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바다출판사 2020
세상을 피해 숨은 사람이 명랑할 수 있을까요? 퍽 반어적으로 느껴지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명랑한 은둔자’라, 외로운 생활 속에서 나름의 기쁨을 누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상상하며 책을 펼쳤어요. 하지만 이내 넓고 깊은 감정이, 친근한 관계에 대한 통찰이, 깊은 상실감을 겪은 후에야 찾아오는 깨달음이 이 책에 담겨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어요.
캐럴라인 냅은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 작가입니다.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를 둔 쌍둥이 동생이기도 해요. 혼자 지내는 삶에 만족하면서도 줄곧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이고요. 대인 관계에서는 수줍음이 많은 내향인이고,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을 호되게 겪기도 했어요. <명랑한 은둔자>는 1990년대에 삼십 대 후반이었던 그의 내밀한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집입니다. 작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제 곁의 친구처럼 느껴졌어요. 마음이 맞는 친구와 고민을 털어놓으며 양질의 대화를 나눈 듯한, 정말이지 기쁜 독서 경험이었습니다! 김소연 시인의 추천사를 빌려 말하면 “누군가의 인생은 그 자체로 우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부모와의 관계, 친구 관계, 혼자 일하며 사는 삶 등 작가가 풀어내는 내밀한 이야기는 곧 <명랑한 은둔자>를 읽는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구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친밀감, 죄책감, 외로움, 사랑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을 풀어내기 때문에 책에 쉽게 빠져들 수 있어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게 혼자 있는 시간과 함께 있는 시간의 적절한 혼합 비율은 얼마일까?”(p197)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되고요.
무엇보다도 냅의 글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 멋졌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떠나보내고 도저히 맨정신으로 애도할 수 없어 매일 알코올에 의존했던 암흑 같은 시기를 보냈어요. 하지만 ‘너무 슬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과거의 자신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알코올로 무디게 만든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맑고 또렷한 관점으로 과거의 자신을, 복잡한 내면을 톺아봅니다. 정리벽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습관부터 무시무시한 중독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흔들렸던 경험을 이성적으로 돌아보며 “하지만 여기서 내가 깨우칠 점이 있다고는 생각한다.”(p266)고 분명히 말해요.
그래서 우리는 슬픔과 평화가 공존할 수 있다는 걸, 고독한 동시에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마음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겐 분명 바뀔 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존중하는 방법이 궁금하시다면, 내 마음속 난장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고민하신다면 <명랑한 은둔자>가 기꺼이 친구가 되어 줄 거예요.
나는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물론 단점은 있어. 하지만 난 혼자 사는 게 정말로 좋아.” 장점도 몇 가지 꼽아 보였다. (...) 나의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설계자라는 사실이 안겨주는 주기적인 작은 성취감. (p43)
음식을 관리하는 일은 삶을 관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약간의 시간, 약간의 자기 이해, 약간의 용기, 많은 지지를 한데 모으면, 누구나 서서히 대처할 방법을 알게 된다. (p175)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p186-187)
•이 소개글에 마음이 동하신다면 월간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도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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