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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눈 Feb 02. 2024

[세르비아] '유럽의 화약고'에서 탄생한 작품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서 만난 근대 미술작품 소개

차디찬 눈밭, 한 소년이 낡은 모포 위에 엎드려있다. 보랏빛 입술과 창백한 얼굴, 외투 주름 위로 희끄무레하게 쌓인 서리. 소년은 꽤 오랜 시간 미동 없이 자리를 지킨 듯하다. 움푹 패인 눈과 남루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아 여유있는 집 출신은 아닐 것이다. 그는 어쩌다 이토록 애달픈 얼굴을 하고 눈밭에 누워있게 됐을까.



이 그림은 세르비아 사실주의 화가인 우로스 프레디치의 작품, <모친 무덤가의 고아>다. 차마 무덤이라 부르기 민망한 돌무더기 너머로, 멀끔하게 새로 깎은 나무 십자가 하나가 비스듬이 세워져있다. 제 무덤에 제대로 된 비석 하나 세울 형편이 못됐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두고 겨울날 떠났다. 눈밭의 냉기 속에서 소년이 무덤가에 기댄 것은, 따뜻한 어머니 품에 안겨 칭얼대고픈 어린아이의 마음에서였을까. 얼어가는 어머니의 무덤을 제 몸으로라도 녹이고픈 애닳는 마음에서였을까. 어느 쪽이든 소년은 자기 자신도 무덤도 온전히 덥힐 수 없다. 낡은 옷과 낡은 모포를 둘러봐도, 쌓이는 눈과 함께 몸도 땅도 차감게 식어만 간다.


우로스 프레디치 - 모친 무덤가의 고아(1888)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와 미술


세르비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 발칸 반도 중심에 위치해있다. 때문에 세르비아 땅은 줄곧 인근 제국들의 전장이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고아들의 집이었다. 프레디치의 그림 속 소년은 그 수많은 전쟁 고아 중 한명일 것이다. 어린 아이답지 않은 표정에 담긴 그의 슬픔은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어쩌면 소년이 세르비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언어도 종교도 다른 지배자 앞에 오랜 세월 굴복하며, 부모를 그리워하듯 과거를 그리워한 세르비아인들. 땅에 묻히듯 역사 속에 묻혀버린 자신의 뿌리가 차갑게 식을까 구슬픈 마음은 그림 속 소년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르비아 근대 미술사를 가로지르는 핵심 키워드를 단 하나만 꼽자면 '민족주의'가 아닐까. 북쪽에서 떠밀리듯 이주해온 슬라브족은 새로운 땅 발칸 반도에서 삶을 꾸려나갔고, 특히 그 중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역내 실력자가 됐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에 굴복해 수백년 간 지배를 받았고, 유럽 대륙이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탄생한 르네상스로 예술적 부흥을 이루는동안 발칸의 예술은 성장을 멈췄다. 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이 시기에 훗날 '세르비아니즘'이라고 불리는 강렬한 감정을 키워나갔고, 정체성을 찾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미술사에도 흔적을 남겼다.


세르비아 예술 작품의 총집합소, 국립 박물관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


베오그라드 중심부인 공화국 광장에 위치한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 한 때 구 유고슬라비아의 은행 건물이었던 이 곳은 10여년 간의 보수를 마치고 2018년에 재개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된 적이 있는 역사적 아픔을 지닌 건물이다.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은 고고학, 화폐, 미술 컬렉션을 운영하고 있는데, 특히 세르비아 미술 작품을 6천 점 가량 보유하고 있다. 근대 이전 작품이 많지 않고,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여러 작품이 유실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이곳이 세르비아 예술 작품의 본진인 셈이다. 외국 작품도 2천 4백여 점을 보관하고 있다. 소장품으로는 티치아노, 보티첼리, 보스, 루벤스, 르누아르, 모네, 세잔, 반 고흐, 마티스, 드가, 샤갈, 피카소 등의 작품이 있다.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의 상설 전시를 토대로 19~20세기 미술 작품을 감상해보면 세르비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따뜻하고 편안한 '비더마이어'


17세기까지 세르비아는 일종의 예술 '암흑기'를 가진다. 가톨릭보다 엄숙한 정교회 국가로서 비잔틴 양식을 차용했다는 점,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서 자생적 예술이 부흥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세르비아만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발견되지 않고,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바로크 미술이 발전한다. 테오도르 크라춘과 같은 성당 제단화가, 야코프 오르펠린과 같은 초상화가가 등장한다.


19세기에 들어서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 중부 유럽에서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 사조가 부흥한다. 세르비아는 잦은 전쟁과 이주, 약한 경제적 기반으로 인해 비더마이어 문화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예술가들을 필두로 이러한 풍조가 확산됐다. 또한 세르비아 공국의 탄생과 함께 오스만 치하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세르비아를 부흥시키자는 민족주의가 불타오른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는 요반 이사일로비치. 그의 작품 <밀란 왕자의 죽음>에서는 비더마이어의 특성과 민족주의의 발흥을 엿볼 수 있다. 


비더마이어는 일반적인 것을 뜻하는 독일어 'bieder'에 부르주아의 성인 'Maier'가 합쳐진 말로, 평범해보이지만 고급스럽고, 아름답지만 과하지 않은 절제미를 나타낸다. 당시 중산층이 증가하며 가구 디자인과 실내 장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일상 세계의 친근함과 가정의 아늑함에 몰두하는 감성을 추구하게 된다. 마치 안 꾸민 듯 꾸민 스타일, 집에서 홈웨어를 대충 걸치고 나왔는데 어딘지 모르게 쿨함이 느껴지는 감성이다. 이는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에서 두루 나타난다. 


요반 이사일로비치 - 밀란 왕자의 죽음(1839)


밀란 왕자는 세르비아 공국의 초대 공작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장남으로, 세르비아인들이 독립의 염원을 담아 지지와 응원을 보내던 이였다. 그러나 지병인 결핵으로 인해 20살에 요절했고, 세르비아인들은 공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이가 하직했다는 소식에 가슴아파한다. 


이사일로비치는 밀란 왕자의 죽음을 엄숙하고도 단정하게 표현하며 세르비아 민족의 아픔을 드러냈다. 제단 왼쪽에 서있는 밀로시 공작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직접 드러내지 않지만 깊게 패인 주름과 이마 위로 드리워진 그늘에 그 감정이 배어나온다. 어머니로 추정되는 머리맡 여인 역시 양 손을 맡잡고 입을 굳게 다물어, 절제된 슬픔을 토해내고 있다. 엄숙한 정교회 성직자들의 기도 소리, 따뜻한 색감의 덮개, 고급스럽지만 화려하지 않은 제복, 단정한 실루엣의 가족들에게 둘러쌓여 밀란 왕자의 마지막은 엄숙하고도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치뤄지고있다. 공국 왕자의 장례식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가족의 모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비록 원근법이 무시되고 그림 정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걸려있는 등 종교화의 문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세르비아식의 비더마이어와 민족주의적 해석이 더해진 작품이라고 보기에 손색이 없다.


자유로운 내러티브의 세계, 세르비아식 낭만주의


파블레 시미치 - 성 게오르기우스(1850)

비더마이어에 이어, 비엔나 아카데미 출신의 엘리트 화가들은 중부 유럽의 사조를 세르비아에 지속 수입해온다. 

세르비아의 낭만주의 화가 파블레 시미치가 표현한 게오르기우스 성인의 모습은 여느 작품의 성인 모습과 사뭇 다르다. 곱상한 얼굴에 선이 고운 팔과 다리, 풍성하게 흩날리는 망토까지. 용을 처치한 장수의 이미지보다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신 아테나가 연상된다. 그림 전반을 휘감는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이미지 역시 이 아이러니하고도 묘하게 아름다운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다.

누구도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던 괴물 용에게, 겉보습은 언뜻 약해보일지 모르나 놀라울 정도의 강인함을 품고서 도전한 한 인간. 대제국 오스만으로부터 지배를 받아온 세르비아에서, 다른 종교의 지배자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시미치는 이 소재를 택할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역사와 신화를 자유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내러티브와 이미지를 부여하는 낭만주의. 일견 약해보이는 자가 강자에게 승리한다는 시미치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설화에 따르면 리비아 실레네 시에서 사나운 용이 횡포를 부려, 시민들이 매일 양 두마리를 바치고 있었다. 양이 부족해지자 주민들은 대신해서 인간을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고, 왕의 딸이 제물로 선택되었다. 게오르기우스 성인은 이를 막기 위해 나섰고, 치열한 전투 끝에 창으로 용을 죽였다. 왕이 감사의 의미로 보물을 주었으나 성인은 이 보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실레네 시 사람들은 감복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역사적 사실을 재해석하고 그 속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건,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던 당시 세르비아에 꼭 필요한 의식이었을지 모른다. 세르비아가 가장 부흥했던 두샨 황제(스스로를 '차르'라 선언했다.) 시절은 참으로 낭만주의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노박 라도니치는 그 두샨 왕이 죽고, 그의 아들마저 죽으며 세르비아 제국이 몰락하는 시기에 집중했다.

노박 라도니치 - 우로스 황제의 죽음(1857)


<우로스 황제의 죽음>은 두샨 황제의 아들, 우로스가 사망하는 순간을 그렸다. 두샨이 사망한 직후부터 붕괴의 수순을 밟던 세르비아 제국은 우로스의 사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로스는 귀족들에게 권력이 분산돼 사실상 실권자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 비해 무능하고 우유부단해 제국 멸망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두샨 황제(1308~1355)는 강력한 리더십과 탁월한 전투 능력으로 남동부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스트롱맨이었다. 두샨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세르비아는 발칸의 실권자였으며, 두려울 게 없는 신흥 강국이었다.  


우로스 황제가 어떻게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라도니치는 상상력을 불어넣어 황제가 암살을 당한 것처럼 표현했다. 쓰러진 우로스 황제는 뒤로 절망하는 여인이 보인다. 마치 이 일이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인지 보여주는 듯하다. 반면, 우측의 두 남성은 마치 죽음을 예상했다는 듯 지나치게 무덤덤하다. 환한 불빛과 어둠의 짙은 명암 대비를 통해, 마치 강렬하게 타오르지만 곧 꺼져버리고 마는 횃불처럼 황제의 삶과 죽음도 순식간에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해내는 듯하다.


세르비아 공국이 내실을 다져가던 19세기 말, 라도니치는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두샨 황제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세르비아인들에게,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지 모른다. 무능한 왕은 언제고 쫓겨날 수 있으며, 그런 왕과 함께라면 제국도 공국도 오래갈 수 없음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주의를 통해 있는 그대로 바라본 세르비아


19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세르비아에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또는 역사주의가 혼재하게 된다. 작가들은 역사적 사건에 지속적으로 집중하지만, 과거에 비해 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를 그려낸다. 


쥬라 약시치 - 죽은 채 누워있는 미하일로 왕자(1868)

세르비아인이 두샨 황제 다음으로 가장 사랑한 인물은 세르비아 공국의 미하일로 왕자일 것이다. 국립 박물관 앞 광장 정 중앙에 있는 동상은 미하일로 동상,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미하일로 거리일 정도다. 그런 왕자가 암살을 당해 사망했다. 세르비아인의 정서에 큰 동요가 없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사건이다. 쥬라 약시치가 그린 미하일로 왕자의 죽음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육체가 눈 앞에 펼쳐진 듯하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달리는 말에 채찍이 된 작품이 아닐수 없다.


요반 이사일로비치 - 밀란 왕자의 죽음(1839)

<죽은 채 누워있는 미하일로 왕자>에서 과거와는 달리 사실적인 표현과 묘사가 눈에 띈다. 이는 앞서 소개한 밀란 왕자(밀란 왕자는 미하일로 왕자의 형이다.)의 죽음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밀란 왕자의 주변에는 다양한 문양과 상징, 의미가 평면적으로 산포했있으나 미하일로 왕자의 옆엔 오로지 촛불 뿐이다. 수염과 머리카락, 손가락 뼈 하나 하나가 마치 실제 인물의 그것같다. 얼굴과 쿠션, 이불의 주름도 매우 사실적이며 정밀하게 묘사됐다. 두 왕자의 머리맡에 있는 초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쥬라 약시치 - 전투 후의 휴식(1876)

표현방식뿐아니라 소재 역시 변모해갔다. 그간 역사적인 사건이나 성경 속 이야기가 주된 소재였으나, 점차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게 됐다. 쥬라 약시치는 세르비아인의 아픔을 주제로 사실주의적인 그림을 수차례 그렸다. <전투 후의 휴식>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간신히 잠든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전투 후라고 하지만 제대로 된 군복을 갖춰 입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이들이 군인인지 난민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잠든 이도 아직 잠들지 못한 이도 너무나도 지친 표정.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꾸러미가 지나가던 행인의 적선인지 이들의 재산인지 알 수 없지만, 세 명의 지친 사람을 쉬게 할만큼 큰 꾸러미로 보이지는 않는다.

약시치는 지속되는 전쟁과 침략을 경험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세르비아인의 힘겨운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슬라브의 영광


20세기에 들어서며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극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불공정한 처사, 터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 등으로 발칸이 위태롭던 이 시기. 세르비아인들은 켜켜이 쌓인 불만과 그간 표출하지 못했던 자부심을 예술 분야에서도 폭발시켰다.


      파블레 파야 요바노비치 - 두샨 황제의 결혼(1900)


세르비아인이 가장 사랑하는 왕 두샨, 그는 세르비아인의 억눌린 마음과 그간의 설욕을 씻어내주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영광스러웠던 시대의 국부, 그를 떠올리며 남슬라브인들은 자부심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잘생기기까지 했다. 수많은 세르비아 작가들이 그를 '당대 가장 키가 큰 남자', '매우 잘생겼고 똑똑했다'고 평가했다. 파블레 파야 요바노비치의 <두샨 황제의 결혼>은 자부심에 부채질을 했다. 지혜롭고 강인한 황제와 아름다운 신부,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 이 이야기는 '슬라브의 영광'을 되새김질하기에 충분했고 세르비아 자긍심의 물적 증거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이때 세르비아에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활기찬 분위기의 작품들이 등장했다. 마르코 무라트의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봄의 숨결>은 보티첼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당시 슬라브 민족주의를 작품에 담아냈던 알폰스 무하와도 유사한 화풍이었다. 마치 발칸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음을 선언하는 듯한 이 작품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마르코 무라트 -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봄의 숨결(1903)


신인상주의적으로 표현한 세르비아니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언제고 작은 스파크만 있으면 불이 붙을 수 있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의미에서다. 실제로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시해하며 갈등이 점화됐고, 이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된다. 세르비아는 승전 대열에 합류해 오스트리아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합해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이라는 최초의 남슬라브 통일 왕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세르비아인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고공행진하던 시기다.


이그냐트 욥 - 땅 파는 사람들(1932)


전후 세르비아에는 '세르비아다운 것'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번진다. '세르비아니즘'이라고도 불리는 강한 민족주의의는 미술 작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인상주의적 화풍의 <땅 파는 사람들>에는 땀 흘려 농사를 짓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밀짚모자를 쓰고서 곡괭이로 밭을 가는 농부의 손놀림에서는 다부진 힘이, 밭을 메느라 허리가 굽는 것도 아랑곳않는 모습에서 강인함이 느껴진다. 이들의 몸짓은 마치 내 땅을 내 손으로 일구겠다는 당당한 선언과도 같아 보인다. 향토적인 분위기의 화풍은 20세기 초반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지만, 세르비아의 그것은 전승 직후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밀란 코니오비치 - 맥주를 마시는 톤치카 삼촌(1938)


밀란 코니오비치의 <맥주를 마시는 톤치카 삼촌>은 술집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도시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가운데 두 남자가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 지 알 수 없으나 적극적인 손짓과 어두운 표정, 그리고 이를 주의깊게 듣는 바텐더의 모습에서 짐짓 진지한 이야기라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당시 세르비아인들이 모이면 정치와 사상에 대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의 앞날에 대해 끝없는 토론과 예측이 쏟아지던 시기다. 


자신만만하던 세르비아는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공산화, 국가 분열과 내전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예술의 자유로운 분위기도 사그라들었다.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소재가 등장하는 한편, 시대적 어둠을 담은 그림도 다수 탄생했다. 저작권 문제로 소개하지 못하지만, 이 시기 세르비아의 음울하면서도 불편한 그림들과 그 안에서도 새로운 생명력을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 전시돼있다.


다시 프레디치의 <모친 무덤가의 고아>로 돌아와 보면, 이제 이 그림은 다르게 읽힌다. 비록 가난하고 어린 고아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수많은 무덤 사이로, 무덤 속에 묻혀버린 세대 위로 그는 아직 숨쉬고 있다. 소년은 언젠가 일어나 눈발을 털고 어머니의 무덤과 작별할 것이다. 죽어버린 생명, 땅에 묻힌 역사를 뒤로하고 슬픔을 삼키며 자기 몫의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발칸의 역사를 겪어낸 슬라브인들에게 그림 속 소년의 고통과 추위는 현재 진행형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슬픈 그림 속에서 오히려 미래를 향한 희망이 보인다면 과한 해석일까.

우로스 프레디치 - 모친 무덤가의 고아(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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