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안전한데 앉아보자"
내가 주방에서 칼질을 하다가 손이 조금이라도 베이면 남편은 어김없이 나를 소파나 의자에 앉힌 뒤 상처를 살핀다.
남편: "기절할 수도 있으니까"
나: "응?"
나는 아픈 것도 잊고 웃음이 터졌다. 세상 건강한 체질이라 아픈 일이 거의 없던 나는 남편의 과잉보호(?)가 웃기기만 했다. "이 정도로는 기절 안해요".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기절할 것 같았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연애할 때에도 남편이 건강검진 한다고 피를 뽑다가 잠깐 기절한 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혈액검사를 하는 게 아니기도 했고, 그때 갔던 얼전 케어에서 보험이 좋다면서 이런 저런 검사를 추가한다고 튜브 12개를 뽑아서 더 그랬을 거라고 했다. 그 때는 '물에 손도 안 묻히고 피보면 기절하는 도련님 스타일인가?'하며 가볍게 넘겼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남편과 Fertility Center(난임병원)에 다니기로 하면서 그게 단순히 웃을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먼저는 Lapcorp이라고 하는 채혈 기관에 갔다. 우리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난임에 원인이 있는지 기본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먼저 순조롭게 채혈을 하고 다음은 남편 차례. 남편은 이전에 기절한 적이 있었다며 간호사에게 언지를 주었다. 간호사는 그런 일이 흔한 일이라고 안심시켰다.
아니나다를까, 남편은 피를 뽑고 난 뒤 눈앞이 깜깜하다며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했다. “얼굴이 창백해, 괜찮아요?“ 남편은 ”잠시만“ 이라고 말하자마자 눈이 풀리는 것 같더니 고개를 떨군다.
오마이갓 썸바디 헬프미.
나는 혹시 설마 다시 남편이 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남편이 스르륵 기절하는 것을 보니까 식은땀이 주룩 났다. 나는 지나가는 간호사를 다급하게 불렀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간호사는 침착하게 얼음팩이랑 물을 가져오며 혈당이 떨어질 때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아주 잠깐 동안 기절했던 남편에게 물도 천천히 마시고 충분히 앉아서 쉬다가 가라고 한다. “초코렛 쿠키 먹어볼래요?” 간호사는 자기 간식까지 꺼내주며 당분을 보충할 수 있게 해줬다.
남편이 정기검진(미국에서는 특별히 가족력이 있지않고 나이가 많지 않으면 피 검사 위주로 연간 건강검진을 한다)을 미루고 미뤘던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내겐 '간단한 피검사'가 남편에게는 충분히 걱정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남편이 측은하다. 남편이 한입 베어 문 쿠키를 나한테 먹어보라고 주는 것을 보니까 그제야 좀 기운을 차렸나보다 했다.
한 달 후, 유전자 검사로 Fertility Center에 다시 예약을 잡았다. 내가 먼저 채혈을 하고 남편도 불쌍한 어린양처럼 채혈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튜브 2개만이래.” 나는 남편을 안심시켜보려고 했다.
간호사가 선풍기를 들고 남편 있는 쪽으로 뛰어들어간다. 남편이 다시 기절했는 줄 알고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채혈실로 따라들어갔다. "아직 시작도 안했어". 남편이 웃으면서 말했다.
간호사 2명이 선풍기를 틀어주고 남편 뒷덜미에 아이스팩도 대주고, 손에는 말랑말랑한 스트레스볼(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을 때 손으로 주물거릴 수 있는 고무공)을 쥐어준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한테 '요것만 하면 금방 끝나' 하면서 어르고 달래는 모습 같았다. 남편은 "왕이 된 것 같다"면서 간호사들에게 너스레를 떤다. 남편이 긴장을 풀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인 것을 안다. 간호사들도 조금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채혈을 마치고 그 뒤에도 상태를 여러 번 확인해주었다.
Fertility Center라서 환자가 많지 않았던 덕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 고맙다는 말이 연신 나왔다. 시원한 애플주스도 마시라고 쥐어주었다. 남편은 웃으며 "피 뽑을 때마다 간식도 생기고 좋네요"하고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저번과 다르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예약 바로 전에 식사를 해서 아직 혈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간호사들도 피 뽑기 전에 든든하게 잘 챙겨먹고, 필요하면 당분이 있는 것을 먹으라고 조언했다. 남편이 걱정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브런치에 쓸 에피소드 하나 더 생겼네요."
앞으로 어떤 과정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몸이 보내는 신호들을 하나씩 배우고 알아가고 있다. 생길 자녀를 위한 준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서로를 돌보고 챙기며, 이 시간이 우리 부부를 끈끈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크고 작은 도움과 격려 속에서 한 단계씩 밟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세심한 배려와 기다려주는 마음은 쿠키와 애플주스처럼 달고 반갑다. 그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이 길이 고달프다고만 여기지 말고, 다가오는 과정을 잘 버티며 담담히 마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