린아이처럼 키운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칼 나브로는 '오틱'이 불완전한 인간의 정체성을 띈 나무인형이라는 면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디자인할 때에 나뭇가지의 형태처럼 되도록 한 각도의 사선(그리고 그것을 반저해 얻는 각도)만을 이용해 조형했고, 서체를 판매할 때마다 캐릭터나 약물을 교체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트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렇듯 <걸작이로세!>는 한 디자인 걸작선이 탄생하기까지 작가의 배경과 그 노력에 대해서 깊이 있게 조명한다. 본 영상은 전시 개막 전에 제작된 세 편의 영상이고, 전시 중에는 전시장에 마련된 세트에서 촬영을 이어간다.


3층 전시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걸작이로세!' 촬영장. 다양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보인다





이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데이터 시각화 디자이너 소원영 작가의 <스몰 월드 / 그래픽 디자이너>가 보인다. 이 작품은 네트워크 그래프(Network Graph)를 그래픽 디자인과 접목시켜 표현한 작품이다.


3층에는 설계회사의 작품 *빌딩의 꼭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왼쪽) 작품 오른편으로 소원영 작가의 *스몰 월드 / 그래픽 디자이너가 보인다


이 작업은 여러 디자이너의 연결 관계를 조감하는 네트워크 지도와 그것을 바탕으로 디자이너 커뮤니티를 시뮬레이션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으로 구성된다.

디자이너 홈페이지, 국립중앙도서관 서지 정보, SNS 등에서 끌어온 자료를 근거로 작성된 네트워크 지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와 그들의 협업자, 의뢰인, 조력자는 노드(node, 동그란 부분)가 되고, 각 노드는 디자인 작업을 함께하거나 전시, 행사, 취재 등을 계기로 만난 사실, 또는 같은 곳에서 일한 사실을 매개로 연결(edge)된다.

네트워크는 노드의 존재를 드러내고 잠재적 커뮤니티를 파악하는 알고리즘을 거친 뒤 시간 순으로 그 크기가 점점 커진다.


이 작품은 <아트 솔라리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네트워크 그래프를 그리고 군집화(클러스터링) 한 뒤, 브릿지와 클로져(Closure, 이웃 노드를 통해서만 도달 가능한 작가들)를 찾고, 그것을 보인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그들의 조력자는 노드(동그라미)로 표시된다, 작품과 전시 또는 협업이 발생하면 엣지(선)로 연결된다. 이러한 협업 관계는 관계 그물망(network)를 형성한다


<아트 솔라리스>는 시사인의 기사를 통해 유명해졌다. 이 그래프가 보여주는 것이 갤러리와 작가 간 협업관계를 시각화하고 그것의 중심도(Centrality, 노드의 중요한 정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소원영의 작품에서도 몇 개의 중심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트 솔라리스>의 그것처럼 독점관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픽 디자인 작업 자체가 소규모이며, 청년 예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대주제로 '스몰 월드'가 들어간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소원영 작가는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던 2011년, '텀블벅'(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공동 설립한 창업가이기도 하다. 그의 네트워크 그래프 작품의 대주제인 <스몰 월드>는 소원영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구성한 작품이다. 본 작품은 그 '스몰 월드' 위로 돋보기를 올렸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자세히 조명하기 위해서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디자인 작업뿐 아니라 저술, 전시, 학회 활동 등을 통해 여러 분야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또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몇몇 '허브'(hub, 그래프 이론에선 클로져라고 표현한다, 필자 주) 디자이너는 크고 작은 디자인 협업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스몰 월드 / 그래픽 디자이너>는 여러 디자이너의 연결 관계를 조감하는 네트워크 지도와 그것을 바탕으로 디자이너 커뮤니티를 시뮬레이션해주는 애플리케이션으로 구성된다.


시각화(visualization)는 빅 데이터 이슈와 더불어 함께 발전하고 있는 분야다. 이 분야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통계학자, 그리고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있는 장소다.

소원영은 데이터 시각화 디자이너다. 그는 네트워크의 시각화와 보이지 않는 정보 매핑 작업을 전문으로 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단순한 관계를 산정하고 네트워크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를 채택하고, 인간적인 인사이트를 녹인다. 이것이 <스몰 월드 / 그래픽 디자이너>가 의미 있는 이유다. 그는 시간 순서대로 노드와 에지(관계)의 변화를 관찰하고, 부분 부분을 해체한다. 단순히 수학적 연결고리와 근거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소원영 작가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협업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해지고, 소개에 소개를 받아 영감을 얻는 관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뭉뚱그리는 대신, 시간 순으로 네트워크를 키우는 방식을 채택했다. 데이터 과학자는 심도있는 이해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을때 빛을 발한다. 소원영의 작품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디자인적 영감과 창작자 네트워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녹아 있다.





3부에 걸친 전시가 모두 끝났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자. 1층에는 '기둥 서점'이 있다. 이곳에는 본 전시와 관련된 책, 인쇄물, 상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구는 길종상가가 만들었다. 철제 프레임과 상자, 자석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 로비는 실용적일 뿐 아니라 일민미술관의 사각 유리창, 흰색 블라인드과 함께 일관성을 유지한다. 길종상가의 감각이 돋보인다.


일민미술관 1층 기둥서점의 모습, 가구는 모두 길종상가가 제작했다


이곳에서 Sasa [44]. 코우너스, 워크룸 프레스, 김영나, 김성구 작가 등의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래픽 디자인 전시가 '그래픽에 대한(about)' 전시에서 다시 '그래픽 디자인 예술'로 걸어나오는 순간이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훌륭한 마무리다.


기둥서점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탐이 나는 김영나씨의 작품 세트들


이 글은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전시 감상이다. 세 편에 걸쳐 이 글을 작성하기까지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고, 또 감상해주셨다.

이 시리즈는 필자의 미술 저작 중, 처음으로 오프라인까지 그 영향이 미칠 수 있음을 확인했던 글이다.

면식은 없지만 이 글을 읽고 '일민으로 나들이'를 가신 독자분과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었고, 초대 큐레이터이신 김형진 님께서 본 글을 직접 홍보해주셨으며, 설계회사에서는 본지에 사용된 작품 사진(<빌딩>)을 걸어주셨다. 이 외에도 페이스북으로 링크를 공유해 준 필자의 친구들과 교수님. Love를 눌러 스크랩해주신 브런치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부족한 지식으로 용감하게 적어 내려 간 이 글이 작가분들과 큐레이터님들의 의도를 왜곡하진 않았을까 여전히 조심스럽다. 이 글은 수정 제안이 있는 한 계속해서 변경될 예정이다. 그리고 (독자가 아닌) 감상자들의 경험이 언제나 글 위에 있음을 밝힌다. 전시는 감상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체의 목도(目睹)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끝으로 일민 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이신 함영준 님의 코멘트를 옮기며 글을 맺고자 한다. 길고 지루한 글을 관심으로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디자인은 주어진 정보를 시각적으로 제어하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는 엔지니어이기도 합니다. 정보를 제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특정한 시각적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일입니다.

(...)

그러므로 디자인을 바라보는 일은 그 시대의 산업은 물론, 문명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

그렇다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에서 만들어진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어떠한 세상을 유추해 볼 수 있을까요? 이 전시의 주인공인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들은 주로 현대 미술, 인디 음악, 독립 출판 등의 분야에서 적극적인 의미의 협업자로 일해 왔습니다. 이는 대형 클라이언트의 일방적인 요구에 맞춰 프로젝트의 최종 단계에서 추출된 정보를 가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영역이었습니다. 단순히 좀 더 적극적인 창작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이기도 하고, 몇십만 원의 월세로 방 한 칸을 얻어 소수의 디자이너들이 밤샘하며 맥북을 돌리는 형태로도 가능해진 디자인 환경의 덕택이기도 합니다.

 (...)

그러나 이 생태계(청년 문화 예술의 실천 주체)를 어떻게 넓혀가느냐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이들은 본능적으로 유보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몇 권의 책을 제외하고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책이 채 1,000부도 팔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디자인된 사물의 의미가 부피를 갖는 물건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의 중요한 모델로 전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과는 다른 자신의 취향을 강조하는 특유의 2010년식 멋부림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고, 현대적인 태도로 일하지 않는 기성세대를 외면해 버리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는 단순히 청년에서 기성세대로 진입하기 위해 거칠 수 있는 과정 중 하나였을까요? 지난 11년 동안 서울에서 이러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의 그래픽 디자인이 가능했었을까요?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는 앞으로 끝없이 펼쳐질 내리막 시대에도 적용 가능한 지속 가능한 산업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 아니라면, 다음 11년의 그래픽 디자인은 어떠한 방법으로 실천해야 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끝없이 정답을 우회하며 대안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아마도 내리막 시대에 가능한 유일한 그래픽 디자인일지도 모릅니다.

<내리막 시대의 그래픽 디자인> 중에서, 글 함영준(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Fin.


1편 보러 가기


본 글은 일민미술관의 <뮤지엄 리포터 2기>의 활동 기록이며, 일민미술관의 협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전시된 작품에 관한 모든 저작권은 일민미술관에 있으며, 사진과 글의 저작권은 작성자(속물러s)에게 있습니다. 본 포스팅은 비상업적인 용도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세이프 하버 조항에 따라 저작권자는 본 콘텐츠 작성자에게 게시 변경, 삭제 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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