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시청자
<흑백요리사 시즌2>를 보다가 마술처럼 완성되는 요리를 보면서 아내와 아들이 '와! 먹고 싶다!'라고 말한다. 거기까지면 괜찮은데 아들이 '아빠는 저렇게 못하겠지?'라면서, 젊은 시절 만화책 <맛의 달인> 시리즈를 일찍이 정독한 아빠의 자존심을 살살 긁기 시작한다.
흥! 아빠는 30분 내에 파인다이닝급 다섯 가지 코스 요리도 할 수 있다고!
내 말에 아내와 아들은 낄낄대며 웃어넘긴다. 그 웃음소리를 기억하고 있던 나는, 마침 업무차 압구정동에 들른 김에 더현대 압구정동 식품코너에 들렀다. 더 현대 지하 1층에서는 일반 마트에선 보기 힘든 치즈, 버터나 푸와그라, 캐비어(이 둘은 비싸서 못 샀다), 고급 식재료들을 팔고 있다. 머릿속으로 코스 구성을 떠올리면서 평소엔 사지 않았던 식재료를 신중히 골라 담았다. 가벼운 장바구니임에도 6만 원이 넘게 나왔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린 뒤 찬 바람을 맞으며 집 근처 농협마트에 다시 들러 메인 요리로 낼 한우 안심과 등심을 샀다.
자! 두 사람이 백종원, 안성재 심사위원급으로 한 번 평가해 보시지!
장을 본 재료들을 죽 늘어놓고 요리 순서를 떠올린다. 그리고 메뉴판을 작성했다. 메뉴판을 본 아내와 아들은 키득거리며 밥상 앞에 자리를 잡는다.
2026 해피 파인 다이닝 메뉴
1코스 프레쉬 샐러드
- 신선한 채소, 이탈리안 올리브오일, 레몬즙, 24개월 숙성 파르마산 치즈
2코스 한입거리 (Amuse-Bouche) 토스티토스에 얹은 닭꼬치와 캐슈너트
- 토스티토스 과자, 닭꼬치, 인도 캐슈너트
3코스 단호박수프 계란구이. 하몽을 곁들인
- 단호박스프(오뚜기), 계란찜, 스페인산 하몽
4코스 메인요리 튀일 스타일 마늘구이와 안심 스테이크
- 생크림(서울우유) 수프, 한우 안심, 프랑스산 버터, 레몬껍질, 쪽파, 구운 갈릭
5코스 등심 햄버거
- 리틀바잇모어 빵, 한우 등심, 프랑스산 버터, 콘 옥수수, 파르마산 치즈, 불고기 소스
6코스 디저트 이북식 인절미와 녹차아이스크림
- 떡, 잡화꿀, 녹차 아이스크림
요리는 순서에 따라 물 흐르듯 서빙되었고, 아들과 아내는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면서 평가를 내린다.
아내 왈, '단짠단짠을 의도한 듯 하지만 나는 하몽을 싫어해서 탈락!'
아들 왈, '닭꼬치의 파가 이븐 하게 익지 않았군요'
...
나중엔 결국 '조금씩 먹었는데도 너무 배부르다'로 끝이 났다.
미식이야 어찌됐든 다들 한바탕 웃으며 맛있게 먹었으면 아임 파인(I am fine)한 다이닝(dining)이겠지.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건 아내가 달그락거리며 치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