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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설 Mar 12. 2024

질투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의 불행, 고통을 보며 느끼는 기쁨.

"질투심을 느낄 때, 나는 네 번 괴로워한다. 우선 질투하는 것 자체가 괴롭고, 질투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괴롭고, 내 질투심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 괴롭고, 내가 그런 시시한 감정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괴롭다."
-롤랑 바르트(1915~1980),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질투는 인간의 정신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가장 허망하고 격정적인 고통이며, 부러움은 질투의 자매.'
-미셸 드 몽테뉴(1533~1592), 프랑스의 철학자, 에세이의 시초 '수상록(Essais)'의 저자

인간은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착생활의 시작이란 즉 유목의 생활을 끝마치고 한 자리에 정착하여 살았음을 의미하고, 이는 곧 문명의 발전과 직결된다. 문명의 발전과 함께 자산이라는 소유의 개념과 이를 기반으로 한 신분의 개념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타인의, 혹은 타 문명이 가진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탄생하였고, 이는 전쟁의 시초가 되었다. 

빼앗은 자는 기뻐하고, 빼앗긴 자는 슬퍼한다.


주변의 친구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그간 성공을 위해 노력하였을 모든 시간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가에 대한 무기력함, 그리고 질투를 느낀다.  무의식적으로, 지금 느끼는 감정이 질투인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질투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는 우리는 부정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떨쳐내고자 한다. 질투는 언제부턴가 막연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되었다.


지금부터 약 6년 전, 2018년도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글을 쓰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작은 문학 집단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당시의 나보다 더욱 어렸음에도 정말 재능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며 나보다 훨씬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는 질투했다. 나는 왜 그러한 재능이 없으며, 내가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비교하며. 그때부터 나는 미친 듯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18년 한 해동안 약 1,000개가 넘는 글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때 당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글을 쓰고 연구하며 실력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교 진학을 위한 학업 공부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글을 쓰는 것에 투자했다. 실제로 그렇게 하여 문체를 다듬을 수 있었고, 이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위한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하였음에도 질투의 대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의 위에는 누가 있었고, 그 누군가와 동등한 위치에 도달했다 생각할 때면 또 다른 누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극심한 무기력함으로 인해 더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와 의욕이 사라졌다. 그 후로 약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글과 관련한 대부분의 인연을 끊었다. 6개월 정도의 휴식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고 있지만.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질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스티븐 프랭클과 아이번 셰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아기 시절의 대상 자체에 대한 호기심 및 대상의 관심을 가지기 위한 행동 -특히 부모를 대상으로 한 행동-을 질투의 초기 단계로 인정하였으며, 이러한 질투와 선망은 유아기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즉, 질투란 인간 자아 형성 과정 중 매우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능률 향상 등 매우 중요한 영향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 외에도 질투는 실제로 수많은 예술가의 예술적 성취를 달성할 수 있게 이바지하였으며, 인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질투가 사라진 시대를 상상해 보았는가? 질투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달성해야 하는 목적과 목표를 상실하고 질투가 차지했던 내면은 무기력함과 공허함이 가득 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투를 억제하거나 조절할 필요 없이 표출해도 되는가? 이에 대해서는 모순적일 수도 있으나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질투의 순기능'을 우리가 조금 더 인지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작성했지만, '질투의 부정적 기능'을 묵살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과도한 질투는 관계의 분열, 자아의 붕괴, 무기력함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이 질투라는 날카로운 칼을 다루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나는 그저 질투에 관한 서적을 읽은 사람일 뿐, 전문적으로 심리학을 배운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질투를 다루는 법까지 설명하기에는 지식이 부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이 질투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감정의 기능을 선택하는 것은 해당 감정을 인지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인지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또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질투하며 이를 부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 깨달았을 때, 질투라는 감정을 단순히 떨쳐내고자 하는 것이 아닌 수용하고 이해하고자 하였으면 한다. 이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며, 이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우리는 또 한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순간이 배움과 발전의 연속이기를 바란다. 


참고 서적: 피터 투이 -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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