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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Oct 25. 2023

백 퍼센트의 클린샷

순정청춘 창작 단편소설


농구공이 통통 튀어 발 앞에 멈춘다.


- 야! 여기!

- 일욜도 학원가냐?

- 한 겜 하자!


친구들 목소리가 푸른 나뭇잎 사이로 상쾌하다. 공을 집어든 유하는 두 손을 가슴으로 옮긴 뒤 튕기듯 던진다.


- 어이쿠!

- 어휴. 넌 동암고 르브론제임스라면서 범생이 패스도 못 받냐?

- 뭔 소리. 니가 받아봐. 패스 죽여.

- 푸핫. 체육대회 때 에어볼은 죽이더라.


'털썩!'


무거운 가방이 콘크리트 계단에 떨어지자 흙먼지가 인다.


- 3대 3, 전후반 10점씩. 지면 닥터페퍼.

- 오올. 김유하.

- 왠열? 나의 트래쉬 토크에 이렇게 쉽게 넘어오는 타입이었나?

- 야! 시간 없어. 빨리 붙어. 지면 음료수다.


- 아니. 음료수 말고. 닥. 터. 페. 퍼.


뻘한 소리에 웃음이 터지는 친구들.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히는 농구공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탱탱탱탱


- 들어가!

- 일대일, 일대일!

- 패스. 돌려. 돌려.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붉은 꼬리를 내며 떨어진다. 땀과 가쁜 숨소리 가득한 공원 농구장이 멀어지며 흐릿해지자 선명히 드러나는 유하의 가방. 그리고 그 위에 놓인 휴대폰.  

'스륵'하며 떠올랐다 사라지는 DM한줄.


먼저 갈게


 

- 오! 대박!

- 뭔데 뭔데

- 이거!

- 오오오

- 완전 조아


고등학교 교실에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몽글몽글한 모양으로 울려 퍼진다.


- 진서야, 봤어?

- ?


진서 앞에 인스타 동영상을 들이미는 짝꿍.


- 대박이지?


발 밑을 스치는 빠른 패스를 매끄럽게 걷어 올리는 큰 손바닥이 보인다. 뒤늦게 슛 블록을 하려 달려오는 상대. 시선을 살짝 오른쪽으로 주자 다급하게 허공에 허우적 대는 손. 그제야 높은 타점에서 점프한다. 지는 해를 역광으로 받은 그림자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살짝 꺾이는 손목. 한 시간을 내달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의 마지막 터치처럼 부드럽다.


나로호의 로켓 구름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유려하게 빨려드는 농구공의 궤적.


철썩! 슉


백 퍼센트의 클린샷이었다.


- 어어우! 나이스 유하!


영상에 나온 건 진서와 같은 반인 영지의 목소리였다. 유하영지가 든 카메라 쪽으로 다가와 활짝 웃으며 말한다.


- 들었어?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난다.  


- 어제 영지가 찍어서 인스타에 올린 건데. 좋아요 수 봐봐. 완전 무슨 영화 예고편 같이 나왔지?

- 어?

- 우리 학교 여자애들은 다 눌렀을 걸?

- 근데 영지는 어떻게?

- 걔네 초등학교, 중학교 다 같이 나와서 친하잖아. 유하가 영지에게 부탁했대. 찍어서 보내달라고. 근데 영지가 지 인스타릴스에 올린 거지. 자랑하려고.

- 뭘?


짝꿍은 주변 눈치를 보는 척 목소리를 낮추며 말한다.


- 걔. 여우짓 장난 아니잖아. 농구 끝난 남자애들이랑 얌샘에서 저녁도 같이 먹었다더라.

- 유하도?

- 당연하지. 목적이 그건데. 땀범벅돼서 냄새나는 남자애들이랑 왜 먹었겠어. 한마디로 침 발라 놨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거지. 속 모르고 좋아요나 누르는 우리 반 가시나들... 불쌍해서 어쩌누.


위이잉


진서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한다. 멀티미디어 메시지에 유하가 보낸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방금 본 영상이었다. 진서는 확인도 하지 않고 영상을 지운다. 텅 빈 메시지 함을 닫는다. 휴대폰 화면에 날짜가 떠오른다. 9월 11일. 월요일




진서의 긴 손가락에 감싼 휴대폰에 불빛이 켜진다.

휴대폰의 날짜는 9월 9일. 토요일.

낮은 조명이 들어온 학원 복도엔 학생들로 가득하다.


위잉 위잉


- 여보세요?

- 응? 잘 갔구나? 말해주지. 엄마가 할머니댁 가신다고 나가면서 뭘 놓고 가셔서 가져다 드린다고 늦었어. 그렇다고 좀 기다리면 덧나냐?

- 학원 버스는 놓치면 안 되니까.

- 나랑 택시 타면 되지. 택시비도 딱 반띵하고. 뭔 클래스메이트가 이렇게 매정해.


어쩐지 진서는 호흡이 가빠진다.


- 그래서 어딘데? 이제 마지막 강의 하나 남았는데...

- 어디긴. 너에게 버림받고 해변가 떠돌이 강아지가 됐지. 날 버렸으니 오늘은 학원버스 타고 혼자 귀가하셔.

- 뭐? 장난하지 말고.

- 진짜야.

- 아, 진짜 어디냐고.

- 하! 넌 날 못 믿는구나. 그 망할 체육대회 때문인가?


갑자기 툭 끊겨버린 전화. 당황한 진서가 통화버튼을 누르려는데 영상통화다. 진서는 사람들 눈을 피해 복도 끝으로 가서 비상계단문을 연다.


- 갑자기 무슨 영상통화...


바다였다.


휴대폰 화면에 비친 것은 검푸른 배경에 회색의 긴 명암이 생겼다 사라질 뿐이었지만 그건 분명 바다였다.


파도소리가 진서의 발끝에 다가왔다 밀려 나간다.


5분? 아니 10분? 진서유하와 한적한 밤의 해변에 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비상계단에 치마를 쓸어 올리며 앉는 진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촤아아 철썩 촤아아 철썩


그 시간 유하는 휴대폰을 모래밭에 꽂아둔 채로 멀리 지나는 오징어배의 불빛을 좇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말을 건네려 휴대폰을 확인했을 땐 이미 화면은 꺼진 뒤였다. 대신 문자가 와 있었다.


- 내일 할 말이 있으니 학원 끝나고 남아




- 클린샷이 들어갈 땐 말야 파도소리가 난다고

- 파도소리가 나?

- 그렇다니까. 그래서 답답할 때 농구를 하면 해변에 와 있는 느낌이 들지. 촤.촤.촤아.

- 풋.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학원버스에 진서와 나란히 앉아있던 유하는 답답하다는 듯 장난스레 가슴을 두드렸다.


- 니가 기억하는 텅이나 탱하는 시끄런 소리는 농구골대에 맞는 소리라고. 농구공이 매끄럽게 림 사이를 통과해서 그물에 닿으면 정말 해변의 잔잔한 파도 소리가 난다니까.

- 어떻게?

- 클린샷은 탄도가 높아야 해. 그리고 절대 성급하고 빠르게 던져선 안돼. 우연히 림에 맞아 들어가거나 백보드에 맞고 들어가는 뱅크샷의 운을 기대해선 안된다고.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천천히 시간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도록 던져야 해. 그게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

- 고지식한 사나이의 샷이지.


진서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숙인채 어깨를 들썩인다.



- 좋아. 이번 체육대회 때 보여줄게. 파도소리의 향연.


체육대회날 유하는 멋진 슛을 보여줬지만 클린샷은 성공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마지막 버저비터로 날린 회심의 슛은 높은 탄도로 날아가서 림 근처에도 못 가는 에어볼이 됐다. 그렇게 경기는 끝났다.


학원버스에서 진서유하를 놀리지 않았다.


다만 유하는 꽤나 분한 표정을 여름방학 내내 하고 있었다.


더위가 다가오고 버스의 에어컨 바람이 강해졌다. 두 사람은 매일 학원을 함께 갔고, 더 친해질수록 이상하게 대화는 적어졌다. 갑작스레 시원해진 아침 공기가 당황스러울 무렵, 문득 진서유하 곁에 앉아 버스를 타는 게 두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좌석에서 일어나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면서 울었다. 처음이었다.

등원하는 버스에 올라탄 유하가 화가 난 듯한 표정의 진서에게 말을 건넸다.


- 진서야

- 응?

- 내가 혹시 뭘 잘못했니?

- 아니

- 말실수를 했다거나, 돈을 빌렸는데 까먹었다거나...

- 그런 거 없어

- ...

- ...

- 미안

- 뭐가?

- 약속 지킬게

- 무슨 약속?


유하가 밤의 해변에서 영상통화를 하기 하루 전의 대화였으니 9월 8일 금요일의 일이었다.

다음날인 9월 9일엔 진서에게 파도소리를 들려줬고, 진서는 무슨 생각인지 다음날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9월 10일, 유하는 학원에 가지 않았다.


친구들과 농구를 했고 소꿉친구인 영지를 만났으며 동영상으로 교내 여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9월 11일 월요일 오후 10시]를 알리며 깜빡이는 전자시계. 누가 붙잡기라도 할까 봐 빠르게 학원밖으로 나온 진서. 그때 멀리서 하지만 소음을 직선으로 꿰뚫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들린다.


- 유하야! 여기! 여기!


가슴 한쪽이 덜컹 내려앉으며 서늘함을 느낀 진서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나무뒤로 숨는다. 유하 영지에게 다가간다. 영지의 밝은 미소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두 사람은 플라타너스가 드리운 밤의 그늘 아래 다정하게 서 있다.


진서는 갑자기 힘이 탁 풀린다. 마음은 도리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대로 학원버스에 몸을 싣는다. 피곤에 쩐 학생들이 털썩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린다.


치이익


자동문이 닫히고 서서히 버스는 움직인다. 차창 밖으로 두 사람이 여전히 길가에 선채 휴대폰을 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때 고개를 돌리는 유하. 진서유하를 훔쳐본 게 들킨 듯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려 한다.


- 안돼. 제발.


탕탕탕


누군가 출발하려는 버스의 옆면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콩닥콩닥


떨리는 가슴. 곧이어 문이 다시 열린다.


- 감사합니다


뚜벅뚜벅뚜벅, 털썩


곁에 앉아 있지만 인기척이 없다. 진서의 눈에 익숙한 아디다스 신발이 들어온다.


- 진서야. 봤어?

-...

- 내가 보낸 클린샷 말야.

- ...


진서유하를 바라본다. 뜻밖에도 유하는 어쩐지 눈을 꼭 감은 채로 말하고 있었다. 두 손은 살짝 떠는 듯하기까지 했다.


- 그걸 올릴 줄은 몰랐는데. 처음에 바닥에 놓고 찍고 있었는데... 찍어준대서... 나한테만 보내달라고 했거든...

- 왜? 영지랑 만나는 게 어때서?

- 영지? 영지랑 만나? 아냐. 그게 아냐! 설마, 내가 보낸 영상은 안 본거야?

-...


유하는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낸다. 그리고 자신의 이어폰을 진서의 귀에 꽂아준다.

확실하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휴대폰에 있는 동영상을 재생한다.


황혼이 깔린 농구장의 멋진 클린샷. 카메라를 향해 다가오는 유하의 밝은 표정. 그리고 건네는 말!


- 들었어?


하지만 영지가 올린 것과 달리 원본 영상은 거기서 끊기지 않았다.


- 클린샷의 파도소리. 어제 들려준 해변의 소리와 똑같지? 하아. 하아.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천천히 시간을 가로질러서... 갈게...


순간, 진서는 여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클린샷은 탄도가 높아야 해. 그리고 절대 성급하고 빠르게 던져선 안돼.
우연히 림에 맞아 들어가거나 백보드에 맞고 들어가는 뱅크샷의 운을 기대해선 안된다고. 정확히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천천히 시간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도록 던져야 해. 그게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 고지식한 사나이의 샷!



눈을 다시 꼭 감은 유하는 말을 잇는다.


- 미안해. 더 빨리 용기를 냈어야 했는데. 나, 나는 고지식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히 너의 마음 한가운데 닿고 싶었고... 그런데 너무 완벽하려다 오해만 만들었고..

-...

- 언제부턴가 곁에 앉은 니 얼굴이 어두워진 뒤로 사실 늘 겁이 났어...

-...

- 그런데 클린샷이든 에어볼이든, 겁먹지 말고 슛을 쏴야 한다는 걸 알았어.


유하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말한다. 긴장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지듯 터져 나왔다.


- 좋아해. 진서야.


그 뒤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버스는 어느덧 유하가 내려야 할 아파트 단지 앞에 정차했다. 유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다시 입을 열었다.


- 진서야.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아. 나는 그래도 좋아... 하니까.    


유하가 일어서 나가려는데 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 방금 들렸어.


유하는 천천히 뒤돌아선다. 앙 다문 작은 입을 한채 미간을 찡그린 예쁜 여학생이 유하를 바라본다.


- 무슨 소리?


유하가 묻는다.


- 파도 소리.


진서가 답한다.


- 파도... 소리?... 파도 소리!


유하의 얼굴이 점점 환해진다.

기쁨의 미소를 따라 단발머리를 한 예쁜 여학생의 얼굴에도 환한 빛이 몰려온다.


- 들렸어? 정말?


고개를 끄덕이는 진서


- 그래. 백 퍼센트의 클린샷이 내는 소리!



촤아 촤아


어디선가 몰려온 해변의 파도가 두 사람의 발끝을 적신다. 버스는 유람선으로 변해 서서히 뱃고동을 울리며 출발한다. 밤의 밀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서로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백 퍼센트의 클린샷>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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