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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보 Nov 12. 2020

반려견 통역사_05

너의 이름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 (김춘수)


허니, 쑥스럽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를 ‘허니’라고 부른다. 달콤한 꿀처럼 서로의 삶에 녹아들어 가는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 물론 ‘꿀’보다는 ‘꿀벌’ 같은 날도 꽤 있다. ‘이렇게 매일 쏘일 바에는 꿀 없이 살고 말지!’ 싶기도 하고 정말 위잉 위잉 돌아버릴 것 같은 순간도 있다. 그래도 다정한 목소리로 ‘허니’라고 부를 땐 정말 녹아버릴 것 같다.


하지만 ‘허니’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 있다. 아직까지 내 이름만큼 나를 온전히 대변하는 것도 없지 싶다. 그래서 사랑하는 오빠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면 온 세상에 꽃이 만개하는 기분이 든다. 이름은 이런 의미에서 참 특별하다.


다음 날 밖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결국 다시 유리상자로 가득한 그곳으로 돌아갔다. 먼발치에서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좋은 보호자를 만났을까? 만났으면 좋겠는데. 사지 말고 입양하라고 했는데. 생명을 상품처럼 파는 것 자체가 정말 이상하네? 나만 이상한가? 대표님이 키우는 반려견이 낳은 새끼라는데 사실일까?


수많은 생각 뭉치를 안고 복잡한 마음에 입구에 서성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제 보다 훨씬 많은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유리창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쿨쿨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벼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다른 직원분이 데자뷔처럼 어제의 말을 되풀이하며 우리는 소파로 안내했다. 벼리는 떨지 않았고 바로 가방끈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작고 여리고 가볍고도 무거운 벼리.


“저희 사실 어제 왔었어요.”


직원분은 우리 눈빛 속에 고민을 읽었는지 잠시 후 대표님을 모시고 왔다. 모견과 부견 사진부터 강아지의 건강 상태와 성장 배경 등 수많은 이야기를 오빠와 주고받는 동안 나는 벼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한 눈 팔면 다칠까 봐 걱정됐다.


“허니야, 어떻게 하고 싶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애써 덤덤하게 오빠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고 싶냐니!


“나는... 나는... 오빠 알잖아.”


덤덤한 말투로 덤덤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설레는 감정이 방정맞게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긴장감에 뱃속이 간지러웠다. 벼리는 아무것도 모른 체 낯선 세상을 온몸으로 반기며 꼬물거리고 있었다. 무방비하고 마냥 해맑은 작은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도 괜찮은 걸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대표님이라는 사람이 한 수많은 이야기가 진실인지, 벼리가 강아지 공장에서 데려온 아이가 아닌 게 맞는지, 수많은 다른 가능성 대신에 우리가 벼리의 보호자가 되어도 괜찮은 건지.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오빠는 대표님이 벼리의 분양가로 흥정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물건 팔듯이 더 깎아주네 마네 없이 지인가로 잘 데려가서 행복하게 키워달라고 했다. 그렇게 벼리는 우리 품에 들어와 꽃이 되어주었다. 고민 끝에 ‘밀리’(Millie)라는 꽃이 되었다. 안녕, 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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