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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 Apr 05. 2024

[비하인드] 최진영, <오로라>와 상념들

사랑과 믿음의 관계, 짧은 뮤지컬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 분석


전에 해방촌 고요서사에 갔을 때 마음에 드는 단편소설 한 권을 집어왔었는데 드디어 다 읽었다!


분량은 80쪽 정도로 매우 짧지만 읽고 난 후에 생각할 거리도 좀 있고,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 무겁지는 않고,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도 좀 있어서 마음에 든다. 

문장들이 정말 간결한데 어떤 주제에 대한 고뇌와 여러 가지 감정이 겹겹이 한데 뭉쳐 있어서, 짧은 문장들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면이 있다. 



간단하게 책 소개를 해보자면, <오로라>는 겨울의 제주를 배경으로, 친구의 제주 한달 살이권을 양도 받아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최유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유진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찾는 연락으로부터, 제주 이전의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며 완벽하게 숨기를 시도한다. 그곳에서 유진은 '최유진'이 아닌 '오로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안 하던 일, '최유진'의 규범을 벗어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며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긴다. 되뇌이듯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자신을 ‘오로라'라고 소개하고, 제주에는 어떤 일로 오게 되었느냐는 일상적인 질문에 거짓을 답한다. 스포이지만 사실 유진이 제주로 도망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사랑하던 사람이 기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다. 


그렇지만 유진의 도망에 엄청난 배경이 있을 것만 같은 빌드업 때문인지, 좀 맥 빠지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오히려 이 정도로 사람이 도망치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고 이러는 데에는 뭔가 더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은근한 기대와 호기심이 은연중에 쌓여있었달까. 근데 또 막상 현실에서 겪으면 진짜 세상 무너질 것 같긴 하다. 


여러 모로 최진영 작가가 사랑이라는 개념에 제법 꽂혀 있는 모양인데, 이 소설은 거기에 믿음이라는 요소가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좀 특별하다.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할까?

사랑 없는 믿음은 무엇일까?


인터넷 어디를 찾아도 책 소개에 고정으로 등장하는 질문이다. 최진영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중점적으로 묻고 싶었나 보다. 


아트인사이트 오피니언 작성을 위해 브레인스토밍하면서 자연스럽게 저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제법 논의할 만한 지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1.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할까?


질문을 보자마자 떠올린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믿음 없이 유지될 수 있는 사랑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곱씹다 보니 이 답에서 전제한 '사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믿음 없는 사랑은 없다. 사랑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이 주장에서 정의하고 있는 사랑은 '관계'이다. 관계로서의 사랑은 믿음 위에서만 굳건하다. 

그러나 사랑은 관계와 동의어가 아니다.

사랑은 관계에 우선한다. 사랑은 늘 관계보다 앞선다. 관계는 결정이다. 사랑이라는 정동은 결정에 앞선다. 


그렇다면 사랑은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문득 드는 생각은, 사랑만큼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는 것 같다. 


흔히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라고 말한다. 사랑은 의지인가?

생각해 보면 이 문장에서 정의하고 있는 사랑도 관계인 것 같다. 관계 유지에 대한 의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관계로서의 사랑에서 이러한 의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사랑과 의지를 동일시하는 이 표현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결국 '의지로서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관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할까?"라는 이 질문에서 사랑을 무엇으로 정의하는 게 좋을까?

믿음 없는 사랑을 고찰하기 위해 설정할 수 있는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충동적인 감정에서 시작해 꺾이지 않는 의지가 발생하고, 그 연장선상에 놓인 의지의 발현으로서 행위하게 된다는 것이 내가 생각 끝에 결론 내린 사랑의 메커니즘이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면 사랑은 '마음을 주는 행위'이다. 

마음은 주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지 요구하거나 잡는 것이 아니니까.


사랑을 행위라고 전제하고 '믿음 없는 사랑'을 살펴 보면, 믿음 없는 사랑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그 사람을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싶다는 게 더 정확한 설명 같다. 


소설 속 최유진이 괴로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믿음이 깨져버렸기 때문에 관계로서의 사랑은 깨져버렸는데, 행위로서의 사랑은 그와 별개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경구를 떠올렸다.
믿음은 둘째 또는 셋째구나. 어쨌든 첫째는 될 수가 없구나.
믿음은 사랑보다 슬프겠구나……

p. 6


믿음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정신적인 억제와 충동을 유년기와 연결시켜 분석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자신이 애정을 쏟아 사랑하는 대상의 본질을 연구하고 인식하기 이전까지는 사랑과 증오의 감정을 지체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지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충동적인 동기들로 인해 사랑을 하게 되고, 지식은 기껏해야 이 사랑이 자아내는 결과를 의식과 성찰을 통해 완화시킬 뿐이다. 

프로이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년의 기억> p. 183


사랑은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지식과도 별개로, 충동적인 동기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행위로서의 사랑은 믿음이 없이도 시작되고 지속될 수 있다. 


결론을 내보자면

- 믿음 없는 사랑은 가능하다. 

- 이때 '사랑'은 마음을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이다.             
- 믿음과 행위로서의 사랑은 별개의 문제이다. 믿음이 끝났다면 관계로서의 사랑은 끝날 수 있지만(실질적으로 끝맺지 않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유효하다고 보기 어려움) 행위로서의 사랑은 계속된다.



2. 사랑 없는 믿음은 무엇일까?


믿음은 사랑을 전제하는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한데, 나는 믿음에 있어 사랑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을 믿음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요소 - 예컨대 어떤 현상이나 사람이 가진 믿음직한, 믿음직스러운 구석들 - 에 대한 인정과 긍정적인 인식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정의한다면 답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 없는 믿음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제시된 질문도 '사랑 없는 믿음은 가능할까?'가 아니라 '사랑 없는 믿음은 무엇일까?' 였겠지..!)


믿음과 사랑이 가장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믿음은 의식적이고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사랑은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할 이유'를 찾아 '사랑해야겠다'고 합리적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합리적인 결정이다. 가설이나 이론이라면 그것의 말이 됨직함 또는 적절한 근거를 토대로 '믿음'을 결정한다.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기반으로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이유'를 충분히 발견한 후 그 사람을 믿기로 결정할 것이다. 


때문에 처음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할 때는 '사랑 없는 믿음은 당연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반대인 '사랑 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믿을 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합리적인 근거를 찾고 결정하는 것이 아닌,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믿고 있는 경우, 믿음이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이 경우 이미 발생한 '믿음'은 이성적인 숙고와 선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 사람과의 친밀감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사랑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결정일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믿지 않을 이유가 차고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 있는 믿음'의 가장 강력한 사례일 것이다. 이 경우는 '믿고 싶은 것'에 가깝긴 하다만, 아마도 믿을 이유보다 믿지 않을 이유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결국 믿기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기부터는 '사랑 있는 믿음을' 넘어서서 그냥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 믿음 자체가 비합리적인 걸 넘어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거부한 것이니까.


종교적인 믿음이나 일반적인 신념도 전부 '사랑 있는 믿음'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내용에 깊이 공감하고 내면화할 만하다는 판단하에 믿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특히 종교적인 믿음의 경우에는 믿음에 기저에 그 종교에서 신봉하는 신에 대한 사랑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예외로서 한 가지 언급할 수 있는 사례는 사람에 대해 취하는 태도의 디폴트값이 '믿는다'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처음부터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일거야! 하고 처음부터 확신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편에 가깝지만 굳이 고르자면 사람을 믿는 편인 것 같다. 

이 경우 또한 믿음이 처음부터 미약하게나마 형성되어 있던 것이며, 그 믿음에 합리적인 선택의 과정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식적이거나 합리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기로 한 것 또한 아니다. 


따라서 이 경우는 사랑 없는 믿음도, 사랑 있는 믿음도 아닌 그저 막연한 믿음에 가까운 것 같다. 

물론 깊이 들어가보자면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는 태도 또한 인간 일반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엷은 인류애를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건 '사랑 있는 믿음'에 가까울 듯하다.


아무튼.. 결론은

- 사랑 없는 믿음은 가능하다. 

- 누군가의 인격 혹은 무언가의 본질에 대한 사랑 없이 믿음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만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믿음'이라는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사랑 없는 믿음에 해당할 것이다. (리서치 결과나 데이터를 믿는 것과 같은 맥락)

- 사랑 있는 믿음도 종종 발생한다 - 가까운 사람이라서 믿는 것, 믿지 않을 이유가 더 많은데 믿는 것(믿고 싶은 것), 종교적인 믿음 등등.. 그중 가장 강력한 사례는 믿지 않을 이유가 믿을 만한 이유보다 많은데 믿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쓰다 보니 말이 엄청 길어졌는데, 사실 이 포스트를 쓰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책에 있는 구절 하나 때문에 뮤지컬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의 넘버인 <카슈미르의 나비 Reprise>의 새로운 해석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나의 더테일 버튼을 눌러버린 부분은 다음과 같다.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 / 누구나 감추고 삽니다. 한 명쯤은.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에서. 홀로 사랑합니다. 그러니 당신도 묻어버려요. 마음에. 심장처럼. 그럼 들키지 않고 그는 당신이 됩니다.”

p. 56-57


여기서 부제('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사랑을 감출 수 없어요')를 따온 만큼, 이 구절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새로운 시각'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절묘하게 더테일 같은 것이다ㅜㅜ


<카슈미르의 나비> 리프라이즈에 나오는 "너의 몸은 나의 무덤"이라는 가사가 대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며 친구와도 맨날 얘기하고 그랬는데, 이 구절을 통해 충분히 해석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 등장한 사랑을 묻는다는 표현도 '사랑'을 뾰족하게 잘 정의해야 완전히 이해가 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에 대한 사랑',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정도의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 이 대사는 너무나 크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감추고 싶은 사랑을 들키지 않으려면 내 안에 완전히 묻어서 그 사랑 자체가 되라고 말한다. 이걸 카슈미르의 나비 리프라이즈의 "너의 몸은 나의 무덤"이라는 가사와 엮어서 생각해보면, 존은 사랑을 스스로의 안에 완전히 묻어버려 그 자체가 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묻는다'는 것을 행하는 존의 이성 혹은 육체는 존의 '사랑'(바이런, 이안테, 바이런을 향한 사랑)이 묻혀 있는 무덤인 것이다. 그래서 "너의 몸은 나의 무덤"인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사랑을 묻는 '나'와 내가 묻어버리는 '너'는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이 구절이 더욱 절묘하다고 생각한 것은, 존은 바이런을 사랑하기도 동경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를 원하기도, 그가 되기를 원하기도 했으니까. 존은 바이런에 대한 그 사랑을 감추고 싶어서 자신의 안에 그 사랑을, 바이런(루스벤)을,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이안테를 심장처럼 묻어버린 것이라는 세 가지 측면의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들키지 않고 그가 자신이 되도록. 


그런데 감추려고 했던 이 시도가 들켜 버렸으니까 ("너의 만우절이 진실로 끝났어.") 더 이상 사랑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존은 루스벤을, 이안테를 묻어버리는 데 실패했다. 들키지 않고 사랑을 감추는 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여기서 들켜버렸기 때문에 진정으로 루스벤이랑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꽤나 아이러니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최유진-오로라의 대비구도와 존-이안테의 구도도 유사하다. 

현실을 직면하기 위해 소설 속 최유진은 오로라를 죽인다. 아무도 모르게 탄생시킨 오로라를 아무도 모르게 죽인다. 결국 존이 하고자 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에 맞추어 이안테를 죽이려고 했던 존과 최유진은 서로 닮아 있다. 다만 존은 이안테를 완전히 죽이는 데 실패하고 그를 드러냄으로써 엔딩에서 루스벤과 만나게 된다. 


근데 존은 이안테의 자아를 감추려고 했는데 묻음으로써 이안테 자체가 되는 게.. 좀 말이 안 되긴 한다ㅜ

그치만 사랑을 '묻는다'는 개념과 가사 속 '무덤'을 연결해서 해석해봤을 때 제법 그럴듯해서, 이 생각이 처음 들었을 때 





종합적으로 봤을 때 유의미한 논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한 주제에 대해 골몰해 보고 사고를 확장시켜 나가는 일은 늘 재밌는 것 같다! 오랜만에 진득하게 시간 들여 생각해 본 것 같아 괜히 뿌듯하다. 


이 브런치 페이지는 아카이빙 용도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평소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들이나 기존에 써두었던 글들을 다듬어서 올리는 편이다. 다만 가끔 이렇게 그때그때 떠오르는 상념들, 그중 네이버 블로그에 업로드하기에는 결이 좀 안 맞는 것 같은 글들을 비교적 가볍게 풀어보면 어떨까 싶어 나름의 신규 콘텐츠인 '비하인드'를 신설했다.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내 글을 읽을까 싶긴 하지만, 앞으로 [비하인드] 태그를 달고 업로드하는 글들은 이 글과 비슷한 결을 가진 글일 것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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