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도 글도 숙성이 필요하다
처음 만년필을 쓰는 분이라면 잉크가 생각보다 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여러 펜을 돌려 써봐도 좀처럼 잉크 설명 페이지에 나와 있는 색이 잘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개 종이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궁합이 잘 맞는 종이를 쓰면 이 문제는 대부분 해결되는데 보통 새로 구입한 잉크는 흐린 느낌이 강하기는 하다.
내 경우는 딥펜도 종종 사용하기 때문에 아주 진한 잉크를 좋아한다. 잉크는 제조사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까다로운 만년필들은 같은 제조사 잉크에 최적화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제조사와 잉크가 다른 경우 필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세일러의 '극흑' 잉크가 그런 성향이 있다. 세일러 만년필 자체가 대부분 얇은 동양 글씨체에 적합하게 설계가 되어 있어서 이 잉크는 점도도 놓고 색상이 정말 검정 그 자체다. 아주 얇고 진한 한자나 한글을 주로 쓰신다면 가장 좋은 선택이지 싶다.
이 잉크 외에도 라미 잉크가 비교적 진한 잉크로 알려져 있는데 이미 집에 몇 병의 잉크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비용을 들여 새로 잉크를 사기보다는 예전에 고시생들이 애용하던 "잉크 말리기"를 이용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고시 2차 시험에 만년필이 주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고시생들은 답안을 좀 더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잉크를 진하게 할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잉크를 말리는 것이다. 잉크를 말린다면 그냥 뚜껑을 열어두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 맞긴 하지만 한 가지 팁이 있다.
그냥 뚜껑을 열어 두면 당연히 공기 중의 먼지나 불순물이 잉크병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년필(정확하게는 닙)을 고장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뚜껑을 열어 놓되 그 위에 휴지를 가볍게 올려 두면 된다. 이렇게 하면 잉크는 말 그대로 숨을 쉬는 상태가 되고 불순물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얼마나 뚜껑을 열어 두고 잉크를 말려야 할까 고민이 되는데 딱 어느 정도가 좋다는 기준은 없다. 아무리 휴지로 입구를 막았다해도 잉크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계속 잉크의 양이 줄어드는 점도 문제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보통 하루 정도를 말리는데 일단 한번 말려보고 색을 확인한 다음 시간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렇게 작업을 해 둔 잉크는 쓰면 쓸 수록 진해지기 때문에 무작정 길게 말릴 필요는 없다. 특히 가격이 비싼 잉크라면 말리는 것은 둘째치고 날아가는 잉크가 아쉽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방법이 다 번거롭고 애초에 진한 느낌을 원한다면 몽블랑, 라미, 세일러 잉크가 대안이 되겠고, 이국적인 색을 원한다면 까렌다쉬 잉크를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