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성비 인간입니다

나의 쇼핑 생활

by 뮤즈노트

쇼핑을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갖고 싶은 물건이 많은가 하면 딱히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차를 좋아해서 사고 싶은 드림카가 있고, 명품 패션 아이템이나 새로운 전자기기가 출시될 때마다 쇼핑욕구가 일렁이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그런 욕심과는 거리가 있다.


차는 이미 십 년도 넘게 탔지만 어쩐 일인지 시간이 갈수록 조용해지는 차에 더욱 깊이 정이 들어가고 있다. 아내가 '이 옷은 입지 마!'라고 해도 물 빠진 가디건조차 편해서 버리기 아깝다. 좋아하는 전자 기기도 고장 나서 대체할 필요가 있을 때 산다. '이걸 사면 멋질까? 저건 어떤 기능이 있을까?' 궁금해하는 쇼핑이란 행위를 좋아하지만 정작 사려고 할 때면 망설여지는 나는 대체 어떤 류의 사람일까?


가성비. 'budget option'이란 단어를 어제 유튜브에서 봤다. 새롭게 글을 쓰고 싶어 져 서랍에 넣어둔 만년필을 씻고 정비하다가 요즘 만년필은 어떤 게 있을까란 생각에 이것저것 둘러보던 중이었다. 만년필은 시계 시장과 비슷하게 매니악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파고 들어가다 보면 엄청난 전문성이 필요해지는 법이어서 펜 한 자루에도 명품 브랜드가 있고 고가 제품이 라인별로 존재한다.


무엇보다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만년필 한 자루에 수백만 원짜리가 즐비하다. 물론 명품 브랜드 시계가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싸다고 할 수 있지만 기능 및 설계의 복잡성을 감안한다면 비싸다. 그런데 'budget option'이라고 소개된 제품의 경우엔 비슷한 기능을 하면서 가격이 착하다. 그래서 매번 고민하다가 '일단은!' 가성비 제품이라고 홍보하는 물건을 사게 된다.


문제는 가격이 싼 만큼 품질이 들쭉날쭉하다는 것. 그래서 고가 제품은 처음부터 제 값 주고 품질 좋은 물건을 사는 게 절약이라고 말한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런데 가성비 제품의 장점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빛을 발한다.


손목시계가 필요해서 샀는데 막상 차보니 번거로울 수 있고, 만년필을 샀는데 딱히 사용할 일이 없을 수 있다. 그때그때 좋아 보이거나 유행을 따라 무언가를 사게 되는 충동구매를, 가성비 제품을 쓰다 보면 판별하게 돼서 매몰비용을 아껴준다. 쓸모 없어지면 중고로 팔면 되겠다 싶지만, 귀찮고 낯설어서 당근을 꺼리는 입장에선 고마운 것이 바로 가성비 라인의 제품들이다.


가성비 제품을 쓰다 보면 문득 내가 사고 싶던 것이 진짜 필요했던 걸까 돌이키게 된다. 새로운 물건에 대한 욕심은 과연 정직한 것이었나 성찰하게 된다. 살면서 저걸 사면 기쁠 거야 싶지만, 식기 세척기와 로봇청소기처럼 꾸준히 만족감을 주는 제품은 드물다. 그러고 보면 식기 세척기와 로봇청소기는 정말 대단한 제품이다.


최근에 쇼핑한 물건은 역시나 가성비 만년필 한 자루다. 이런 제품을 쓰게 되면 애지중지 모시고 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하다. 그 기능에만 집중하면서 열심히 사용하면 된다. 기호가치나 교환가치 따질 필요 없이 딱 그 목적에 맞는 사용가치에만 몰입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유튜브로 외국인 채널에서 리뷰하는 가성비 만년필 영상을 며칠간 보고 있으니, 아내가 '저런 것 말고 좋은 걸로 사! 내가 사줄까?'라고 호기롭게 말한다. '고맙지만 저 정도면 충분해.'라고 대답한다. 편하게 그 목적에 집중할 수 있는 물건을 결국 샀다. 기다림은 똑같이 기분 좋다. 새 만년필을 쓸 요량으로 노트도 새로 샀다.


이렇게 쓰다보니 '가성비니까 괜찮아'란 느낌으로, 불필요한 만년필 쇼핑을 정당화같은 느낌이 든다. 그 역시 타당한 말 같아서 곤란해졌다. '싸면 충동구매도 괜찮은가?'라고 묻는다면, 그저 '나는 가성비 인간입니다.'라고 대답해야지. 가성비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사실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파인다이닝급 코스 요리(설거지를 곁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