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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Mar 27. 2024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의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는 일

<구본창의 항해>와 사진 장르의 매개적 힘


지난 10일을 마지막으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되던 구본창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가 막을 내렸다. 이번 전시는 한국 사진 장르의 발전을 이끈 거장 구본창의 개인적 삶의 궤적을 풀어낼 뿐만 아니라, 이를 한국 사진의 역사와 병치해 장르 자체에 대한 이해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구본창의 항해>전은 사진이라는 장르에 대한 필자의 학문적 탐구심을 촉발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필자는 사진 장르를 많이 접해본 경험은 없다. 기본적인 관심도도 낮았거니와,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스스로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사진전을 관람하며 직접 체험해 본 ‘사진'은 오래 전 누군가의 뷰 파인더를 엿보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는 장르였다. 모든 예술이 그런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사진은 누군가가 셔터를 누를 때 지켜보던 프레임을 우리가 감상자로서 동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감상자와 예술가를 가장 본질적으로 연결한다. 과거와 현재를, 어떤 이와 또 다른 이를, 같은 시점에 위치시켜 매개하고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진이라는 장르의 힘이자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구본창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구본창의 독일 유학 시절 제작된 수많은 작품들 중 <일 분 간의 독백>은 유학생으로서의 외로움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담은 작품으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기점이 되기도 했다.


이방인으로서의 혼란과 소외감, 외로움을 표현한 이 작품에서 구본창은 유독 비행기를 자주 등장시킨다. 비행기라는 대상은 ‘이방인'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을 함축한다. 목적이 여행이든, 유학이든, 혹은 완전한 이주가 되었든, 본 고장을 떠나 다른 국가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이동해야 한다. 가끔은 비행기가 어느 한 지점에 뿌리 내린 사람을 그대로 뽑아 다른 지역으로 옮겨 툭 하고 던져놓는 일종의 매개 물체이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 그리고 독일에서 수많은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을 떠나던 비행기. 비행기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늘 비슷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낮 비행, 저녁 비행, 비오는 날의 비행. 출발지와 목적지는 매번 다르더라도 이동한다는 본질은 같다. 아마도 비행기는 고국을 떠난 이방인으로서 겪는 필연적인 이동, 동시에 그 이동의 필연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작품 자체는 별다른 설명 없이 묶인 네 컷 이미지의 연속에 불과했지만, 이 작품을 감상하며 교환학생 시절 느꼈던 이유 모를 괴리감과 외로움이 떠올라 감상에 조금 더 시간을 들였던 기억이 난다. 형언하기는 어렵지만,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과거 구본창이 셔터를 누르던 순간의 뷰파인더를 들여다 본 듯한 연결을 느꼈던 듯하다.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느끼는 소외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라는 구절로 표현되는 어떠한 감정이 마음으로 와 닿았던 것이다.


언어로는 치환될 수 없는 감정과 체험이 있다. 그것을 피부로 겪어본 사람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 있다. 구본창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은 바로 그런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작가와 나 사이에 두고 잠시나마 연결되는 경험이었다. 


존 버거는 자신의 저서 <Ways of Seeing>에서 예술작품의 원작은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시점과 누군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줄여주는 고유한 원작만의 물질성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물론 책에서의 이 설명은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명확한 회화 장르를 염두에 두고 쓰인 듯하나, 작가가 프레임 안에 담을 것들을 결정하고 셔터를 누르면서 떠올렸을 생각들을 더듬으며 순간적으로 작가와 내가 같은 뷰파인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 또한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다. 


“원작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 
...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화가가 그림을 그렸던 시점과 누군가 그 그림을 바라보는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효과가 생겨난다. 이런 특별한 의미에서 모든 회화는 동시대적이고, 따라서 작품이 증언하는 내용도 즉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처음 이 책에서 이 구절들을 읽어냈을 때, 유레카! 하는 엄청난 깨달음의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지고 있던 예술적 경험들에 꼭 들어맞는 획기적인 설명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 뉴욕 모마 미술관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원작을 보았을 때, 기존에 알고 있던 작품임에도 복사본이나 디지털 사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전율을 느낀 경험이 있다. 어쩌면 영험하기까지 한 이 예술적 체험이 책에 소개된 바로 이 가설로써 전부 한 번에 설명된다고 느꼈던 것이다.  


출처: 서울시립미술관

물론, 당초 사진은 명확한 원본과 복사본이 존재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점에서 ‘원작이 가진 아우라'에 대한 이 설명을 적용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는 관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설명한 ‘시점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줄어드는 효과'는 사진 장르에서도 유사하게, 혹은 더욱 증폭되어 나타날 수 있다. 


비어있는 캔버스를 예술가의 영감과 감성으로 채우는 회화와는 달리, 사진은 카메라 너머의 현실 세계를 담아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진은 감상자와의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우위를 점한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을 쏟아낸 화면보다 현실에 있음직한 것들을 담은 화면에 동질감을 느끼기는 더 쉽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에서 작품의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흔적을 추적해 볼 수 있듯, 사진에서는 작가가 바라보던 바로 그 프레임 자체,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연출하고 인화하는 방식을 통해 작가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사진이라는 장르가 가진,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특별함이다. 누군가의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는 일, 누군가 바라보던 프레임을 동일한 구도에서 바라보는 일. 이것은 결국 그 ‘누군가'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그의 생각을, 의도를,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서로 연결되는 일일 것이다.  


[아트인사이트 기고글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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