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억 속 나는 어떤 색인가요?
유월의 어느 늦은 오후 오랜만에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언니가 내게, 나는 분홍색이 떠오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언니의 기억 속 내가 분홍색 셔츠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던 탓일까? 작년 봄 별다른 생각 없이 벚꽃 사진 찍어야지, 하고 꺼내입었던 셔츠를 아마도 언니는 오래 기억하나 보다.
같은 과 동기인 또 다른 친구는 나를 보며 초록을 떠올린다. 새내기 시절 연남동으로 나들이를 떠난 한 여름날, 연두색 반팔 원피스를 입은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친구가 떠올리는 나는 항상 여름의 한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기억과는 사뭇 다른 옷을 입는다. 까만 크롭 티셔츠와 허리선이 내려간 와이드팬츠.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분홍색 셔츠를 입은 나를,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나를 생각한다.
기억에도 색깔이 있다.
어떤 날은 이 이상 빛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이 부신 황금빛이었고, 어떤 날은 버석한 잿빛이었고, 또 어떤 날은 시리도록 푸른 초록이었다.
오색찬란하던 기억의 많은 조각들이 흘러버린 시간에 따라 그 빛깔을 잃어갔지만, 나에게는 이미 빛바랜 사진같은 예전의 내 모습도, 어떤 이의 기억 속에서는 선명한 색을 내고 있다.
지나가 버린 사람들과 함께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나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서는 이미 멀어져 버린, 지나가 버린 시간 속 나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해주는 사람들을 볼 때면, 흑백사진으로 박제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생생한 컬러 영상으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도 이 세상 어느 한 구석에 어깨를 활짝 편 채 당차게 살아있는 것 같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또 얼마나 다양한 색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나의 조각들을 기억 저편에 간직하고 있을까?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1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