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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 Feb 13. 2024

겨울의 파리가 좋은 이유


겨울의 정점을 지나는 파리는 외로운 날씨였다. 겨울도 도시마다 조금씩 다른 결이 있다면 파리의 겨울은 어딘가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그런 면이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었는지, 색채를 잃은 건물들이었는지, 관광객 무리들이 사라진 다소 한적한 거리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여름의 파리는 사랑하기 쉽다. 파리의 여름은 모든 곳에서 사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센강을 거닐고, 카페의 야외 좌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공원을 걷고, 걷다 지치면 강변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근처 마트에서 사 온 와인과 치즈를 먹으면 된다. 후미지고 지저분한 거리마저도 파리스러움이 묻어나 멋스럽다.


하지만 겨울에 만나는 파리는 좀 다르다. 쓸쓸함이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길을 걷다 보면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이 쓸쓸한 기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쓸쓸함이 저며든 파리의 겨울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도시의 따스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파리에 있는 이틀 동안 그 온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쓸쓸한 외로움만 남을 것만 같았다.



이 도시의 온갖 슬픔이 차가운 첫 겨울비와 함께 갑자기 찾아왔다. 걷다 보면 높은 흰 집들의 지붕도 잘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에 젖은 쓸쓸한 거리와 문 닫힌 작은 상점들, 약초상, 문구점, 신문 판매점, 조산원과 시인 베를렌이 숨을 거둔 호텔뿐이다. 바로 그 호텔 맨 꼭대기층에 방을 하나 얻어 거기에서 일을 했다.

<파리 스케치>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겨울의 파리의 슬픈 기운 속에서 작고 허름한 호텔 방에 앉아 창작의 열기를 불태우며 착실하게 글을 썼다고 했다.


여기에 영감을 받아서 나도 조용한 카페를 찾아서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레 지구에 있는 숙소에서 나와서 구글맵에서 찜해둔 카페를 찾아갔다. 9시쯤 도착했는데, 작은 공간이라 그런지 이미 자리가 거의 다 차있었다. 다행히도 마침 누군가가 자리를 뜨려는 참이라 공유 테이블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다.


세 명의 스탭이 분주하게 일하면서 다정하게 손님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단숨에 알았다. 이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걸. 단골 주민들이 자주 오는지 와서는 커피를 들고 서서 일하는 직원들과 한참을 수다를 나누다 가곤 했다.


카페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한참을 글을 쓰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혼자서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기에 적합한 편안한 공간이었다.


카페의 센스있는 와이파이 비번 ‘BooksAreBetter’

카페 코멧 Cafe Comets

https://maps.app.goo.gl/v43mGrz1HZtHiTtR7


카페의 온기로 마음의 에너지를 조금 채우고 나니 무언가를 해볼 용기가 났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파리 역사 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파리의 부유한 귀족의 저택을 파리시가 넘겨받아 뮤지엄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16, 17세기의 파리의 예술과 도시 역사에 관련된 작품들을 모아둔 곳이다. 다른 박물관에 비해 유명한 작품은 별로 없지만, 과거의 파리를 느낄 수 있는 생기 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재밌게 봤다. 특히 파리의 비루한 골목의 잡상인을 그린 작품이나, 길거리의 행인들을 그린 작품들이 좋았다. 파리의 골목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것 같다.


파리 역사 박물관 Musée Carnavalet

(입장료 무료)

https://maps.app.goo.gl/Ni6XJCk3fDL6PqRm8


박물관 바로 옆에는 크레페 맛집 Crêperie Suzette이 있다. 파리에 오면 꼭 먹고 싶었던 가예트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마레 지구 크레페 맛집 Crêperie Suzette

https://maps.app.goo.gl/TqLWcZ5YQdw9vPHo6


나는 일을 끝낸 뒤나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면 부둣가를 따라 걷곤 했다. 걸으면서 뭔가를 하거나, 사람들이 익숙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더 잘되었다. 앙리 4세 동상이 서 있는 퐁뇌프 다리 아래 시테섬 앞쪽에, 뾰족한 뱃머리 끝처럼 섬이 끝나는 지점의 강가에 커다랗고 멋진 마로니에 나무들이 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센강의 조류와 역류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낚시터들도 있었다.
강가에서 시간을 보내는 낚시꾼들과 센강을 오가며 화물을 나르는 아름다운 바지선들, 바지선의 밧줄을 끌고 뒤로 연기를 뿜으며 다리 밑을 지나는 예인선들, 돌을 쌓은 강둑에 늘어선 키 큰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 간간이 서 있는 포플러 덕분에 강가에서는 절대 외롭지 않았다.

<파리 스케치> 헤밍웨이



호텔로 돌아오는 길 모두들 차가운 바람에 온몸을 꽁꽁 싸매고 걸어서 귀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파리 뮤지엄에서 보았던 과거에 이 골목을 채웠던 보통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왠지 조금 덜 외로워졌다.


내일은 파리의 힙한 동네, 바스티유에서 놀기로 했다. 이때까지는 몰랐지. 바스티유가 나에게 새로운 파리를 보여줄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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