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도종환, 시집 <사월바다>
시를 읽지 않게 된 지 얼마나 되었던가?
국문과를 나왔고, 학창시절 그렇게도 작가가 되고 싶어했을 때에도
사실 시는 얼마 읽지 않았다.
게으름을 핑계로 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해 안되는 말을 하면서.
아마 나는 개폼이 필요했던 것 같다.
시 같은 거, 소설 같은 거 읽지 않아도 작품 펑펑 써내고 성공하는 <작가 선생님>.
그런 게 되고 싶었다. 그런 게 멋져 보였다. 우습지만 그럴 때도 있는 법.
하지만 반성하고 살짝 얼굴을 붉히면 될 것을 몇 년이나 진짜로 꿈꾸었다.
진정 바보였다.
대학 졸업 후(기억을 위한 시간 기준이란 대개 이렇게 일반적이다.) 사회에 나와 직장을 다니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일상적인 야근과 그에 불구하고 달라붙지 않은 성과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경험해보지 않고 현실에 뛰어드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왜 몰랐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삶은 만만하지 않아. 꿈을 이루는 건 더해.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꿈을 이루길 노력하지 않고 사회에 들어온 너, 이제 다시 알아야 할 거야.
조직이 뭔지, 책임이 뭔지, 비전이 뭔지. 노력이 진정 무엇인지.
수많은 선배들을 보고 알아야 할 거야.
시간이 지나 책임이 하나하나 내려오기 시작했다. 시지포스의 바위처럼 양어깨가 무거웠다.
바빴다. 업무용 컴퓨터는 늘 켜져 있었다. 커서는 엑셀 안에 반짝반짝 머물렀다.
나는 늘 내 짐을 잘 짊어지고 있는지 확인했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인 밤이면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눈 아래가 검은 아이가 옷깃을 여미고 방 안에 들어가 조용히 울었다.
왜 가슴이 까매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바빴다.
그러다
어느 춘사월엔가, 제주도에 갔다. 따라비오름에 올라서서 바람을 맞았다.
바람은 내 등 뒤에서 앞으로 불었다. 유채꽃이 만발했지만 수국은 아직 피지 않은 계절이었다.
저 멀리서 바람개비 같은 풍력발전소가 바람에 따라 그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 때 손 끝에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은 바람개비를 밀어올리던 그 힘으로 내 손바닥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때로는 아무 의미 없던 행동이 의미를 지니곤 한다.
나도 풍력발전소처럼 움직이고 싶었다.
그게 모든 것의 이유이다. 내 모든 것이었던 일을 그만 둔 것과 스페인 순례자길 778km를 걸었던 것과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 갔던 것과
그리고 오로라를 좇아 아이슬란드까지 갔었던 이유가 필요하다면.
제주도에 그 흔하다는 바람에게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 이후로 뜨거운 여름과 서늘한 가을을 넘어 초겨울.
이렇게 따스한 전기요에 반쯤 녹아들어, 등은 서늘한 공중에 꼿꼿이 세운 채
도종환의 시를 읽는다.
고마웠던 봄의 유채꽃과 미처 돌보지 못한 가을 들국화에게 응당 이 시를 바쳐
나는 너를 읽었노라 꼭꼭 티를 내야 하는 것이다.
들국화
-도종환
들국화 꽃잎에 가을 햇볕이 앉아 있다
얇고 여린 피부에서 윤이 난다
내게 들국화는 들국화 이상이다
이 세상 모든 꽃이 저마다 빛나는 얼굴을 지녔고
하나의 성기와 몇개의 꽃술을 갖고 있지만
나는 들국화만 그걸 갖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꽃이 아니에요라고
들국화는 말하지만 나는
들국화에 마음을 빼앗긴지 오래다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꽃잎의 표정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걸 보면서
느티나무는 내가 들국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망을 들국화라 부르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들국화를 보면 마음이 끌리고
연한 빛깔 위에 내린 햇살 곁에 나란히 있고 싶고
작고 투명한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내 팔에 기댄 채 들국화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 번져오는 맑은 기운이 내 몸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구석구석 따스하게 번져나가고
내 영혼의 물줄기가 그에게 흘러가
그의 뿌리를 적실 때도 있다
오늘도 들국화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
들국화 옆에서도 문득 들국화가 궁금해진다
특별할 것 없는 들국화의 소박한 나날과
꽃잎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이파리와 이파리 밑에 감춰진 그늘과
가을까지 오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짐승들과
상처와 빗줄기까지 사랑한다는 걸
들국화가 믿어주길 바란다
사랑이 왜 편애일 수밖에 없는지 알기에
가을 햇볕도 들국화 꽃잎 위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리라
-시집 <사월바다>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