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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Mar 24. 2024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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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좋은 날은 꼭 꺼내어 말려야 하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해묵은 슬픔이 그중 하나입니다. 저는 이 슬픔에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이하 줄여서 "엄누강"이라고 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홀가분해지고자 일기장도 아닌 곳에서 꺼낸다는 게 부끄럽고 부담스럽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은 날입니다. 지독한 자기 검열을 피해서 숨겨놓았던 제가 드러나는 날이며, 부정적인 일들도 감정을 소거한 채로 무덤덤하게 되뇔 수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엄누강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과거입니다. 소란스러운 과거 속에서 저는 엄마와 누나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10살 꼬맹이로 자꾸만 되돌아갑니다. 2000년에 겪은 아빠의 교통사고는 어린 제게서 아빠라는 존재를 떠나보냈습니다. 그 뒤로 병상에 남은 건 아빠의 형태를 하고서 엄마와 누나를 힘들게 하는 '나쁜 무언가'였습니다. 저는 그런 무언가가 두려웠고, 미워했으며,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보면서 '하루빨리 엄마가 도망갔으면 좋겠다.'라고 진심으로 바랐고, 한편으로는 '엄마가 정말로 도망가면 어쩌지.' 걱정하는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아마도 제 오랜 친구가 불안인 이유가 이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커가면서, 저라는 존재는 집에서 아빠 다음가는 짐이라는 생각이 자리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이보다 의젓한 척을 했고, 어디서나 눈치를 보았고, 무엇이든 잘하고 싶었고, 예의 발라야 했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됐고, 다정해야 했고, 착해야 했고, 그저 존재의 이유를 모른 하루빨리 '1인분' 이상을 해서 엄마와 누나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저는 욕심 많고 독기 가득한 무언가가 되었습니다. 누나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해서 얻은 기회를 일말의 가책도 없이 당연한 권리라 여겼습니다. 가시 돋친 비관으로 가득 찼던 저는 늦게 찾아온 사춘기를 핑계로 아빠 탓을 하며 아빠와 부단히도 싸웠습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빠에게 가장 아픈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 아빠의 가슴에 멍을 남기기 바쁜 아빠의 그림자였습니다. 또한 이런 둘의 사이에서 엄마와 누나가 힘들어하면 그마저도 아빠의 탓으로 돌리는 날카롭고 공격적인 무언가였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렀고 저는 아빠를 떠나보냈습니다. 아빠의 빈자리가 이리도 클 줄 알았더라면 조금은 자상한 아들이 되어볼 걸 하는 때늦은 후회만 남았습니다. 더 어린 시절에 아빠를 용서하지 못한 게 후회되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매 순간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 되려 저였나 봅니다. 스스로에게도, 아빠에게도, 엄마와 누나에게도, 작고하신 김소월 시인께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도. 더 늦기 전에 용서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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