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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Feb 15. 2017

십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기

1. Why we travel


여행에 있어, 왜? 또는 무엇을 위해? 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다.

물론 표면적인 과정에 대해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포상이 주어졌고, 그 결과 여행을 다녀올 수 있게되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왜 한겨울에, 유럽을, 혼자서, 자동차를 몰고, 갔는가? 라는 질문에는 또렷이 답하기 어렵다. 여러날 고심했지만 내 말재주로는 역부족이다.

하여 염치없게도, <백경>의 서두에 의탁해본다.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라고 해두자. 몇해전인가 내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나고 또 뭍에서는 무엇 하나 흥미를 느낄 만한 것도 없게 되었으므로, 나는 얼마 동안 배를 타고 나가 세계의 넓고 넓은 바다를 한번 살펴보았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고 피의 순환을 돕기 위해서 나는 그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입가에 무겁고 답답한 것을 느낄 때, 마음속에 우울한 2월의 장마가 질 때, 또 문득 장의사 앞에 멈춰서며 길에서 만난 장례 행렬을 뒤쫓게 될 때, 특히 우울한 기분이 나를 지배하게 되어 몹시 강하게 도덕적 자제를 하지 앟으면 마구 거리로 뛰어나가 남이쓰고 있는 모자를 계획적으로 두드려 떨어뜨리고 싶어질 때 - 그런 때면 더욱 더 속히 바다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 <백경> 허만 멜빌 지음, 현영민 옮김, 신원문화사 -


이 심정을 이해한다면 어떤 사나이든 그 정도에 따라 어느 날엔가 나와 같은 감정 대양(大洋)에 대해 품게 될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프랑스 국도변 풍경. 차를 몰고 가다보면 이런 풍경에 몇번씩 차를 세우게 된다.


2. 좋은 사람은 다 죽는다




2시에 이륙하는 대한항공 KE901편에 몸을 실었다. 아시아 노선과 달리 유럽노선은 대우가 다르다.

이코노미석임에도 간단한 기내용품이 담긴 팩을 제공하고, 음료도 다양하다. 비행기 좌석이 여기저기 비어있어

의자를 끝까지 뒤로 젖히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지난 며칠간 일하며 여행계획까지 세우느라 좀 지쳐있었다. 바로 자고 싶어 맥주를 마셨다.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의 대양을 바라봤다.






문득 여행은 삶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본다면 계획적인 삶은 계획적인 여행과 같다.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하지만 일정에 쫓긴다. 반면 자유를 추종하는 자세는 매일매일의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어느정도의 불편이 따르지만, 어쩌면 알 수 없는 인생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형태일지 모른다. 다채로운 경험, 희열, 운이 좋다면 뜻밖의 추억이 기다린다.

 

이번 여행에서 숙소를 처음 3일치만 예약했다. 일정에 쫓기기보단 여유롭게 모험을 즐기고 싶었다.

그간의 계획적이고 틀에 짜인 삶대신 어깨에 힘을 빼고 어슬렁 어슬렁 산보를 하는 기분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부터 어둑한 하늘이 계속된다. 성에 낀 창밖엔 양털구름이 잔디처럼 균일하게 깔려있다.

남반구에 치우쳐 걸쳐있는 태양은 서서히 지구의 서쪽을 훑으며 지나고,

비행기는 태양의 흔적을 바쁘게 쫓아간다. 남극은 이시기에 기나긴 백야가 계속된다.

그리고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는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한 저녁을 안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돼지>에, 1차대전 당시 독일군과의 공중전으로 전우를 잃은 '포르코'는 정처없이 도망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그곳은 하얀 구름이 바다처럼 깔린 천상이었다.


- 구름평원?

- 아주 조용했지. 하늘이 정말 아름다웠어. 높은 곳에 이상한 구름이 흘러가더군......

   (베르리니! 가지마! 지나는 어떻게하고! 내가 갈게! 베르리니!)

   ......깨어났을 땐, 해면위를 혼자 날고 있더군.

- 하느님이 돌려보낸거군요

- 후후. 평생 혼자서 날아다니라고 돌려보낸거야

- 그럴 리 없어요. 포르코는 좋은 사람이에요.

- 좋은 놈들은 다 죽었어. 게다가 거긴 지옥일지도 몰라......

   얘긴 끝났다. 어서 자거라

- 살아 돌아와서 기뻐요......

  난 포르코가 좋아요

하늘이나 바다나,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존재를 깊이 성찰케 해준다. 작은 창밖으로 비춰지는 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3. 길 잃기


시계방향 : 공항바깥으로 나와 시험삼아 한장, 지하철역, 지하철내부


찰스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한무리의 젊은 일본인 단체관광객이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왼쪽으로 연결된 GARE(역)터미널로 가서 RER-B선에 올라 Denfert-Rochereau로 향했다. 파리의 지하철은 서로 무릎을 대고 마주 앉는 구조인데, 좁고 불편하다. 다행히 평일 오후임에도 교외를 달리는 전철은 한산하다. 나역시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사람들을 둘러봤다. 손님들 중엔 큰 개를 데리고 타는 사람도 있다. 여행내내 어딜가나 개를(그것도 큰개다) 끌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보신탕이란 주제는 감정이입이 쉬운 논쟁거리일 것이다.

 

한겨울임에도 옷을 두껍게 입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실제로 날씨도 그다지 춥지 않고 말이다. 대개는 후드티와 점퍼를 같이 입거나, 캐시미어 소재의 코트를 입고 있다. 문득 담배를 물고 코트깃을 올린채 파리의 거리를 헤매던 까뮈의 사진이 생각났다. 세계 각국에서 낭만의 파리를 찾는다지만, 프랑스 영화와 소설, 철학 등에서 엿보이는 그 특유의 수사와 말하기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 내겐, 그 관점이 연장되어 큰 기대랄게 없었다. 별로 좋은 여행의 태도는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때문에 첫날부터 차를 빌려 다른 도시로 떠날까도 생각해봤지만, 너무 피로할 듯 싶기도 하고 뭔가 정보도 얻으며 정리를 하고 첫걸음을 떼어야 할 것 같아 민박집을 예약해 놓은 참이다.
 

그러나 선입견은 현실로 이어진다...랄까? Alesia역에 도착해 약도대로 찾아봤지만 민박집은 찾을 수 없고, 길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물어도 도통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약 삼십여분간을 물어물어 도착한 민박집은 당초 기대와는 달리, 베낭여행하는 학생들로 북적였고 도미토리는 2층침대를 6개나 빼곡이 들여놔 발디딜틈이 없었다. 당장 숙소를 바꾸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여의치 않았다. 생각해보면 단지 이틀동안 잠만 잘곳인데 어떠랴 싶은 마음에 여장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찍 잠이든 터라 오전 6시반쯤 눈을 떴다. 일찍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렌트를 하기로 한 몽빠르나스 역까지 다음날 새벽에 어떻게 가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민박집 바로 앞에 허츠 영업소가 있는게 아닌가! 바로 들어가 예약변경이 가능한지 물었더니, 추가비용없이 가능하다고 한다. 바로 예약을 변경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러 갔다. '이거 어쩐지 느낌이 좋은걸?'...이란 착각을 하면서... 오늘은 대략적인 파리관광을 하기로 했다.
 

다시 한산한 오전을 달리는 지하철에서 나와, 출구로 향한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개선문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놀랍다. 일부러 파리의 지하철회사와 파리관광청이 연출한 것은 아니겠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개선문의 광경은 솔직히 멋졌다.


부지런한 관광객들과 그들을 찍고 있는 내가 낯선 나


개선문 앞의 관광객들을 구경하다가 샹제리제 거리를 따라 걷는다.

누군가 개선문부터 시작해서 걷기시작하면 군사박물관이나 콩코드 광장, 루브르까지 갈 수 있다고 한 이야기를 들은터라 여행용으로 구입한 도보용(?) 신발을 믿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여행길내내 동행한 아디** 2호


 

오전의 샹제리제 거리는 역시 한산하다. 그 때문인지 쇼핑몰들 역시 평범하기 그지 없어 보인다. 어쩌면 명동이나 압구정동을 오전 10시쯤 걷는것과 비교할만 하달까? 쇼핑에 별 관심이 없는 나로선 미안하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명품구매 아르바이트를 청하는 중국인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거리를 걷다보니 도로가 주변을 눈덮인 나무로 장식한다며 하얀 페인트를 전나무에 뒤집어 씌우고 바닥에는 고형스티로폼을 눈처럼 보이게 깔아놓은 게 곳곳에 보인다. 추하다. 원래 파리에 대한 환상이 없던 나로서도, 이 정도의 도시미화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어떻게 '예술의 도시'란 칭호를 얻게되었는지 그 홍보마케팅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됐다.

얼마전 뉴스에서 파리 특파원이 재밌는 보도를 한꼭지 했다. 파리에 환상을 갖고 있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실제 파리의 지저분함과 무질서, 불친절함에 충격을 받고 병원에 실려오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연평균 이십여명은 정신질환을 호소하며 실려온다니, 안타까운일이다.
 

그래도 파리가 와 볼만한 것은 멋진 박물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샹젤리제 거리가 끝나는 곳에 경찰청을 돌아나오니 파리국립박물관이 눈에 띈다. 문화체험이 지원되는 법인카드를 자랑스럽게 창구에 내밀었다. 그런데 직원이 승인이 안떨어진다고 한다. 카드를 받아 자세히 보니 유효기간이 2006년 11월로 만료된 것이 아닌가! 쿠쿵!! 사실 이점에 대해선 충격이 두배였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여행준비를 하면서, 법인카드의 유효기간을 점검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흠, 뭐 일년이나 남았으니 충분하군...'이라고 생각했다. 난 만 11개월 14일간을, 2006년이 아닌 2005년인줄 알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국립박물관 돌계단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잃어 버린 1년을 안타까워했다. 파리는 내게서 돈뿐 아니라 일년이란 엄청난 시간마저 앗아갔다. '아... 파리.... 이건, 뭐.....'
 

침울해진 기분을 뒤로하고 정신을 차린 건 얼마가 지난 후였다. 어차피 긴 여정속에, 잃어 버린 일년이나 정산처리되지 않을 비용 따위야 사소한 일이다. 여행이나 삶이나 마찬가지다. 시간과 돈은 궁극의 종결을 생생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겐 중요치 않다. 더 멋지게 인용해 말한다면 '끝을 아는 인간은 불행할 수 없다.'랄까? 후후...... 이렇게 빨리 정신적 충격에서 회복된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힘차게 바지를 털고 일어나 루브르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곧 길을 잃었다.
 
 

군사박물관 가는 길..에서 길을 잃다

 

4. 인생은 정상참작이 없다.



다빈치코드로 더 유명해진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한참 거리를 헤매다가 근처에서 Invalide역을 간신히 찾아, 루브르로 향했다.

파리에서 박물관을 보기 위해선 박물관 패스를 사면 좋다. 한번 구입으로 60여개 파리 박물관을 입장할 수 있다. 책에는 박물관 패스가 2일권 5일권이 있고, 관광안내소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다른 매표소에서도 하나같이 루브르박물관에서만 판매한다고 하니 참고 하시기 바란다. 루브르역에서 나오면 지하통로가 박물관까지 연결되어 있다. 검색대를 지나면 바로 좌측에서 패스를 판매하는데, 2일권을 30유로에 샀다. (1일권은 없다.)



지하의 역피라미드, 박물관패스, 강의듣는 학생들, 박물관 광장


루브르 박물관은 그 규모와 소장품이 엄청나기 때문에, 작심을 하고 온 게 아니라면 명작위주로 감상을 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안내책자를 들고 낯익은 작품들을 찾아다녔다.



비너스(위)와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아래)... 후레쉬만 터트리지 않는다면, 촬영은 자유롭다


그리고 미술책에서만 봐오던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을 봤을 땐 어쩐지 신이났다. 여체의 아름다운 곡선과 쉬폰 드레스처럼 하늘하늘 펄럭이듯 몸을 감싼 천들, 금방 하늘로 날아오를 듯 날개를 올려접는 역동성은 과연 승리의 여신다운 모습이었다.

비상할듯 힘차며 아름다운 니케 상


루브르에서 나와 콩코드 광장쪽으로 걷다가 빵을 사먹으며 쉬었다. 파리의 참새들은 비둘기처럼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아서 테이블위에 빵조각을 던져도 잘 쪼아먹는다.

내가 떼어준 빵을 먹는 파리참새와 샌드위치 체인점 PAUL


내가 생각하기에 공원전체의 조류비율은 비둘기 1, 참새 1, 갈매기 3 정도랄까? 세느강에 사는 갈매기들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대신 사람들이 던져주는 비둘기 모이나 빵가루들을 열심히 먹어대고 있었다.


 공원의 입상과 초연한 갈매기


빵을 먹고 오르세 박물관을 향해 어슬렁 어슬렁 걷다보니 분수주변에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는다.


어쩐지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이번 여행 바로 전까지 무척 지쳐있었다. 빨래판에 문질러서 아무렇게나 널어놓은 천조각처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인생에 정상참작이란 없는 것 같다."란 말을 많이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도덕적이며 양심적이었다해도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보장받진 않는다. 특히 이곳의 안개처럼 자욱하기만 한 우리네 삶이 그렇다. 눈물 젖은 빵을 먹은 사람보단, 온실속 화초처럼 자라 눈물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행복하다.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했다고 그 결실을 보게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세상논리로 대충 눙치며 살아온 이들이 더 많은 것을 가져갈 수 있는게 이곳의 룰이다. 그리고 우리는 늘 죽음을 떠안고 산다. 죽음조차 평등을 담보하지 않는다. 정상참작없이 소중한 이들을 앗아가 버린다.




얼마전 회사 선배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의학 정보와 신약을 구해다 주시고, 늘 신경써주던 고마운 분이었다. 내 얘기끝에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보니,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구나...란 생각이 들 때가 많아. 어떤 사람은 사람처럼 생각이 안될 정도로 형편없는 경우도 있지. 과연 그런 사람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좋은 사람과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야. 네 모습을 보면서 너희 부모님이 어떤 분이셨겠구나...란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지.
난 종교가 없어. 물리학과를 나온덕에 관련 책을 즐겨 읽는데, 11차원을 이야기하더군. 우리가 아는 건 기껏해야 4차원인데 말야. 그럼 나머지 7차원의 세계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인간이란 정말 살다가 죽어서 없어지면 끝인 존재일까?란 생각이 들어. 죽으면 끝인게 아니라 그 너머의 어떤 세계가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말야. 그 세계에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평온히 살 수 있지 아닐까? 정답은 누구도 모르지. 정상참작이 없다는 생각같은 건 버리고, 힘내라."


혼자 여행을 하면 자신과 어쩔 수 없이 마주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한가지로 모이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는가? 이 질문은 곧 나 자신이 자신인 것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로 귀결되고, 그 해답은 여행으로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내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의 눈으로 판단할 문제다. 왜 정상참작도 없는 세상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을 다시 묻는다면, 적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란 게 답이 될 수 있을까?



5.  


오르세 미술관 입구, 공부하는 학생들, 부르델作 '활시위를 당기는 헤라클레스', 천장벽화



오르세 미술관은 마네, 모네, 세잔같은 인상파 작품계열과 밀레의 '만종'이나 소수지만 클림트, 고흐와 고갱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는 장소다. 역사를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루브르만큼 크지는 않지만 다양한 전시실을 만들어두어 아기자기하고 푸근한 느낌을 준다.




입구에서 바라본 오르세 미술관 내부, 역에서 볼 수 있는 돔모양으로 되어있다



만약 파리에서 대표적인 3곳의 미술관을 구경한다면,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센터 순서가 개인적으로는 좋은 것 같다. 시대적으로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시간배열형의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박물관 패스는 오르세나 퐁피두센터에서의 특별전에는 입장할 수 없으니 참고.



마네 '피리부는 소년', 아모리 듀발 'Madame de Loynes'


오르세에서 나와 세느강을 건너와 콩코드 광장으로 간다. 3,200년 됐다는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온다.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프랑스혁명과 로베스피에르로 대표되는 광장이다. 지금은 차들이 지나는 복잡한 도로 한복판에 놓여져 있어 1,119명이 이곳 단두대에서 사라졌다는 느낌은 남아있지 않다.


오벨리스크


콩코드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크레페 가게가 있는데, 무슨 입장권을 사듯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크레페를 사먹는다. 물론 나도 초콜릿 크레페를 먹었다. 진한 초콜릿이 무척 맘에 든다.


콩코드역에서 전철을 타고, 퐁피두 센터로 갔다. 그런데 줄이 너무 길다. 한참 줄을 서서 가방 검사까지해서 들어간 곳은 퐁피두센터 미술관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 이왕 들어간거 다시 나오기가 아쉬워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대부분 대학생과 일반인들로 보였고, 딱 도서관이다!라는 분위기가 스며나온다.


다시 일층으로 내려와 퐁피두 센터 미술관쪽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시실로 들어간다. 퐁피두 센터는 현대 미술 위주로 전시가 되어있다. 20세기부터 본격 도입되기 시작한 사진과 영화라든지 TV와 같은 영상매체를 활용한 다수의 실험적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찌보면 정적인 미술의 개념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그림 또는 실상을 그대로 재현해낸 사진이란 재료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과제이자 돌파구로 인식되었음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퐁피두 센터 내부, 양측으로 전시실이 줄지어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TV에 갇혀있던 영상을 아예 밖으로 끄집어내, 우연성으로 공간전체에 움직임을 담아낸 설치미술인 끌로드 레베크의 작품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온통 핑크로 둘러싸인 방안에 붉은 하이힐이 놓여져 있고, 미니멀뮤직을 연상시키는 단조롭고도 평화로운 음악이 반복된다. 현대 예술이 "아름다움"과는 유리된 채 철학과 형이상학의 깊은 세계로 빠져들며 '한탕 컨셉추얼 아트'(좀 심한가?)로 빠져들거나 말거나, 나같은 관객은 거대한 하이힐 한짝을 바라보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몽환적 분위기를 즐길 뿐이다.


클로드 레베크의 2003년도 작품



최근 미술 작가들의 전시책자를 보면 하나같이 출신대학과 유학한 대학소개가 이력입네...하고 지나칠 정도로 촘촘히 들어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철학에 대한 얕은 인식수준을 감추기 위한 현학으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경우에 이르러선 최악이다. 이런 것은 비겁하고, 치졸하며, 자신감 없는 태도다.


무릇 예술에 몸을 담은 이들은 작품 자체에 대한 독립성과 생명력을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거기에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여봤자 작품의 지평을 축소시킬 뿐이다. 극소수의 일부 작가들이 유치원생들처럼 '저건 새고, 이건 하늘이고...'하는 식의 설명을 붙이거나 난 유명미대를 나왔어...라고 떠드는 것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가치조차 없다는 의미처럼 읽힌다. 내 심사가 비뚤어져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97년도 광주비엔날레에서 만났적 있었던 모나 하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내 윗침대를 쓰고 있던 사진작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유럽의 건물양식을 찍어오는 출장중이었던 그분은, 파리를 마지막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이번 출장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청담동에 스튜디오를 개업하기로 하셨단다. 그리고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가족들이 몹시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사진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만나서 소주나 한잔 해요! 여행은 고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참 좋네요.' 겸손함과 신사다움이 몸에 밴듯한 그분 제안에 동의하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내일 본격적인 출정을 앞두고 다소 긴장되어있던 마음은 좋은 분과의 즐거운 대화로 한껏 누그러져 있었다.




6. 사건으로 가득한 하루


우연히 하늘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내렸다. 난 우연히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우연한 장엄함을 담았다.



드디어(!) 첫 번째 사건이 터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데, 2층이 소란스러워져 가 보니 도둑이 태연하게 내려왔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친 도둑이 프랑스에서라니, 이것도 기이한 인연이다. 이놈은 예의 루틴한 대처 매뉴얼에 따라 프랑스어로 떠들며 주위를 산만하게 한 후, 능숙하게 도망갔다.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나온 사진작가분이나 나 역시 '어? 어...어!'할 수밖에...... 나중에 민박집 주인이 왔지만 상황을 종합해보니, 도둑들은 신고를 안하고 불법영업하는 이런 민박집을 노리고(대개는 신고를 안하고 영업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대담하게 들어온다고 한다. 신고도 할 수 없으니 주인은 애꿎은 문만 열었다 닫았다하며 '문에 자물쇠를 하나 달아야겠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구입한 루이비통 핸드백 한 개를 도둑맞은 아줌마만 불쌍하게 됐다. '역시 기분 나쁜 파리... 떠나는 날까지 이 모양이군...'이란 생각이 들며 의기 소침해졌다. 게다가 오늘부터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인데 어쩐지 불길한 시작이다.

이래저래 기분이 안좋아 막 떠나려는데, 여행을 하려면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며, 사진작가 아저씨가 연신 식사를 권했다. 마음을 바꾸고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더니 몸이 따뜻해지고, 기운이 나는듯도 했다. 아저씨는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배웅을 해줬다. 어차피 여행에는 별 일이 다 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느긋한 마음을 갖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소 김이 빠지긴 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Hertz 영업소를 찾았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

렌트카는 어제 이곳으로 예약을 변경해놨으니 10분이면 차를 찾아 파리를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와의 질긴 인연은 아쉬운 듯 나를 붙잡았다. 주유소와 편의점, 그리고 렌트카 영업소까지 운영하는 곳임에도 오전 8시에는 한명의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 그 정도면 양반이다. 렌트카 업무를 해 본 적이 없는 건지 계속 우왕좌왕대더니, 손님이 오면 물건팔고, 다시 와서는 뭣좀 하다가 또 손님 받고, 이런 식이었다. 무려 한시간을 허공에 날린 이후, 9시에 출근한 젊은 직원덕택에 차를 받을 수 있었다. 아... 정말이지 힘이 쭉 빠진다.
한국에서 예약한 푸조 206 대신 토요타 코롤라 미니밴을 같은 가격으로 제공받았다는 기쁨 같은 건 느낄 새도 없었다.

공항에서 차를 반납하고 돌아설때 눈물이 날정도로 정이 든 코롤라



게다가 파리에서 운전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파리 택시 드라이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이다. 큰 사거리에도 표지판이 하나 없다. 난 편도 1차선에서 개미 이마만한 이정표에 적힌 거리 이름을 보기위해, 좌(2.0) 우(1.5)의 시력과 틈틈이 익힌 속독법을 총동원했다. 이 정도면 거의 초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시내를 약 2번 정도 크게 돈 다음, 고속도로로 빠지는 외곽 순환도로를 탄 시간은 오전 11시... 이건 성공이라 부르기엔 뭣하지만....

아... 어쨌거나... 만세! 만만세!다. 파리여... 안녕! 열흘 뒤 다시 보겠지만, 널 그리워하게 되진 않을거야!

자! 출발이다! 프랑스의 탁트인 고속도로 전경




곧 세 번째 사건이 찾아온다.


아직도 프랑스



고속도로를 달리자 기분이 슬슬 풀린다. 탁 트인 프랑스의 전원풍경은 꽤 멋있었다. 게다가 룩셈부르크로 향하기 위해 벨기에 국경을 넘자 금세 높은 침엽수림이 사위를 에워싸며 분위기가 확 바뀌며 나를 맞았다. 이젠 가벼운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아름답고 조용한 룩셈부르크로 가면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벨기에 진입



그러나!

아무리 가도 룩셈부르크 표지가 나오지 않는다. 주유소에 들러 상세지도를 사려고 했더니, 벨기에 지도뿐이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룩셈부르크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더니...... 쿠쿵!.... '음... 지금 반대로 달리고 있어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출구로 빠져서 국도타고 돌아서 반대로 가세요~'란다. 아마 벨기에 국경을 넘으며 표지판이 사라졌던 지점에서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이미 꽤 오랜 시간을 운전해 왔는데, 허탈했다. 유럽의 겨울은 오후 5시면 캄캄해지기 때문에, 길을 서둘러야 했다. 난 다시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시작했다. 우연히 빠진 국도의 아름다운 풍경 따위는 이미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마치 부산항에 선적할 컨테이너 박스를 나르는 트럭기사처럼 피로와 싸우며 유럽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이다.
'이건... 자동차 여행이 아니라, 그냥 자동차 운전이잖은가!'


네 번째 사건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관광이고 나발이고, 일단 예약해 놓은 자동차 여행자를 위한 Etap 호텔을 찾아 빨리 쉬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작은 룩셈부르크 시티에 진입했지만 퇴근길이라 엄청난 정체가 계속된다. 간신히 중앙도로를 빠져나왔지만, 어디에도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두 번인가를 돌아봤지만, 신기하게도 아까 서있던 중앙도로로 재진입, 재진입이다. 황당함에 이어 화가 치민다. 결국 룩셈부르크 중앙역에 차를 세우고, 관광안내소에 들어가 약도를 보여주며 위치를 확인했다. 다시 운전 시작. 또 중앙도로에 진입했을 때는, 황당함도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차를 운전하는 내 모습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보는 착각이 들 뿐이었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땐, 알 수 없는 캄캄한 도로를 혼자 달리고 있었다.

바로 이 중앙도로위를 캄캄한 밤에 왔다 갔다했다. 난 내가 아름다운 교각위에 있었는지...알게 뭐야!



그리고 첫 번째 행운


알 수 없는 텅빈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정신을 깨운다. 문득 하늘을 보니 비행기가 내려앉는다. '음? 비행기?' 건물에 불을 끄고 퇴근하는 아줌마에게 '내가 어딨는거죠?'라고 물었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와타나베처럼.....

"여기 공항인데? 시내로 들어가려면 한 30분은 더 달려야 하지 않을까나?"

이젠 정말 자신이 없었다. 아무곳이라면 어떠랴 싶었다. 차를 타고 제일 처음 눈에 띄는 호텔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숙박비가 날아가나, 내가 날아가나, 비행기가 날아가나 매 한가지처럼 느껴졌다.

망할 에탑! 이라고 호텔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차를 몰다가 제일 처음 눈에 띄는 호텔에 들어갔다. 그곳이 Etap이었다. 내가 인터넷에서 출력한 호텔약도는 잘못된 것이었으며, 실제 호텔은 룩셈부르크 공항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이건 소뒷걸음질치다 쥐잡은 격 정도가 아니라, 소가 문워크를 하다가 기획사 눈에 띄어 아이돌 백댄서가 된격이다.

에탑 호텔의 실내...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이다. 하지만 어떤 나라의 호텔이건 에탑은 다 똑같은 디자인이라는거... 솔직히 질려서 그 이후엔 다른 계열 호텔을 찾아다녔다.


오늘을 생각해보면, 4번의 불운에 1번의 행운이 있었던 셈이다. 우연히 닥친 불운은 역시 우연한 행운에 의해 구제된다. 불운이나 행운이 통제불가능한 것이라면, 역시 유익한 태도는 '캐세라 세라~'이며,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마지막에 행운만 있다면 4번의 불운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체질을 누구나 타고났다. 물론 마지막에 위치하는 것이 행운일지 불운일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불운에 너무 깊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마지막에 행운이 닥칠 확률은 1/2.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도박 아닌가?


아침에 일어나 숙소에서 바라본 룩셈부르크 공항


7.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왕궁


누가 깨운것도 아닌데, 시차때문인지 잠에서 빨리 깬다. 덕분에 고요한 유럽의 새벽을 즐길 시간이 생긴다. 일어나자마자 짐을 챙겨 룩셈부르크시티로 향했다. 밤에 봤을 때와는 달리,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진입하기전 작지만 현대화된 마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엔 EU재판소, 의회, EU은행등이 즐비하다. 과연 EU의 중심이라고 할만하다.



시내에 진입해 차를 주차시켜놓고, 주차기에서 주차권을 뽑으려는데 잘 되지 않는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주말에는 무료주차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덕분에 한층 기분좋게 룩셈부르크 시티 관광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아돌프 다리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 사실 룩셈부르크 시티를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로모사진기로 찍은 사진들이 인화에 실패했다.



룩셈부르크 시티는 룩셈부르크라는 나라처럼, 작지만 예쁜 도시다. 어제 운전대를 잡고 저주를 퍼붓던 곳과는 영 딴판이었다. 관광지라고 할 수 있을만한 곳도 거의 한곳에 집중되어 있어,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서 여유롭게 관광하기에 딱 적당했다.



룩셈부르크 시티 크리스마스 마켓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왕궁 앞쪽 광장에선 장이 서고, 관광객과 시민들이 어우러져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크리스마스 양초나 트리장식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길거리 음식을 사서 먹는 동안엔 작은 야외 콘서트홀에서 브라스 밴드가 캐롤을 연주해준다.

국립박물관 근처에 다달았을 때, 신랑 신부가 야외촬영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결혼식 야외촬영을 하는 것도 놀라웠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사진사, 화장 고쳐주고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도우미, 신랑, 신부 모두 그 구성이나 시스템이 흡사했다는 점이다.



(짚차에 탄 야외촬영 신랑신부에게 박수를 쳐주는 관광객들...)


근처를 지나던 한무리의 깃발관광단이 힘든 촬영을 마치고 차에 올라타는 신랑 신부에게 박수를 쳐주며 축하해 준다. 어쩐지 나까지 흐뭇해지는 기분이다.

룩셈부르크 국립박물관



룩셈부르크 국립박물관은 이 나라의 특징을 잘 반영한 듯, 깨끗하고 아담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유물을 전시해뒀다. 지하에서 지상을 따라 시대순으로 석기시대 유물부터 시작해서, 중세 유물 및 회화가 전시되어있다. 가방을 코인락커에 넣어두고(티켓판매소 뒷편에 있음) 구경하면 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나름대로 아침 일찍 움직인 탓에 꽤 많은 구경을 했음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내친김에 아르덴 침엽수림으로 유명한 윌츠를 거쳐 브뤼셀로 진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윌츠 정경



윌츠는 말 그대로 하이킹에 적합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러나 사실 윌츠의 백미라면 이 도시 자체라기 보단, 그곳으로 향하는 국도변에 높이 솟은 고목들이다. 시끄러운 관광도시들을 여행하다가 지친 사람들이라면, 마을을 찾는 길에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에 피로에 쪄든 감성이 회복됨을 느끼게 되고 더불어 조용한 마을에 들러 푹 쉰다면 새로운 힘이 솟을 듯 하다.

윌츠는 산 정상 조금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중심가엔 룩셈부르크의 대형할인마트 '매치'가 있다. 이곳은 물건 값도 쌀 뿐아니라, 재밌는 제품도 많다.  


오후 3시경, 몇가지 식료품을 차에 싣고, 바스통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마을 초입에 차를 세워두고 밖으로 나왔다.


후드티를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하얀 입김을 뿜으며, 윌츠의 꼭대기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체질이라고 생각했지만 몇가지 후회들, 상념들이 아르덴 삼림의 안개비를 따라 뿌옇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어쩐지 길을 또 잃을 것 같은 예감이 불현 찾아왔지만, 당분간은 그냥 비를 맞고 서 있기로 했다.


아르덴 삼림지대


8. 바스통 가는 길


바스통 시내 진입로


윌츠에서 떠나 벨기에로 넘어가는데 시간은 어느새 4시가 훌쩍 넘었다. 겨울 유럽의 저녁은 유난히 일찍 찾아온다. 5시가 되면 사위가 캄캄해져 운전이 어렵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통에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차들은 붉은 브레이크 등을 켠 채 왕복 2차선 도로에 도열해 묵상에 잠긴 듯한 표정이다.

 
 

룩셈부르크를 넘어 벨기에 국경으로 가기 위해선 바스통을 지나야 한다. 바스통은 국내에서도 방영된 바 있는 HBO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 6편과 7편의 배경이 된 도시다. 실제로는 길가를 따라 작은 호텔과 술집이 늘어선 작은 마을이지만, 국경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다. 실제로 룩셈부르크를 거쳐 벨기에, 네덜란드로 가는 국도가 이어져 유럽의 심장부로 진출하는데 있어 더없이 좋은 전략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히틀러가 이를 간과할 리 없었고, 1944년 패전을 눈앞에 둔 히틀러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바스통을 기점으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나는 차를 갓길로 대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룩셈부르크라는 나라가 그렇지만, 특히 이곳은 유럽에서도 깊은 내륙 지역이다. 아이슬란드 저기압이 내려올때면 겨울비와 자욱한 안개가 끼고, 시베리아 고기압이 다가오면 강추위가 엄습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아르덴 협곡은 유령전선이라 불렸다. 약 3개월의 기나긴 대치기간 중에 서로가 먼저 공격하기를 꺼렸다. 다만 자욱한 겨울비와 눈, 안개속에 파묻힌 병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전나무숲을 헤매다 아군과 적군이 섞여 교전을 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바다를 건너와 으슬으슬한 눈과 비가 반복되는 바스통 전선에 투입된 미국 병사들이 느꼈을 좌절과 낭패감이 가슴 깊은 곳부터 느껴진다. 그리고 패전을 앞두고 이곳에서 의미없이 희생된 독일군도 떠올랐다.
발지전투라 명명된 총공격에서 독일군 20만명이 전사했다.

누구의 아버지, 누군가의 사랑스런 아들이었을 그들이 유령전선에서 유령처럼 사라진 것이다.


 

"지금도 아주 추운밤에 침대에 누우면 아내에게 말합니다. 바스통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 Band of Brothers의 바스통전투 생존자 인터뷰 중 -


  


9. 여행의 기술

 

몬드리안 풍 천정과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는 브뤼셀 이비스 레스토랑


벨기에 시내로 진입한 시간이 12월 16일 오후 7시경이었으니, 꽤 늦은 셈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도 했고, 날씨가 몹시 쌀쌀해졌다.
새로운 도시에 어둠이 깔린 이후에 진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일단 길을 찾기가 어렵고,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게 늘 계획적일 수는 없는 일이라,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에 대비한 나름의 노하우(?)를 말해줄까 한다.

지도를 구하라! (* 2017년에 다는 각주 : 2006년은 유럽 렌트카에 네비게이션이 거의 보급이 안됐던 시절)

새로운 도시에 진입하기 전, 대개는 그 지역 지도가 있긴 있을 것이다.
대개는 붉은 색 표지의 미쉐린-유럽 같은 지도일텐데, 이 지도의 활용범위는 고속도로를 이용한 국경진입 등에 이용가능하다. 도시 진입 이후에는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유럽 도시의 경우, 표지판이 제멋대로이거나 너무 작고 그나마 몇 개 없어서 운전을 하다보면 거리 이름간판을 보고 찾아가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상세지도는 도시진입 구역의 상점에서 많이 판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팔긴 하지만, 이런 지도들은 대부분 배율이 높아서 상세지도라고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제일 확실하기는 점원에게 부탁해서 여러개의 지도 샘플을 충분히 보고 사는 게 좋다.

단, 상세지도가 좋다고 해서, 범위가 그 도심지에만 국한된 걸 사선 안된다. 대부분의 자동차 여행자 호텔은 국경근처나 공항 근처에 있기 때문에, 도심지만 나와있을 경우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지도만 잘 샀다고 해도, 그 도시 여행의 50%는 성공이다.

브뤼셀 IBIS 주차장의 애마, 토요타. 자동차 체인호텔들의 경우 주차비를 따로 받는 경우가 있으니 유의하자



모르면 물어가라!

초행길에 차를 몰고 가면서, 길을 잃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길을 잃었을 경우엔 그냥 차로 달리지 말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확인해야 한다. 유럽은 어느 나라를 가나 표지판이 불친절한 대신, 차를 잠깐씩 댈 수 있는 갓길이 무척 잘 갖춰져 있어서 편하다. 벨기에 브뤼셀에 진입한 이후에, 지도를 사고 그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길을 잃은 나는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문제는 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리는 칠흑같은 밤이어서 행인이 거의 없었다는 것. 게다가 나 역시 검은색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후드까지 쓰고 있어서 무고한 브뤼셀 시민들에게 갱 같은 느낌을 전해줬을지 모르는 일이다.
할 수 없이 얼마정도 걸어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버스 정류장에선 방위와 버스 노선도를 통해 위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퇴근길의 브뤼셀 시민도 얼마간 만날 수 있다.

난 길을 가던 중년 아저씨에게 내가 찾아가는 공항근처 호텔을 물어봤다.
아저씨는 아주 친절하게, '차를 몰고 직진하면, 터널이 나올거야, 터널을 지나서 다시 가면 두 번째 터널이 나와 거기서 좌회전 후 얼마간 간다음......' 거의 네비게이션 수준의 답변을 해주신다.
유럽인들은 대개 이방인 여행객들에게 친절한데, 유독 불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프랑스를 따를 곳이 없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아쉬운 입장은 자신이니까, 길을 잃었을 땐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래도 잘 모른다면, 관광안내소를 찾아라!


관광안내소는 여행지엔 어디나 있다. 심지어는 작은 온천 마을에도 있을 정도로 유럽은 관광산업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도에도 관광안내소는 빼놓지 않고 표기가 되어있다. 대부분 열차역이나, 버스정류소 등 도심지 중앙의 교통의 요지에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개인적인 길찾기나, 숙소 구하기, 관광지도 및 간단한 여행용품 구입 등이 가능하다. 대신 관광안내소 근처에는 어리버리한 관광객을 노리는 절도범들이 많다고 하니 주의해야 한다.

나도 몇 번인가 관광안내소를 이용해봤는데, 친절도는 모두 별다섯 개 수준이다.
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관광안내소 빼구...... 여긴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안내원도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이비스의 맥주, 벨기에 맥주 맛있다.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와서, 비가 오는 캄캄한 밤에 브뤼셀에서 물어물어 공항을 찾기는 했지만, 게다가 간판이 보이는 F1 호텔을 발견하고도 진입로를 못찾아서 거의 두 번이나 공항안까지 들어와서 U턴을 해서 나가는 등 생쑈를 한다음 호텔을 찾았다. 시간은 거의 밤 10시. 몸과 마음이 무척 지쳐있어서 도저히 F1의 공용 욕실을 사용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있는 이비스 호텔로 다시 가서, F1호텔 예약 취소를 하고, 여장을 풀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녁도 못먹었다는 걸 생각한 나는, IBIS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마음 먹었다.
IBIS 레스토랑의 음식이 의외로 괜찮다는 평을 들어오던 차라 한번 먹고 싶기도 했다.
난 우선 맥주를 한잔 시키고,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가만히 보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넘실대는 레스토랑에선 "Christmas Special Menu'를 팔고 있는게 아닌가? 올커니 싶어 스테이크를 취소하고, 크리스마스 특선세트를 주문했다.

그 내용물은 대략 아래와 같다.

크리스마스 세트메뉴 1번, 샐러드와 고구마 파이...... 무미 무취함이 그 자리에서 무념무상에 빠져들게 할 정도






(크리스마스 메뉴 2번, 감자고로케와 소고기 스튜...... 배고픈데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고통을 아는가? 너무 짜고
맛없었다. 종업원에게 정말 최악이라고 컴플레인을 했더니, 그들의 대답... 으흥? 리얼리? 웁스, 소리! 바이.....)

글쎄 사진만 보신 분들은 뭐, 저정도면 괜찮구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흠...... 하지만 이 경험은 여행 중 다시는 IBIS 레스토랑에 가지 않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굶주린 배를 안고,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여행TIP : 자동차 여행자들을 위한 호텔체인들>

유럽 여행을 자동차로 하는게 왜 좋은가 하면, 호텔 체인들이 잘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ACCOR(아코르) 체인호텔들이다.
아코르 계열 호텔들은 등급별로 나눠지는데,

1) 소피텔 (Sofitel) - First Class
2) 노보텔(Novotel) - Business Class
3) 머큐르(Mercure) - Business Class
4) 이비스(Ibis) - Economic Class
5) 에탑(Etap) - Budget Class
6) 포뮬 원(Formule 1) - Budget Class

정도로 볼 수 있다. 이중에서 자동차 여행자가 이용이 용이한 호텔은 이비스-에탑-포뮬원 정도다.
대개 소피텔과 노보텔은 시내중심지에 있고, 고급호텔이기 때문에 비용이 부담스럽다.

이비스 이하 호텔들은 대부분이 공항근처나 국경근처, 고속도로 근처에 한군데에 모여있기 때문에, 차량으로 이용도 쉽고, 가격도 싸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서 아코르 계열 호텔의 경우, 예약과 취소 또는 타지역으로의 예약도 한 장소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편리하다.


(브뤼셀 공항 근처의 IBIS 호텔, 이곳엔 ACCOR 계열 호텔 3종세트(이비스,에탑,포뮬원)가 한곳에 있다.)


(자동차 호텔 중 가장 저가 체인인 포뮬 원 호텔. 매니저가 아예 없고, 자판기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선 아코르계열 자동차호텔의 성공으로 인해, B&B 등 신생브랜드가 매우 많이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신생브랜드 호텔은 가격이 오히려 IBIS보다 싸고, 최근에 지어져 깨끗할 뿐 아니라 직원들도 더 친절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똑같은 실내디자인에 질린 여행자들은 이런 호텔로 바꿔봄직하다.
호텔의 라인업과 가격도 아코르를 표방해서,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신생 체인호텔로, 가격은 포뮬원급, 서비스는 이비스를 능가하는 꽤 괜찮은 호텔 체인 B&B호텔)


(자동차 호텔은 어딜가나 단순한 구성이다. 침실+작은 욕실+화장실+TV, 비교적 깨끗하고 편하다)


그런데 이런 브랜드 호텔이 성공하자, 자동차 호텔촌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독립호텔들이다. 독립호텔들은 아래의 호텔같은 곳들인데, 지리적으론 비슷한 곳에 위치해 있지만 가격이 약간 더 비싸다.
이런 호텔들은 나름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각 지역 호텔들과 하나의 체인으로 묶어져 있지만 실제론 독립호텔이어서 서비스가 호텔에 따라 제각각이다. 그런데 이런 곳들은 대부분 영세하고, 운영 노하우가 없기 때문에 매니저가 불친절하다거나 시설이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격은 IBIS같은 비즈니스 계열 호텔들은 대략 우리돈으로 12~5만원정도고, 에탑은 5~9만원, 포뮬원급은 3~5만원정도다. 포뮬원은 가격이 싸긴 하지만, 공용욕실, 화장실을 써야하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뭔가 우중충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떼거지로 합숙하며 떠들고, 밤 10시 이후엔 매니저가 퇴근해 버려 불안하다. (나같은 신장 182의 아마츄어 복서도 불안함을 느낀다니 좀 웃기지 않은가? 혼자 여행하면 그런 웃기는 발견도 하게된다.)

아! 가장 중요한 팁 하나!

이런 체인호텔에 가면 유럽전역에 깔린 체인호텔 연락처가 묶여진 브로셔가 있다.
옆에 체인호텔에 묵지 않았다하더라도 들어가서 브로셔를 구해야 한다.
여행객에게 잠잘 곳에 대한 옵션이 다양하게 확보됐다는 것만큼 든든한게 있을까?
예수님도 머리 누일곳이 없다고 한탄하셨는데 말이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나도 서울에 번듯한 집은 있지만, 머리 누일곳이 없단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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