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 사는 딸을 둔 엄마의 마음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내가 사는 동네의 법원으로부터 배심원으로 심판에 참여하라는 편지가 와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영국에서는 시민들이 jury duty 또는 jury service라고 해서 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마 미스터리 수사물, 법원을 배경으로 한 영국 드라마를 본 청자라면 이 배심원 제도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이건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라서 영국에서 5년 이상을 실 거주한 18세 이상의 성인들은 5년마다 한 번씩 법원에 오라는 통보를 받는다. 내가 석사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온 게 2017년, 박사를 시작한 것은 2019년이다. 햇수로는 6년이라, 나도 내가 5년 이상 거주를 한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자리에 앉아 영국 주소지에서 거주한 기간을 계산해 보니 아직 5년은 채 되지 않았고, 약 4년 8개월 정도가 되었다. 나는 나는 5년을 채 거주하지 않았으니 자격이 되지 않으니, 내 이름을 제외해 달라는 이메일을 썼다.
4년 8개월. 생각해 보니 나는 실로 제법 긴 시간을 영국에서 보냈다. 영국 법원에서 이런 우편물을 받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에 영국으로 석사 공부를, 그리고 그 이후에 박사 공부까지 하러 집을 떠날 때도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혼자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나는 정말 무식해서 용감하게 짐을 싸고 지구 반대편으로 올 수 있었다. 갑갑한 한국이 아닌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20대의 나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했다. 비싼 학비와 3년이라는 시간을 무조건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박사 공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나를 지지해 주셨다. 박사 공부를 끝마친다고 해서 어떤 성공적인 자리 나 기회가 찾아온다는 보장이 없음에도 말이다.
학기 중에는 해야 할 공부가 있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는 소소한 일들도 있었으니 부모님을 볼 수 있는 건 일 년에 많아야 2번 정도, 내가 한국에 갈 수 있는 방학 기간 동안뿐이었다. 보통은 부활절 휴가나 여름방학, 아니면 크리스마스 휴가 정도로 나는 길면 3주 짧으면 2주 정도를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내가 일이 많아서, 혹은 돈이 없어서 한국에 가기를 고민할 때면 엄마는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무조건 오라고 했다. 실제로 거의 모든 경우 엄마가 생활비 외에 추가로 돈을 더 부쳐주셨고 나는 한창 비행기 티켓 값이 비싼 휴가철을 골라 한국으로 돌아갔다. 내가 한국에 가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아빠도 좋아하시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엄마는 나의 존재를 눈에 띄게 반가워했고, 내가 떠나는 날이 다가오면 급속도로 울적해지곤 했다. 그래도 떠나는 날이면 등을 두드려주며 잘 가라며 배웅을 해주던 엄마였는데, 올 겨울 영국으로 돌아오는 날 엄마는 평소보다 훨씬 약한 모습을 보였다.
"네가 가면 울 것 같아."
어디 아주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니고,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또는 두세 번씩 엄마한테 영상통화를 거는 나름 붙임성 있는 딸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 떠나는 날 울고 싶어 진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이번 겨울에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 사정으로 도저히 논문을 쓸 수가 없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밀린 일들을 처리할 생각에 머리가 아픈 터였다. 나는 멋쩍게 "엄마, 00도 있잖아" 라며 동생 이름을 댔다. 실제로 서울에는 늘 동생이 있었고, 엄마 옆에는 아빠가 있었다. 내 말에 엄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적어도 내 앞에서는) 울지 않았고, 나는 인천 공항으로 떠났다.
영국으로 돌아온 지 1주일이 되던 주말, 드디어 시차 적응을 다 끝내 제법 늦게 일어난 토요일 아침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이 주말 아침의 통화는 우리의 일과였고, 항상 어떤 이야깃거리가 있어야 전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떠나고 아빠와 노년 부부처럼 둘만 남아 울적한 심리를 토로하다가 서른이 넘어서도 공부만 하고 있는 나를 걱정하기도 하고, 질타를 하기도 하다가 도무지 결론이 뭔지 모르겠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래도 나는 엄마 말에 맞장구를 치며, 이제 강아지나 고양이를 입양할 때가 된 것이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 나 역시 내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피력하고 남자친구와의 미래도 고민 중이다,라고 털어놓았다 (나는 이번 겨울, 엄마에게 외국인 남자친구와의 동거 계획에 대해 밝혔다).
내 얘기를 들은 엄마는 일단 미래에 대한 걱정은 말고 지금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라고 했다. 하지만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결혼을 위해서는 그 남자의 책임감이나 경제력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그쳤다. 내가 나 하나도 책임 못지는 상황에 무슨 결혼이며 미래냐 하고 말하니, 엄마는 '너 나이 때 이미 애가 둘인 엄마였다'며 역정을 냈다. 엄마는 모든 게 다 갖춰진 상황에서 결혼이며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상황에 맞춰가는 거라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다시금, 내 외국인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내가 좀 아까우며, 내가 고생해야 할 미래가 그려져 걱정이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내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나보고 지금 뭘 당장 어쩌란 말인가. 지금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다른 이를 만나라는 얘기인가? 아까는 현재의 일들에 충실하라더니?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공부에만 집중하되, 더 현실적으로 지금 만나는 남자와의 관계를 점검하고, 모든 걸 다 갖추는 걸 걱정하지 말고 결혼도 계획하라는 말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영국에서 공부를 해서 내 커리어를 쌓아나가길 바라면서도, 외국인 남자친구와 여기서 자리를 잡는데 것은 탐탁지 않아 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프리랜서인 남자친구 때문에 내가 경제적으로 고생을 할 것 같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타지 생활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도 자식들 끼고 살고 싶어."
"내가 서른이 넘었는데도? 독립 안 하고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응. 어디 멀리 안 가고 딸 보고 살고 싶어."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짜증이 나서인지 슬퍼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그냥 눈물이 났다. 내가 우는 걸 본 엄마는 당황했다. 그냥 속에 있는 얘기를 풀어놓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뿐, 나를 울릴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엄마는 "내가 계속 잔소리만 하게 되네. 울지 마." 라며 나를 달랬다. 엄마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아빠가 휴대폰을 가로채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왜 우니 우리 딸, 다 잘하고 있는데 울지 말아라. 그런데 울지 말라는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눈물이 더 났다. 왜 우냐는데 나도 이유를 몰랐다.
아빠가 휴대폰을 엄마에게 다시 돌려주었을 때, 나는 엄마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있는 걸 알아차렸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엄마는 말했다.
"엄마도 외로워서 그래."
나는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우리집 어르신인 외삼촌 할아버지의 일화를 꺼냈다. 그 분으로 말하자면,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신 노력파에 수재셨다. 그 분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어머니에게, '엄마, 저 어디 가면 좋을까요' 하고 묻자, 그분의 어머니께서는, '어디든 좋으니 엄마한테서 너무 멀리만 가지 말아라' 라고 대답하셨다 한다. 여러 대학 중 어느 대학에 가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냐는 질문이었지만, 어머니는 그저 막둥이 아들 무얼하든 상관 없으니 곁에 있어주길 바라신 것이다. 엄마는 지금만큼 그 외삼촌 할아버지의 일화가 그렇게 가슴 절절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했다. 엄마도 결혼하고 서울로 와서 오랜 시집살이를 하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떠나 산 지가 삼십 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이제야 일 년에 몇 번, 휴가철에만 본가에 내려가면 설거지도 하지 못하게 했던 외할머니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야 좀 짐작이 된다고 했다.
항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살아온 나로서는, 그 엄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물론 엄마 곁에서 살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미래의 계획을 변경할 정도로 엄마가 나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그랬던가? 우리 엄마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엄마가 아닌 씩씩한 워킹맘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독립성과 책임감을 배웠고, 내 동기들이 앞날이 이미 결정된, 소위 잘난 남자와 웨딩 마치를 올릴 때 유학을 떠났다. 우리 엄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나를 여성스럽고 가정적인, 남자들이 좋아할 법한 여자로 만드려고 한 적이 없었다. 내 친구의 어머니들이 딸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거나, 딸의 미래에 도움을 주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맞선이나 취직 자리를 알아볼 때, 우리 엄마는 그런 어머니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나는 부모나 남자들로부터 독립적이고 내 미래를 내가 결정하는 그런 삶이 엄마를 자랑스럽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공부와 일은 무조건 알아서 했고, 집안일을 돌보는 것도 곧 성인으로서 나의 생활을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열심히 했다.
그런데 엄마는 이제 외롭다고 한다. 내가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엄마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 살아주었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의 독립적인 삶과 엄마의 행복,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이 두 가지 가치를 상충하는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한 개인으로서 자립하는 삶이 내 부모에게도 행복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를 배반한다는데, 나는 지금껏 오만하게도 나는 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 엄마를 생각한다. 누군가의 딸이고, 딸을 둔 엄마인 우리 엄마를. 정말로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며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걸까?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누군가와 만나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때야 아 우리 엄마가 그랬겠거니 하고 느지막이 후회하게 되는 게 인생인 걸까?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이라는 책의 마지막은 이렇다.
잔느는 자기 앞의 허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비들이 불화살처럼 구부리고 날면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기분 좋은 온기가, 생명의 열기가 그녀의 옷으로 스며들어 다리에 미치고, 살 속까지 파고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자고 있는 작은 생명의 체온이었다. 그러자 무한한 감동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갑자기 자기가 아직도 보지 못한 어린애의 얼굴을 들추어보았다. 자기 아들의 딸, 여리디 여린 그 피조물이 강한 빛을 받아 입을 옴죽거리면서 파란 눈을 뜨자, 잔느는 두 팔로 들어 올려 마친 듯이 키스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잔느라는 지지리 운도 없는 여자는 자기에게 온갖 불효를 하고 떠난 아들이 맡아달라 보낸 아기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여자의 일생을 모파상이라는 남성 작가가 이렇게 마무리짓다는 게 탐탁지 않으면서도, 어쩐지 이 결말은 엄마와 나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 엄마가 되고 아이를 낳아, 또 그 아이의 아이를 본다. 그 무한한 감동, 그 무한한 궤적을 내가 이해할 날이 올까. 나도 내 엄마에게 미안해하며, 내 미래의 아이에게 내 외로움을 토로할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