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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Aug 04. 2022

누운 빛과 올리브색의 갈래

황금구주물푸레나무 이야기


"빛이 멀리 곧게 눕는다. 펼친 빛의 부채꼴은

완전히 접은 부채가 되어가며 눕는다.

길어진 빛은 누울수록 짙어진다.

젖은 천을 물들인 색이 물을 뚝뚝 떨구는 동안

천의 가장자리에 진한 색이 모이는 것처럼

빛의 가장자리에는 진한 밀감빛이 농축된다.

짙어지다 못해 붉어진 햇빛.

이내 사위는 어둑해지고

해는 완전히 내일로 넘어갔다.

오늘 무대도 무척 아름다운 명장면을 연출했다.

나는 이 시간대의 열렬한 팬이다."




오후까지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일몰 시각을 기대한다. 해 지기 두 시간 전부터 해가 완전히 숨기 직전까지의 시간. 일몰 시각은 동지부터 하지까지 점점 늦어지고, 하지부터 동지까지는 점점 빨라진다. 10월 무렵의 태양은 오후 5시만 되어도 광원이 서쪽으로 끌려 내려간다. 그렇기에 오후 5시에 해를 찾아 거리로 나서면 조금 늦되다. 중요한 행사를 폐장 직전에 방문해서 클라이맥스만 관람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맑은 오후 4시 무렵의 태양은 오늘도 잘 익은 노란빛을 쏘아 보낸다. 태양이 중천에서 서쪽 끝까지 끌려 내려가면 온 세상 구석구석에 진한 빛이 깊게 밀려든다. 사람도, 풍경도, 동물도, 식물도, 도시도, 자연도 모두 하루 중 빛이 가장 투과하기 좋은 상태로 준비된다.


이 시각에 떠다니는 빛은 물상이 지닌 원래의 색을 지워버리는 게 아니라 색에 한 번 스며든 뒤 다시 내뱉어진 빛이다. 사물에 스민 빛은 다시 배어나며 푹 끓인 맑은 채소 수프처럼 뭉근해진다. 빛이 드리운다는 건 단순히 필터를 한 겹 덧씌운다는 개념만으론 설명이 부족했다. 


햇볕은 측면으로 길게 들어와 사물에 가장 긴 그림자를 그려 넣었다. 색과 명암에 가장 큰 드라마가 펼쳐지는 시간이다. 체력과 여건이 허락된다면 나는 햇빛이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간까지 빛을 따라 밖에 머물고 싶었다. 측광에서 비롯한 내 그림자를 등지고 역광을 슬쩍슬쩍 훔쳐본다. 맨눈으로 봤다가는 눈이 멀어 버릴까 봐 두렵지만, 그렇다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이 황홀하다. 서쪽에 안착한 해는 따뜻해 보이고 나는 벌써 해가 그리워진다. 측면으로 길게 드리운 햇빛은 내게 2시간 내내 긴 안녕을 보낸다. 내일 또 올 거면서 왜 매번 그렇게 그리운 빛을 보내는지 알 길이 없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태양은 '내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밤이 길겠지만 그동안 나를 잘 그리워하고 있어야 해'라며 당부하는데, 그립다는 감정은 품고 있으면 꼭 그 대상과 함께 있는 기분이 된다는 것을 빛은 알고 있는 걸까. 노을빛은 내일도 낮에 함께할 테니까 곧 만날 때까지 긴긴밤 잘 있으라는 태양의 추신이다. 


노란빛이 드리울 때 본연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물의 색은 노랑과 초록 사이의 색상이다. 노랑과 초록 사이에는 무수한 컬러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그 모든 색의 갈래에 이름을 다 붙여주지는 못할지언정 우리가 푸릇푸릇하다고 부르는 이파리에 짙은 태양 빛이 드리우면 가시광선은 종잡을 수 없이 눈부시다. 짙은 명암, 강한 대비, 노랗고 붉은빛의 파장만큼 길어진 그림자는 나무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중 노란빛의 깊이를 투과한 연두색 나뭇잎은 어찌나 영롱하고 눈이 부신지 형언하기 어렵다. 해 질 녘에 찾은 수목원에서 누운 빛을 받은 황금구주물푸레나무를 보고 나는 연두색의 찬란함을 알았다. 그것은 빛을 투과하는 존재만이 가진 아름다움이었다. 한 자리에서 수수하게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도 이토록 신비롭게 눈부실 수 있음을 나더러 좀 알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황금구주물푸레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조금 더 밝은 연두색 잎사귀를 지녀서 가만히 있어도 눈길이 간다. 컬러 피커 스포이트로 찍어본다면 분명 노랑이 섞인 오묘한 녹두색이 나올 것이 분명한 이 색은 오직 햇빛을 받은 물푸레나무만이 보유한 찰나의 색이다. 나는 황금구주물푸레나무를 보며 나무에게서 볼 수 있는 올리브색의 무수한 갈래를 보았다. 




하나의 색이름 안에서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수한 색

색과 색 사이의 색


어떤 색은 단 한순간에만 존재한다.

존재하나 이름이 없던 어떤 색에 우리가 이름을 붙임으로써 빛을 받아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색이 영속성을 가진다.

사라진 그 모든 색에 이름을 줄 수 있다면. 


이름이 있기만 하다면 부를 수 있고, 부르면 기억할 수 있다. 이름 모를 아름다움을 보면 꼭 나만의 이름을 지어서 불러주고 싶다. 현존하는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이 아름답지는 않기에, 이름 없는 아름다움만은 호명함으로써 그것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싶다. 


오늘 말한 이 장면의 이름은 '누운 빛'과 '황금구주물푸레나무의 올리브색 갈래'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생각나면 다르게 불러줘야지. 




더 많은 아름다움과 더 작은 장면에 이름이 있기를 바란다.

내가 부를 수만 있다면 너는 언제나 거기에 있다.

속으로 이름을 부르며 너를 기다린다.



*2022년 2월에 만든 에세이북 《장면채집록 흰그루》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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