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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Feb 11. 2016

[Cross Review] 전자양 X 김중혁

세상 끝에 선 연인들의 마지막 뒷모습

전자양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  X 김중혁 <보트가 가는 곳>


들으면 어떤 심상이 그려지는 음악이 있다. 리스너 스스로 그려낸 이미지는 때때로 그의 회로에 머물던 특정 기억을 소환해낸다. 김중혁 작가의 책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 수록된 단편 '보트가 가는 곳'이 떠올랐던 건 전자양의 앨범 <소음의 왕>에 수록된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를 들으면서였다. 곡의 중반부 이후, 03:40즈음부터 전개되는 멜로디 구성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피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을 기다리는, 석양에 물들어가는 저 먼 바다를 응시 중인 한 남자의 뒷모습을.




파도가 멈추고 정적이 다가올 때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네

나를 부른다 모든 목소리

벅차오른다 모든 몸과 마음

날아오른다 우리의 모든 것

날아오른다 높이 날아오른다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 中



나를 부르는 저 파도 소리는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무심한 듯 끊임없이 반복되는 철썩거림이 멈추는 순간, 정적과 함께 세계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자명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멸망에의 신호 앞에서, 젊음은 이상하리만치 날아오를 듯 벅차오른다.




네가 온 건 남쪽 창궐한 전염병을 피해

전설의 파도를 기다리는 중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 中


길 곳곳에서 싸움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묵묵히 남쪽으로 걸었다. 싸움을 끝낸 사람들도 다시 남쪽으로 걸었다. (중략)

어째서 그 방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행물체들이 남쪽 방향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걷기 시작한 게 누군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왜 안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었고 확인할 길도 없었다. 일단 방향이 정해지자 사람들은 무작정 걸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일단 남쪽으로 내려가려는 습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남과 북이 나뉜 대한민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묵묵히 계속 걸었다.

p.209,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보트가 가는 곳' 中



노래와 소설 모두 '남쪽'이란 방향을 다룬다.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에서의 남쪽은 전염병이 창궐해 내가 떠나온 곳이다. 남쪽을 떠나왔더니 반대편에 세계의 끝처럼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그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파도가 멈추길 기다리는 것 말곤 하나도 없는 상태.

반면 '보트가 가는 곳'에서의 남쪽은 영문도 모르고 떠밀려 걸어가게 되는 지향점이다. 무작정 남으로 남으로 걷다 도착한 그 곳에는 마찬가지로 세계의 끝처럼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남쪽은 전염병을 쉽게 퍼뜨리는 곳인 동시에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이 살려고 본능적으로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땅에 수없이 구멍을 내며 사람들을 남쪽 바다로 몰아갔던 수상한 비행물체들은 어떤 지시도 없이 사람들을 방치한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내 심장을 꽉 쥘 때

나의 심장을 꽉 쥘 때

사랑한다고 너에게 말할래

사랑한다고 말할래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 中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를 들면 모든 게 평온하던 크리스마스이브 어느 찻집에서 그녀를 만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내 심장은 상황과 사랑을 혼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쿵쾅거리는 심장이 그녀에 대한 동정을 사랑으로 변질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랑은 그런 착각과 변질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안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세상이 평화로웠던 시절로 되돌아간다. 그녀가 아니었어도 상관없는 일일까. 나는 여전히 그걸 잘 모르겠다.

p.218,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보트가 가는 곳' 中



이 소설은 우주 비행물체의 공격을 받아 훼손된 지구에서 여지껏 살아남은 한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세상 따위 언제 멸망해도 안타깝지 않을 만큼 감정 없는 삶을 사는 남자. 그의 사랑은 역설적으로 멸망과 함께 찾아온다. 위험한 순간일 수록 사랑에 빠질 확률이 높다고 하는데, 정말 그녀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던 걸까.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마음이 정말 너를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두려움을 두근거림과 착각한 때문인지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어차피 세상을 멸망할테고 지금 내 곁에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은 네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마지막이다. 볼펜이 끝까지 버텨준 게 고맙다. 잉크도 거의 끝나간다. 수첩의 빈칸은 조금 남았지만 이젠 바다로 뛰어들어야겠다. 섬으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바지로 만든 튜브가 얼마나 버텨줄지 모르겠다. 파도가 이끄는 곳으로 가볼 생각이다. 내가 유리병이 되어 이 기록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어쩌면 내 몸이 꽁꽁 얼지도 모르겠다. 나는 죽지만 누군가 이 기록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녀가 빠진 검은 구멍 속을 한번 더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보고 싶다.

p.231,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보트가 가는 곳' 中


생을 늘 찬양해 햇볕은 누구에게나 평등해

인생은 고단한 길 파도는 끝없이 밀려와

팔을 멈춰선 안돼 젊음이 증발하기 전에

죽을래 그렇지만 그전에 고질라의 척추를 활강하리

모래를 털지 않고 난 잠들래 털지 않고 난 잠들래

꿈속에서도 뛰어들 수 있게 뛰쳐 나갈 수가 있게

두려움이 내 심장을 꽉 쥘 때 나의 심장을 꽉 쥘 때

사랑한다고 너에게 말할래 사랑한다고 말할래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 中



한 발짝 한 발짝, 되돌아갈 수도 없이 전진만이 가능한 행군 속에서 그는 앞서 걸어가는 여자와 동지애를 넘은 사랑을 속삭이게 되지만, 결국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한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희망 없는 삶만을 연명하는 남자. 같은 순간이 온다면 그녀를 뒤따르겠다는 무의미한 다짐만 하며 죽을 날만을 기다릴 뿐이다.


한편 노래 속의 젊음은 패기가 넘친다. 모래 위를 뒹굴다 온 몸 그대로 끝이 오는 순간에 사랑한다 말하겠다며 시종 종알종알댄다. 이것이 소설과 노래의 결정적 차이.

후회 없는 엔딩의 주인공은 '멸망이라는 이름의 파도' 속의 화자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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