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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눈 Feb 06. 2024

[헝가리]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삶을 그린 화가

헝가리 국민화가 문카치의 삶과 죽음 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보지 않은 이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형수의 방 (1870)


깊게 패인 남자의 눈가엔 어둠이 가득하다. 움켜쥔 두 손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한 마지막 투쟁. 애써 돌린 고개는 미련을 끊어내겠다는 굳은 의지일지 모른다. 자루총을 쥐어든 군인도 철창 사이 빛줄기도 모두 숨죽인 순간. 복사뼈에 새카맣게 때가 낀 철부지 아이들만 고개를 내뺀다. 발치에 내던져진 성경은 사형수를 위한 가족의 마음이었을까.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이 무력한 종이 쪼가리를 찢어발길 때, 어머니는 구석으로 달려가 통곡했을까. 바닥에 버려진 올리브 나뭇가지가 부활을 상징한다지만, 환하던 촛불이 무심히 꺼질 때 젊은이의 생명도 조용히 질 것이다.


이 그림은 헝가리의 국민화가 미할리 문카치(Mihály Munkácsy , 1844–1900)의 <사형수의 방>이다. 26살 청년 문카치는 <사형수의 방>으로 미술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베탸르'가 가족들과 보내는 마지막 순간. 이를 포착한 문카치의 그림은 '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사형수의 마지막 날)'이라는 제목으로 파리 살롱에 출품됐다. 이 그림은 공개 직전 미국의 거부에게 고가에 팔렸고, 문카치는 살롱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며 성공한 화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19세기 헝가리에서는 '베탸르(betyárs)'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베탸르는 범죄자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주로 베탸르는 사회 정의를 위해(?)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훔치는 이들을 뜻했다. 이를테면 헝가리판 홍길동이었던 셈이다. 멋진 옷을 입고 들판에서 춤을 추는 자유로운 영혼, 강자를 조롱하고 약자에게 베푸는 민중의 '영웅'. 이들은 헝가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베탸르가 부르는 낭만적인 노랫가락에 헝가리 어린이들은 상상을 펼쳤고, 여인들은 밤잠을 설쳤다.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보복성 징집을 피해 집을 떠났다. 거리의 무법자, 베탸르가 된 이들 중 상당수가 붙잡혔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붓 하나로 자수성가해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린 문카치. 그처럼 생전에 인정받은 '운 좋은' 화가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삶은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사형수의 방>이 암시하듯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있었다.


죽음으로 점철된 유년시절


문카치는 바이에른에서 이주해 헝가리 공무원이 된 아버지와 헝가리 귀족 가문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1844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미할리 리예브(Lieb). 그의 성 문카치는 고향인 문카치(Munkács, 당시 헝가리 왕국 영토였으나 현재는 우크라이나령)에서 따온 이름으로 훗날 성년이 되자마자 개명을 해 얻게 됐다. 4살이 되던 1848년부터 소년 미할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로 말미암아 죽음의 그림자와 맞닥뜨리게 된다. 


1848년 헝가리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체제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켰다. 코슈트 러요시의 지휘 하에 헝가리 독립 왕국을 세우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투쟁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가 15만 군대를 파병해 진압당했다. 이듬해 헝가리는 모든 자치권을 빼앗기게 되지만, 이 사건은 향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건립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미할리의 아버지는 헝가리 혁명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투옥됐다. 그로 인해 가세는 기울었고 미할리와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친척집에 의탁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어,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미할리. 하지만 지나치게 고생을 한 탓일까. 그가 6살이던 해에 어머니가 사망하고 만다.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6살 꼬마는, 목놓아 울어도 대답 없는 어머니 앞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 죽음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출소한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지 2년만에 재혼했다.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버지는 미할리를 포함한 자녀들을 각기 다른 친척 집으로 보냈다. 고아 아닌 고아처럼 살던 8살 소년에게 아버지가 투옥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고아가 된 소년 미할리는 새로운 보호자인 외삼촌의 손에 맡겨지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조카를 맡을 준비가 돼있지 않던 삼촌은 그를 동네 목수에게 도제로 보낸다. 매일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던 미할리는 중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게 된다.


예술로 승화한 고통


소년 미할리는 궁핍한 요양 생활 속에서도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다.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외삼촌은 미할리를 동네 미술교사에게 소개했고, 화가 엘렉 사모시(Elek Szamossy)의 문하생이 된 미할리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미할리는 24살이 되던 1868년, 기존의 성을 버리고 문카치로 다시 태어난다새 이름 덕이었을까. 그는 젊은 나이에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감정을 <사형수의 방>에 잘 담아냈다고 평가받으며 파리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프랑스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된 문카치는 앙리 에두아르 드 마르셰 룩셈부르크 남작과 가까워진다. 남작은 문카치를 자신의 저택 '콜파흐 성'으로 초청해 성 한켠에 아뜰리에를 차려주고 작품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이 시기 문카치가 그린 <향기를 품은 여인>은 사실주의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나무를 벤 뒤 잠시 휴식을 취하는 평범한 농촌 아낙네. 그의 얼굴에 묻어있는 피로는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마치 기도하는 수녀의 얼굴처럼 고요하고, 되려 성스럽기까지 하다. 나뭇가지 사이 사이에 맺힌 새콤한 열매, 양 손에 잔뜩 묻은 포근한 흙, 고된 노동으로 땀에 젖은 두건. 저마다의 향이 이 여인을 휘감고 난 뒤 그림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향기를 품은 여인 (1873)
사실주의(Realism)은 19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한 화풍으로, 작가의 자유로운 해석을 통한 의미부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려던 움직임이다. 종교와 역사적 사건을 주로 다루던 기존의 낭만주의적 사조를 거부하면서 탄생했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농민과 노동자 등 서민을 향한 관심을 토대로 평범한 일상 속 소재를 다루며 관습에 도전했다.


또 다시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소년등과일불행'이라 했던가.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고도 그는 여전히 지독히 불행했다. 난생 처음 돈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지만, 가진 게 오직 그림 뿐이었던 그는 더욱 불안했다. <사형수의 방>보다 뛰어난 작품을 그려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매일같이 시달렸고, 어릴 때부터 앓아온 우울증에 괴로워했다. 그는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면 이 고통도 끝이 나겠지.


마르셰 남작부인(1873)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순간마다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준 마리안느 세실 파피에르. 그는 후견인인 마르셰 남작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마리안느 세실은 문카치의 벗이자 뮤즈였고, 어두운 삶에 내린 한줄기 빛과 같았다. <마르셰 남작부인>은 문카치가 남몰래 흠모하던 마리안느 세실의 초상화다. 이 작품에서는 뒤셸도르프 학파의 차분한 색채와 사실주의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후견인의 아내를 감히 넘볼 수는 없는 법. 가난하고 불행했던 어린시절로부터 스스로를 구해준 그림, 그 그림을 알아보고 지지해준 은인, 그리고 아름다운 세실. 그 간극 속에서 통받던 문카치는 결국 성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다. 


문카치는 다행히도 경미한 상처만 입고 살아남았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남작은 문카치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카치는 회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작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조차도 버린 그를 거두어주고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던 남작이 사망했을 때 문카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충격, 슬픔, 죄책감. 어쩌면 그 뒤로 일종의 후련함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믿음은 종종 부담을 길러내고, 때때로 배반을 낳는다. 문카치는 고인의 부인이었던 마리안느 세실과 1873년에 결혼한다.


죽음을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거장


문카치는 이후 승승장구한다. 살롱에서 작품을 판매해 막대한 부를 얻고, 고향인 헝가리에서는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맞은 그는 그리스도 삼부작이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 중 첫번째 작품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는 높이 4미터, 너비 6미터를 초과하는 초대형 그림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크기가 실제 사람에 맞먹는다.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1881, 417X636cm)


문카치는 이 그림을 그리는 1년 동안 또 한번의 죽음을 만난다.  태어난 그의 아이를 잃은 것.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이 종종 일어났던 19세기 후반이었지만, 가까운 이와 수없이 작별하며 살아온 문카치는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두운 삶에 구원이 돼주었던 그림에 다시금 몰두한다.


아리 셰퍼 - 위로자 그리스도 (1837-1858)

당시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은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예컨대 성인의 머리 뒤로 금빛의 광배(후광)를 그리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표정은 주변 상황과 관계 없이 온화하게 표현하는 식이다. 아리 셰퍼의 <위로자 그리스도>는 이러한 규칙을 따른 그림이다. 문카치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문카치는 기존의 틀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평범한 인간 남자처럼 묘사해 교회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는다.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 속 예수 그리스도는 말 그대로 한 명의 사나이로 묘사됐다. 죽음을 앞둔 사나이,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사나이. 평생을 죽음의 그림자에 짓눌려 살았던 문카치에게 이 작품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초대박'을 친다. 4년간 유럽 전역을 돌며 전시회를 열었고, 방문자 수는 살롱을 능가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그는 화려한 영접을 받았다. 당시 한 기자는 "왕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환영을 받았다"고 평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골고다 (1884)


삼부작의 두번째 작품은 마태복음 27장의 한 순간을 포착한 <골고다>. 십자가를 정 가운데가 아닌 한쪽 구석에 그린 이 작품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규칙을 거부한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듯, 자식마저 앞세운 문카치는 스스로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골고다> 순회 전시도 성공리에 마치며 문카치는 명실상부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백악관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영접하는 등 방문하는 곳마다 귀빈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지쳐있었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우울증은 연이은 성공에도 그의 발목을 잡았고, 젊은 시절 걸렸던 매독으로 인해 정신 질환이 점차 심해졌다. 무리한 일정의 작품 활동과 순회 전시로 그의 건강은 약해져만 갔다. 이에,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이 사람을 보라>는 6년이 지난 1890년에서야 완성된다.


'Ecce Homo(에케 호모)'는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의 라틴어구로, 요한 복음서 19장 5장에 나오는 말이다.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질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뒤 군중 앞에서 에케 호모라고 외쳤다.


이 사람을 보라 (1896)


문카치의 마지막 대작 <이 사람을 보라>에는 실물 크기의 인물 73명이 등장한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작품 역시 유럽 투어에서 열광적인 호응을 받는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의 비열한 열정을 드러냈다"며 "문카치의 태도는 매우 충격적일 정도로 인간적"이라고 평했다.


어린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죽음의 그림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늘 무력했던 문카치. 도망칠 곳은 그림밖에 없던 그에게, 죽음을 앞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는 일은 일생 일대의 과업이었을지 모른다. 문자로만 남겨진 고통을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명징하게 그려낼 수 있었으니까. 그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님을 그림으로써 스스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테니까. 문카치는 삼부작의 마지막 편을 공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독 후유증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4년 뒤, 죽음과의 기나긴 줄다리기를 끝마치고 기어코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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