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다음 두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우린 묘한 틈새 속에 살고 있다. 고민해봤자 별 소용 없지만 고민은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 새벽 느닷없이 쏟아낸 것들을 적어두었다. 일기장에 적은 걸 여기 옮기는 이유는 그 고민의 흔적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읽기에 적당치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막 적은터라 재미없음을 미리 알린다. 진지한 것에 취향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 한쪽 구석에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구나 정도로 받아들여주길 희망한다.
여긴 어딘가? 나는 누군가? 멘붕의 증거 같은 이 질문에 진지한 궁서체로 답하고 있는게 나란 사람이다.
나는 그저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고 그게 어딘지, 그게 누군지 알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 체계 속에 내 존재를 가두는 작업일 뿐이다. 그 작업은 처음엔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종내 착각이라는 걸 발견하는 모순된 일이다. 원점회귀 방식을 취하는 그 일에 빠지면 무기력이 당연한 것이 되고 자기애가 넘쳐흘러 겁만 낸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이라고 외친 그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건 두려움이다. 스스로를 향한 착각은 두려움의 원천이다. 나를 똑바로 보라. 내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면 거짓말 같은 사랑으로 나를 대하게 되고 어이없는 일에 시간을 들이게 된다. 살아 있다는 건 지금의 연속이지만 그 지금이란 시간의 물결을 탄다. 시간은 파도처럼 휘몰아쳐 가고 정신 차려보면 나는 그 속을 허우적대다 저만치 떠밀려 가 있게 된다.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다보면 내가 나라고 선택한 그 존재가 원하는 일을 찾게 되고 그것을 자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획책한다. 기획된 자기 개발은 일상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기 위로의 미약을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뒤돌아보면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절벽 앞에선 그 어떤 것도 보람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예비한 삶. 니가 죽을 것이라고 말해줘야 죽을 줄 아는 인간의 어리석음. 망각은 삶과 죽음을 떼어놓으려 애쓰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태어난 순간 죽음이라는 운명을 예약했음을 어찌할 수 없다. 평생을 이것도 아니네 저것도 아니네 만 외치다 죽는다면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진정 그게 아닌 줄 모르고 그랬나? 때때로 우린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그런 줄 몰랐다고 중얼거린다. 인간은 이상한 한계를 타고 났다. 죽어야 하는 한계에서도 평생 살 것처럼 행동하고 많은 시간을 살아도 삶의 한계에 죽음이 있음을 인정치 않으려 한다. 준비된 어리석음. 이 얼마나 슬픈 드라마인가.
하지만 삶이란 과정이다. 모든 건 결과가 말한다는 명제의 오류는 여기 숨어 있다. 결과가 의미라면 우리의 의미는 죽음인가? 가끔은 맞지만 계속은 아니다.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를 몰라도 발버둥 치며 살아지는 대로 때로는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인간이다. 삶은 그 자체로 두고 볼만한 느껴볼만한 것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삶은 한계를 노려보고 그 한계의 천정을 뚫는 일이다. 지나간 일들의 잔해가 널려 있는 바닥을 향해 아무리 후회해도 그건 이미 지나간 세계의 일이며 기억의 재방송이다. 천정이 무너져 내가 죽어도 우린 계속한다. 죽는다는 건 태어날 사람의 이름을 짓는 일이고 그 이름의 주인공은 다시 또 한계를 노려본다. 우린 동물이지만 이걸 이해하는 동물이다. 사람을 너무 크게 생각하면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사람을 너무 작게 생각하면 한계를 노려보지 못한다. 사람은 그냥 인간이고 딱 반만큼만 숭고하다.
뒤돌아보면 죽음 앞에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죽음이라는 한계가 두려운 건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다는 모든 게 끝이라는 인식의 절벽 때문이다. 한계를 노려보라. 그리고 그 한계의 천정을 뚫어라. 우리에게 예비 된 것을 걱정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용기를 내라. 삶은 그런 자들을 위한 행진곡이며 웃는 자들을 위한 배경음악이다. 복잡한 미로를 만든 자는 내 자신이며 그 미로에서 날아오를 수 있는 것도 내 자신이다. 시간제한이 있기에 짜릿한 놀이처럼 인생을 즐기고 만남이라는 세계의 겹침을 사랑한다면 죽음은 모든 여행의 집이 될 것이다. 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 자는 말한다.
잘 돌아와서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