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리더기를 쇼핑하다

당신을 위한 솜사탕같은 숙면 메이트

by 뮤즈노트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오랜 논쟁이 존재한다. 구한말 옛 전통과 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척사파와 신문물의 도입을 주장했던 개화파처럼 이 둘의 논리는 팽팽하다.


"에헴, 책은 자고로 종이로 사각사각 침 발라 넘겨야 의미를 곱씹게 되는 법! 책은 책다워야지!"

"무슨 소리! 책은 겉모습이 아니라 담긴 내용이 중요한 법, 편리하게 읽을 수 있으면 장땡이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독서에 있어서는 '너도 옳고 그대의 말 또한 옳다'라는 황희 정승급 포지션을 유지해 왔다. 일단 책은 그 자체로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정보의 무게를 암시하는 듯한 묵직함, 한 번 읽을 때마다 책장 사이가 미세하게 한 페이지씩 부풀어 오르는 느낌은 만날 때마다 가까워지는 썸남썸녀의 마음을 닮았다. 게다가 논문을 쓸 때 각주는 책 페이지를 표기해야 하므로 전자책으론 대체 불가능한 면도 있다. 충전 없이도 불빛만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책을 꺼내 펼쳐 보면 되는 실용성도 무시 못한다.


무엇보다 책은 개성이 고유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내 서가에 꽂힌 책들은 어릴 때 읽던 1979년도 금성출판사판 <이즈의 무희>나 <야생의 절규>처럼 누렇게 바랜 책부터 대학 때 읽던 카프카라든가 대학원 시절 시간에 쫓기며 읽던 전공서적과 내가 쓴 저작까지 빼곡히 들어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서가를 주욱 훑어보는 것만으로 그 시절 추억이 하나씩 되살아오며 말을 건다. 물론 이제는 서가를 마주하고 있어도 주로 아내만 말을 거는 편이지만. 흠.


게다가 책 냄새는 묘하게 매력적이다. 파주 롯데 아울렛 랄프로렌 매장에 가면 오래된 서가에서 날법한 호감형(?) 쾌쾌한 향기가 나는데 아내가 '폴로 그린 향수'(폴로 그린 오드뚜왈렛)라고 알려줬다. 조향사가 서재에 들어섰다가 '오! 책과 오크 책장냄새가 뒤섞인 향기라니 넘 매력적이잖아!'라면서 만들었을 듯하다. 낡아가는 책장 냄새 따위 뭔가 좀 변태적인 취향 같지만 실제로 이런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은 듯하다. 그런데 실제로 도서관에 파묻혀 일주일간 목욕도 제때 못하는 대학원생들은 이성에게 왜 인기가 없는 것일까? 궁금하다. '논문학기 대학원생 넌샤워 세븐데이즈 오드뚜왈렛'... 그만하자.

폴로 그린 향수


이처럼 책을 좋아하는 내가 굳이 이북리더기를 쇼핑한 건 여러 이유가 있다. 자기 전에 뒤척이며 책을 읽다 보면 불을 끄라는 정중한 요청을 듣게 된다. 그래서 이케아에서 뉘모네 플로어 스탠드를 쇼핑했다. 머리가 움직이니까 독서등으로 좋겠다 싶었고 실제로 기능도 좋았다. 그런데 자기 전의 독서란 솜사탕이 따듯한 손기운에 사라지듯 스르르 잠에 빠지는 맛인데 헤드에 달린 버튼을 누르기 위해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이래서야 잠이 달아나버린다.

이케아 뉘모네 플로어 스탠드

또 다른 이유는 출장을 갈 때 찾아왔다. 겨울 출장이어서 며칠간 입을 옷을 넣다 보니 책 넣을 공간이 부족했고 무거웠다. 이럴 때 이북리더기가 있다면 거의 무제한으로 책을 골라 담아 가져갈 수 있으니 편리하다. 결정적으로, 몇 년 간 사용하던 예스 24의 크레마 액정이 아쉽게도, 마침 정말 안타깝게도 고장 나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새로 쇼핑할 밖에.


네이버 전자책 카페에 들어가 최근 유행하는 기기들을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거나 사고 싶어 하는 브랜드는 의외로 중국 오닉스 제품으로 보였다. 가격 역시 제법 고가였다. 그런데 오닉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리더기를 살펴봐도 내가 쓰던 구형 크레마와 비교하여 기능 또는 속도의 월등한 향상 같은 건 딱히 없어 보였다. 전자잉크의 특성 등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책이라서 그런 거겠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나라나 독서 인구는 한정적이니 책 전용 리더기를 경쟁적으로 제작하여 기능을 혁신할 동력은 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아이패드나 휴대폰 등 기능적 대체재도 많다.


따라서 독서 전용 기기라는 것은 누군가에겐 자다가 목마를 때 마시는 자리끼 전용 물컵처럼 불필요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독서 전용 이북리더기를 샀다. 왜냐고 묻는다면 우연히 가입한 쇼핑몰에서 20% 신규회원 할인권을 줘서라고 할 수밖에. 그러나 요즘 누워서 이북리더기를 읽다 보면 깊은 잠에 빠지곤 한다. 솜사탕을 움켜 쥔 아이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어디까지 읽었더라... 읽던 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에게도 틈틈이 이북리더기 덕분에 숙면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최근엔 숙면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리모컨도 구입했다. 밤마다 녹색 리모컨을 쥐고 페이지를 넘기다 잠이 든다. 결과적으로 좋은 쇼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쇼핑한 제품은 이노스페이스원의 JIGU와 리모컨은 미테르 (이노스페이스원은 크레마를 만들던 회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