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자마자 커튼을 열고 수영장을 내다보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나는 수영을 너무나 좋아해서인지 찰랑이는 수영장 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지는데, 이 기분은 참 중독적이라서 나는 얼마든지 수영장을 바라볼 수 있다. 호화스럽지 않아도 좋으니 수영장이 보이는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삶을 살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 알바를 아주 열심히하면 수영장이 있는 동남아 어느 작은 호텔에서 한 달 지낼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머리가 분주해진다.
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글자로만 알던 단어를 현지에서 직접 듣는 순간이다. 현지인의 대화를 엿들어 고유한 억양을 배우고, 직접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는 것 만큼 해외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간편한 방법이 있을까?
단어로서 "사와디캅"이나 "코쿤캅"은 익숙했으나, 실제로 발음하는 걸 들어보니 사와디캅이 아니라 (아마도) 사와디ㅋ랍 이었고, "사와디"를 셋잇단음표와 슬러로 잇고 "ㅋ랍"에 늘임표를 붙여 길게 늘이는 리듬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 "ㅋ랍"을 "캅"보다는 "카"에 가깝게 발음.
또, 태국어는 대체적으로 말 끝을 길게 늘이고 사용하는 언어에 상관없이 모든 문장의 끝에 캅/카- 를 붙이는 게 흥미로웠다. 캅/카 - 를 듣을 때, 발음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서 언젠가부터는 나도 모든 문장의 끝엔 카-를 붙이기 시작했다. Thank you 카, Sorry 카, Can I get the bill 카.
10분만 걸어도 매일 땀으로 샤워하는 동남아에서 바지 하나로 일주일을 보내는 건 도저히 아닌 것 같아 옷을 사기로 했다. 마침 토요일이니 짜뚜짝 시장에 가볼까. 소모적인 일정일 것 같아 방문할 생각은 없었는데, 호텔 근처 유일한 관광지가 짜뚜짝 시장인데 가지 않는다면 괜히 손해보는 것 같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11시부터 3시까지, 4시간을 어디 앉아 쉬지도 않고 짜뚜짝을 구경했다. 기대 없이 간 사람치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
그렇게 구경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짜뚜짝에 볼 게 많아서다 ! 판매하는 물건의 종류도 물론 다양하지만, 축제처럼 곳곳에 라이브 공연자들, 다양한 국가의 먹을거리 상점, 즉석으로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 시장 내부를 구경하다보면 마치 출구 없는 미로를 탐험하는 것 같아 지루할 틈이 없다.
방콕에 있는 모든 해외 여행자들이 다 모였는지 여러 언어가 들려 마치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한 것 같아 설레기도 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 다양한 물건, 다양한 향, 재즈부터 K-pop까지 모든 게 공존하는 이 곳은 묘하고 신비롭다.
쇼핑 결과물은 코끼리 바지 2개, 그리고 플루메리아 비누 3개.
사실 비누는 쇼핑 리스트에는 없었는데, 시장 내부를 걷다 만난 이 플루메리아 향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플루메리아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기 때문에. 세 개 정도면 충분하겠지? 싶었는데 시장을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더 사올 걸!!!
나는 기념품보다는 사진, 사진보다는 글로 여행을 기록하는 게 좋다. 여행지에서 남긴 메모는 공개하기엔 어설프고 난잡하지만, 그것만큼 당시의 기분을 확실하게 불러일으켜 감각하게 해주는 수단이 (나에겐 아직) 없다. 사진이나 영상, 그리고 기념품만큼 직접적인 기록이 아닌데도 그렇다. 기록만큼 여행을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는 게 아직까지는 내게 없기 때문에.
여행하는 순간 번뜩! 하고 영감이 스쳐가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그래도 여행하는 순간순간 아이폰 메모장을 들여다보고 두 엄지로 토독이는 이유는, 그 장소에서만 감각할 수 있는 기분과 영감이,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에만 적어낼 수 있는 글이 있다는 걸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여행지가 주는 영감이 내가 타이핑할 수 없을만큼 크거나 따라잡을 수 없을만큼 빠르고 긴박해 벅찰 때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일단 뭐라도 적기 시작하면 뭐든 만들어진다. 이렇게 쌓인 글은 언젠가 큰 위로로, 즐거움으로, 용기로 나에게 다시 와준다는 걸 몇 번 경험하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반복되는 일상과 익숙한 장소를 벗어나 카페 나들이라도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카메라와 핸드폰 보조배터리 만으로 포화된 가방에 굳이 노트북과 종이 몇 장과 볼펜을 챙겨다니는 이유. 내 삶의 순간순간 자칫 스쳐지나갈 수 있는 영감을 최대한 많이 모아두기 위해.
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는, 우리의 일상이 매일 비슷하고 반복될지라도 그 하루하루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 비슷한 매일은 차곡차곡 쌓여 삶의 운율을 만들어준다. 내 삶이 한 편의 작품이라면, 지루하고 의미없다 여겼던 오늘 하루도 하나의 행이라는 거. <패터슨>이 나에게 알려줬고, 이 생각은 고된 본2 생활을 지탱하는 위로였다.
한참이나 잠이 오지 않아 음악을 듣다가 일기를 쓰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멍 때리기도 하면서 조금 심심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심심한 기분은 얼마나 오랜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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