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람

by 서효봉

제주라는 섬에 왔다. 몇 번이고 온 곳이지만 그때마다 제주의 표정은 다양하다. 예전 기억을 더듬어보면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도 있었고, 태풍이 불어온 낮도 있었다. 태양 아래 타들어 가던 바다, 눈에 얼어붙은 한라산도 만난 적 있다. 하지만 오늘은 고요한 아침 속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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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통나무 집 한 채에서 자고 일어나니 바람이 분다. 지금 여기, 제주의 바람은 방금 우려낸 따뜻한 녹차에 얼음 3개를 띄운 듯 묘한 온도다. 찬 바람이 몰려와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만난다. 그 가운데 나무들이 살아 움직이고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순서 없이 들린다. 풀벌레 소리, 지나는 벌, 어슬렁거리는 고양이까지. 완벽하게 고요할 뻔한 아침의 풍경이 이들로 조금씩 채워져 꿈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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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바람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천천히 아장아장 다가와 귓가를 스치는 바람, 그 뒤에 바짝 붙어 함께 불어와 따스하게 감싸는 바람, 회초리 치듯 매섭게 일어나 올레를 가로지르는 바람, 조용히 머물다 말없이 사라지는 바람, 밭에 올라온 어린잎을 건드리고 나무 뒤로 숨는 바람. 그런 바람이다. 바람이야 네가 바람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느꼈다. 바람에도 목소리가 있고, 표정이 있으며, 때마다 다른 손길이 있음을, 오늘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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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숙소에 돌아와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을 어찌어찌하여 완성! 이제 먹기만 하면 된다고 환호하며 앉다가 침대 모서리에 무릎을 찧었다. 잠시 고통이 밀려왔지만 맛있는 저녁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다시 금방 행복해졌다. 행복해지려면 아니 행복을 향한 길은 언제나 바쁘다. 이것저것 갖추고 포기하지 못하느라 나는 바빴다. 오늘 아침 의자에 앉아 바람을 맞다 무릎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큰 상처,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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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지나고 나서야 그게 그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 저 멀리서 무언가를 품고 와 여기 쏟아내어도 어쩔 도리 없이 맞이해야 하는 것, 그게 제주의 바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분다면, 불어온다면 우리에게 무언가 숙명처럼 다가온다면 아무리 어딘가로 내달려도 도망칠 수 없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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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삶의 정원을 지나, 욕심의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보면, 반드시 여기 이 섬, 제주에 와 닿을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여기 부는 바람과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고립된 이 섬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기도 현실이네 하고 한숨 쉴지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 무릎에 난 상처쯤은 꼭 하나 발견하고 떠날 테니 말이다. 나도 몰랐던, 너도 몰랐던, 우리도 몰랐던 그 상처에 바람이 불면, 아물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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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내가 제주의 바람을 사랑했던 이유는 내 영혼까지 씻어낼 듯 불어온 세찬 바람 때문이었다. 지나간 일을 붙잡고 서 있는 죄책감 때문일까?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오늘 아침 숲에서 불어온 그 바람은 저 혼자 잘났다고 소리치지 않았고, 저기 저 모든 것들을 감싸 안았다. 그래서 보았다. 저 꽃이 흔들리듯 우리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를. 제주의 바람이 분다. 어찌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고, 용기 낸다면 달려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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