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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asel Aug 31. 2021

봉쇄령(Lock down)과 식물들

2020년 5월.


영국에서 록다운이 시작된 지 약 2달 반 째.


영국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수면으로 올라온 건 3월 중순 무렵이다. 이때 이미 사람들이 잔뜩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재기해서, 이미 파스타 같은 식료품은 동이 나고 화장지는 어느 슈퍼마켓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도 긴장한 상태로 평소보다 장을 잔뜩 본 채 계산대를 지나치려는데, 한 여직원이 다가오더니 아주 상냥한 태도로 작은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20파운드 이상 식료품을 구매한 고객들에게 주는 사은품인데 받겠느냐면서. 그때 슈퍼마켓 체인인 M&S는 당시 20파운드 이상 식료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봄을 맞아 작은 꽃이나 채소 씨앗을 사은품으로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누구도 바이러스가 이 섬나라에서 이렇게 급속도로 퍼져 모든 걸 마비시키리라 예측하진 못했기 때문에, 꽃이며 채소 씨앗을 주는 건 다가오는 부활절 이전의 봄을 축하하는 이벤트였다. 나는 부직포 마스크를 쓰고, 라텍스 장갑을 낀 채 두 손은 무거운 식료품 봉지로 묶여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상냥하게 웃으면서 채소 씨앗을 주는 게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씨앗은 받아 왔다, 공짜라는 데 뭐. 그리고 집에 와 상자를 열어보니 박스에는 압축된 흙과 래디시, 당근 씨앗, 그리고 종이 화분이 들어 있었다. 


3월 중순, 그렇게 받아온 당근, 래디시 씨앗을 재미 삼아 거실에서 키웠다. 그리고 그렇게 씨앗을 심은 주말이 지나고 3월 말부터 영국 전역에 록다운이 실행되면서, 모든 외출은 전면 금지되고 이 화분 속 식물들이 내가 유일하게 만지고 가꿀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 점점 더 늘어가는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전망... 불안감과 무력감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 때, 내 손바닥보다 작은 화분에서 씨앗을 틔운 당근과 래디시는 이런 상황과 전혀 상관없이 무럭무럭 자랐다. 지난 9월부터 2월 초까지 스코틀랜드 날씨는 정말 끔찍했는데, 사람들을 놀리는 것 마냥 록다운이 시작된 이후로는 비도 잘 오지 않는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가 줄곧 이어졌다. 거실의 창문은 아마도 동북쪽(아마도)을 향하고 있어 아침에는 햇살이 깊숙한 곳까지 따뜻하게 들어오지만 점심시간 무렵부터는 좀 그늘지다. 덕분에 식물들은 아주 느리게 자랐지만, 어쨌거나 자랐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집에서의 갑갑한 일상에 작은 변화들을 만들어주었다. 



3월이 지나 어차피 이 상태가 장기화될 것 같아 친구와 나는 마트에 가서 한 번에 1주일 치의 장을 봐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수, 민트 화분이 눈에 들어와 그것도 창가에 가져다 놓고 키우기 시작했는데, 고수와 민트 모두 여전히 작은 플라스틱 화분 속에서도 쌩쌩하게 잘 살아 있다. 여름이 오고 낮 시간이 길어지면서 매일매일 물을 줘도 다음날 아침이면 물을 더 달라고 잎이 축 늘어지곤 하지만, 이 제한적인 환경을 생각하면 이 식물들이 살아서 생장하고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실 당근이나 래디시는 영국 슈퍼마켓에 가면 대충 1파운드 정도에 한 뭉치를 살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채소들이고, 민트나 고수 화분도 2파운드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록다운 기간 동안 살아서 생장하는 생명체로써 이 식물들이 내게 준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



이제 래디시는 꽃을 피우고 있다. 오늘 아침 본 첫 꽃. 아마 이제 꽃을 피우고 시들겠지만, 씨앗을 받아두면 아마 올 가을이나 내년에 다시 심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벌써 6월.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봄이었지만 어쨌거나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들은 살아있다. 오히려 이기적인 인간들이 없어지니 물이 맑아지고 공기가 좋아졌다는 등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비 인류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여타 생명체들에게 기쁜 소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여전히 그 이기적 인간 종인데, 올여름부터 겨울까지 이 위기 중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게 걱정이다. 그냥 나도 당근이나 래디시처럼 나와 닿는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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