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
어떤 사황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중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유독 마음에 흔적을 남긴 말이 있다.
‘독해져야 해.’
나는 독해져야 한다는 말의 어감이 싫었고, 독한 사람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독하지 않고 강한 사람이 될래요.’
‘아니, 독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어.’
문명의 발전과 함께 인간은 먹이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진 것 같다. 적어도 길을 걷다 배고픈 사자의 먹잇감이 될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냥 본능이 남아있어서일까? 인간은 ‘사회적 구조’라는 명목 하에 동족상잔할 수 있는 자본주의 먹이사슬을 만들었다. 한정적인 자원을 두고 펼치는 경쟁은 냉정하고, 치열하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오늘 내가 거머쥔 기회와 점유한 자원은 결국 누군가 놓치고 잃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생존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쩌면 정말 독해지지 않으면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독해지지 않고 강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탁한 물을 정화하는 것보다 깨끗한 물을 더럽히는 게 훨씬 쉬운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은 순식간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속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입버릇처럼 착하고 일 못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고 말하고 다녔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 못하는 사람이 싫은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착하고’라는 전제를 붙였을까? 그냥 착한 사람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웃는 얼굴에 침 뱉기 어려우니까. 답답하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는 진짜 착한 사람보다 착한척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무시당하고 손해 보기 싫어서 나는 착한 모습 그대로 살기를 포기했다. 착한 건 다른 매력이 없는 사람에게나 쓰는 수식어니까. 착하면 손해 보니까. 호구 취급받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
웹툰에서 나온 몇 마디 대사 때문이었다.
“착해봤자 손해밖에 못 봐.”
“손해... 그건 착한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잖아. 착한 사람들이 뭘 볼지는 모를 거야. 손해 본다고 생각 안 하면 되잖아. 착하면 손해 본다는 말이 사라졌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착하기 싫어. 손해 보기 싫어. 상처 받기 싫어. 내가 그만큼 강하지가 않아.”
“강해질 수 있어. 착한 사람이 더 강해질 수 있어.”
결국 나는 오래전에 나 자신을, 그리고 지금의 착한 타인을 만만하게 본 것이다. 그뿐이었다.
착한 건 바보 같은 게 아니다. 착한 건 선하고 고귀한 배려심이다. 따듯한 마음이다. 여유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한층 더 높은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다. 선택이다. 강인함이다.
어렸을 땐 칭찬받아서 착하게 살려고 했다. 조금 터 크고 나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사랑받으려고 착하게 살았다. 그러다 점점 이기적인 사람들 틈에서 이용당하고 상처 받으면서 단단해진다는 게 독해져 버렸다. 이제는 이런 이유 말고 내가 원해서 좋아서 착한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무엇이 ‘손해’인지 스스로 정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착한 사람이 보는 것은 손해 따위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는 사실을 살아내고 싶다. 독한 사람이 아니라 착하고 강한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