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설 Oct 01. 2023

회고록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 사전이 정의한 작가는 이러하다. 사전의 정의가 맞다면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보유하였다, 그것을 넘어 우리 모두는 작가라고 불려야만 한다. 2021년 기준 18세 이상 한국인의 비문해율(문맹률)은 약 4.5%라고 한다. 사전의 정의가 옳다면 우리 대부분은 작가라고 불려야만 한다. 하지만 어째서 그들 중 극히 일부만이 작가라고 불리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어째서, 왜 나의 이름 앞, 혹은 뒤에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는지. 


2017년, 처음 글을 쓰겠다 말했을 때 욕을 했고, 처음 책을 냈을 때야 비로소 그 조롱을 멈췄다. 2018년, 예술 엔터테인먼트의 운영자라고 자신을 칭하던 사람이 내게 명함을 건네었을 때부터 조금씩 작가라고 불러주었다. 2020년부터는 글 하나 가지고 전시회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문체를 다듬고 공부하기 시작하여 브런치에도 합격했다. 그때야 비로소 전부보다 조금은 적은 사람들이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기 시작했다.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는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한다.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내가 가진 단어가 오직 감사뿐이라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처음 글을 썼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난 6년간 나는 글로 할 수 있는 수많은 경험을 타인보다 많이 겪었고, 이는 충분히 대단한 일이며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나를 작가라고 불려도, 작가라고 칭해도 되는가, 그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사전적 정의는 확실하게 잘못됐다. 우리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그러나 펜을 잡는다고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에 전시회 작품을 철거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누군가 작성한 방명록을 보았다.


작가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영혼을 담은, 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글을 헐값에 팔고 있으니.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작가, 단순하게 정의하면 글을 쓰는(문학 작가 기준) 인물을 말한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전에 글, 문학을 알아야 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전은 문학을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문학을 과거의 불변성과 미래의 불완정성, 그 사이 현재의 괴리와 저항이라고 말한다. 문학은 현재 내가 느낀 감정과 사상, 그것 하나로는 절대 완성될 수 없다. 지나간 모든 과거의 순간과 지나갈 모든 미래의 대립과 충돌, 그리고 그 사이 찰나에 불과한 현재에서 그 둘의 대립과 충돌을 문학으로써 표현한다, 그것은 감정이나 사상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둘의 종합, 혹은 그 둘을 모두 벗어난 새로운 무언가일 수도 있다. 허나 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문학이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담았고, 문학 자체가 삶이며, 영혼이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내린 작가의 정의는 문학이라는 것 안에 자신의 영혼과 인생,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전부 담아내는,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인간이다. 그러니 작가는 언제나 모든 과거에 발생했던일을 기억하고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을 모든 변수를 생각해야 한다, 쉼없이. 그리고 그것을 문장으로 풀어내야 하는 집단이다. 기욤 뮈소가 말한 바와 같이, 작가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다. 물론 하나의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고, 기존의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순수함을 잃었다. 순수하게 글에 인생의 전부를 담아내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는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일 좋아하지 않았던 그들의 행보가 내 발걸음이 되었을 때의 부조리함과 괴리감,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를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나의 모습. 작가, 내가 내린 작가의 정의에 더욱 가까웠을 때는 아무래도 처음 글을 쓰던 그때의 나.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다. 글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글을 쓰며 살아가게 될 것을 알았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목적 없는 항해를 이어가다 이름도 모르는, 발을 디딘 땅 위에서 평생을 방황하며 의미 없는 꿈을 꾸며 생을 마감했으리-. 이것은 신이 선물한 선물, 나의 미래이자 꿈. 그러니 나를 작가라고 기억하지 않아도, 나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아도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뭔들 어떠하리, 나는 결국 글을 쓰며 눈을 감아. 변한 모습도 어쩌면 나의 모습, 전부 의미가 있을 터. 사랑과 유사하다. 영원히 처음과 같을 수는 없듯, 변화하고 변화하며 영원과 조금 더 가까워진다.


두서없이 적은 기록, 나의 인생과 문학 사이의 상관관계. 이는 반성문, 혹은 회고록, 혹은 회상록.



작가의 이전글 지역축제의 활성화 방안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