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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asel Aug 31. 2021

영국의 첫 번째 봉쇄령, 그리고 여행서적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이다혜의 '교토의 밤 산책자'

2020년 4월.


영국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외출을 금지한 지 3주째. 처음 1-2주 동안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일상생활은 어떻게 달라질까 걱정이 되어 며칠간 감정이 널을 뛰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이제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 같다(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상황이 좋아진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며 감탄할 뿐). 다행히 학교는 연간 보고 제출기한을 좀 늘렸고, 평가도 3월 이전 자료에 집중할 거라고 하니 연간 평가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을 좀 덜어도 될 것 같다.


지난 몇 주간 가끔 침대에 누워 잡생각이 많아질 때 아빠가 추천해준 온라인 북스토어 앱을 통해서 한국어 책을 읽었다. 거의 매일같이 글을 읽으며 지내지만, 다른 나라의 건조한 어투로 이런저런 정보들을 설명하는 글을 읽다가 정확하게 그 단어의 소리와 촉감이 와닿는 한국어 산문을 읽으니 마음이 한결 좋아지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니 한국어로 된, 일과 관련되지 않은 글을 별다른 생각 없이 읽는 게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한국어 책을 읽는 게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타자를 두드리는 지금도, 내 공부나 일과 관련되지 않은 한국어 책에 관한 글은 2016년 이후로 전무했다는 사실이 새삼 뜨악하다. 2017년에 유학을 가면서 낯선 땅에서 어떻게든 억지스럽게 이 사람들의 언어를 익혀보겠다고 부단히 노력한 게 결과적으로는 한국어와의 거리두기가 되었다. 부러 모국어를 피한 건 아니지만 환경적인 요구와 맞물려 예전처럼 한국어 책을 읽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박사과정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 한국어를 쓸 일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제는 영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게 아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뭐랄까 영어로 글을 쓰는 건 얼굴을 모르는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느낌이랄까, 어딘가 모르게 친밀감이 부족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흙덩이를 주물러가며 계속 가장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애를 쓰는, 그런 느낌이다. 대략적인 윤곽을 아니 사람들이 보기에도 잘 빚은 조각상처럼은 보이겠으나, 눈이나 코, 눈썹이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촉감인지는 전혀 구별할 도리가 없다. 반대로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우나, 그게 숨쉬기처럼 특별한 활동이 아니다 보니 도리어 나중에 보면 너무 치대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흙반죽처럼 너덜 거리기도 하는 것 같다. 


여하튼 요점으로 돌아가자면, 반강제적인 모국어와 거리두기 상태에서 근래에 읽은 두 책, 김영하, 이다혜 작가의 여행 관련 서적들, '여행의 이유'와 '교토의 밤 산책자'는 몹시 친근하게 느껴졌다. 팟캐스트나 방송을 통해 목소리를 익히 들어오던 작가들이라 더 잘 아는 사람들의 글처럼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책 다 여행에 관한 산뜻한 산문이고, 앞서 적은 대로 작가들의 목소리가 떠오를 만큼 힘주지 않고 쓴 듯한 글들이라 침대맡에서 읽기는 편했다. 너무 어둡거나 골치 아픈 생각을 유발하는 것 같은 책은 부러 피해 고른 책들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바깥세상으로의 외출 자체가 금지된 상태에서 여행에 관한 글만큼 구미가 당기는 게 또 있으랴 싶다. 



우선,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는 그 제목에 걸맞게 지금껏 작가가 다닌 여행들에 대한 에피소드와 상념들을 정리한 책이다. 일반적 휴가로서의 여행뿐만 아니라 취재, 그리고 글쓰기를 목적으로, 혹은 떠난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다녀온 세계 이곳저곳으로의 길고 짧은 여행들의 이야기가 다채롭다. 특히 고향을 떠나 문화와 언어가 다른 타지에서 살고 있는 입장에서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무척 많았다. 예컨대 언어의 한계라던지, 뿌리내리지 않은 이동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내용이라던지. 전자책으로 읽어서 하나하나 밑줄을 그어가며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인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은 휴대폰으로 캡처해서 남겨두었다. 또 부러 기록을 남겨두진 않았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되 각자 루트를 정하는 '알쓸신잡' 프로그램을 일전에 무척 재미있게 봤던 터라 그 티브이 프로그램에 관한 작가의 회고담도 흥미롭게 읽었다.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모국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언어의 사소한 뉘앙스와 기색, 기미와 정취, 발화자의 숨은 의도를 너무 잘 감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고요와 안식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모국어가 때로 나를 할퀴고, 상처 내고, 고문하기도 한다. 모국어를 다루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늘 편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


언어는 쉴 새 없이 변하고, 언어에 민감한 이들은 시시각각 낡아가는 언어들을 금세 감별한다. 모국어의 바다를 떠나면 이런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고 언어의 신선도에 덜 민감해진다.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 인용구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치며 공감하는 내용들이지만, 가장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구절은 마지막 인용 구절,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에 관한 부분이다. 여행이 물리적으로는 우리를 고단하게 만들지언정, 종국에는 휴식과 즐거움으로 인식이 되는 이유는 여행이 과거와 미래로부터 잠깐이나마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상태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막 퍼져나가던 2020년 3월 중순 무렵, 다른 이벤트들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던디에서 있든 심포지엄은 원래 예정대로 그대로 진행되었다. 나도 짧게 발표를 해야 하는 자리라 마냥 즐거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나는 새벽에 일어나 인파가 적은 기차역에 들어갈 때의 그 설렘을 기억한다. 기차를 타고 내가 잘 모르는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은 약간 들뜨게, 그리고 긴장하게 만들었다. 심포지엄은 결국 바이러스 여파로 인해 토론 없이 이상한 방식으로 원래 일정보다 일찍 마무리되었지만, 그 심포징지엄이 열리는 지방도시의 대학교를 가기 위해 작은 기차역들을 지나며 본 시골 풍경이며 이름 모를 섬들과 다리들을 즐겁게 바라보던 기억이 가장 근래 '여행'에 가까웠던 기억이다. 물론 기차 안에서 오후에 있을 내 발표에 대한 걱정을 하긴 했지만, 좌우지간 나는 지도에 찍힌 다른 좌표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 덜컹이는 기차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나를 휙휙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풍경들을 지켜보는 즐거움, 그런 것들이 일상의 잡다한 고민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현재시제의 이동이 주는 투명한 즐거움, 창밖을 바라보며 상상해보는 공상 외에는 어떤 종류의 여행도 불가능한 지금, 한 달 전의 그 기억은 더 선명하게 회고된다. 





한편 이다혜 작가의 책 '교토의 밤 산책자'는 실제적인 여행 정보와 더불어, 그녀가 여기저기 직접 다녔던 곳들에 대한 묘사와 에피소드가 잘 버무려진 교토에 대한 러브레터와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는데, 그건 평상시에 이다혜 작가를 좋아해서이기도 했지만 특별히 그녀가 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교토에 대해 어떤 인상과 경험을 가지고 있을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교토는 나에게도 다소 특별한 장소인 까닭이다. 도시지만 시골스러운 정취와 오랜 역사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고, 조금만 단체 관광객의 무리를 벗어나도 나만의 보물 같은 장소들을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기도 한 교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인천공항에서 크게 시간과 돈에 구애를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교토는 나에게 '일상탈출'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닌 듯, 이다혜 작가의 글에 나오는 대부분의 장소는 나도 가보았거나 아는 곳들이었다. 물론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어서, 아 이런 건 나중에 갈 때 참고해야겠다 싶은 내용도 있지만 교토를 사랑하는 이유, 그리고 그곳의 세세한 볼거리들에 대한 소박한 예찬이 내가 평상시에 생각하고 있던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무척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아래의 구절은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던, 교토를 혼자 산책하는 그녀의 마음에 관한 묘사. 



달밤의 해변에서 단추를 주웠다, 그저 그뿐인데 너무나 애틋해서 버릴 수가 없었다.


혼자 걷는 밤의 기온 중심부는, 추야의 시에 나오는 '달밤의 해변' 같다. (...) 기온 사라카와를 따라 걷는 이 길을 나는 '밤의 철학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북적이는 구간이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차분하다. (...) 산책 코스로는 지온인까지 갔다가 큰길을 따라 야사카 진자 앞으로 와서 시조 거리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이 하나, 아까 간 길을 시라카와를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 또 하나가 있다. 전자는 대로변이고 가모가와 근처라 탁 트인 길을 걷는 재미가 있고, 후자는 골목 구경과 골목 사이의 영업집들을 살피며 '어디서 한잔 해볼까' 두리번거리는 재미가 있다. 일행이 있을 때보다 혼자 이 길을 걷는 게 더 좋은 이유는 쓸쓸하고 운치 있는 밤 산책에 딱 어울려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그 소리를 잠재우기 좋은 산책로다.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외지 지도 않으며, 언제든 꺾어 돌아갈 수 있는. 조명 자체가 적당히 낮은 조도를 유지한 밤의 기온 뒷골목을 걷다 보면, 정말 달밤에 단추를 줍는 마음이 든다. 단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이런 밤의 시간에나 잠깐 허용될 뿐이다. 해가 뜨면 그런 감정은 소맷부리에 집어넣는다. 누군가는 버리는 것이지만 나는 버릴 수 없다. 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 구절은 시센도와 관련한 그녀의 기억.



일본에서 머물던 숙소의 스텝(교토인) K 씨, A 씨와 가라오케에 갔던 때의 일이다. 나로서는 불운하게도 두 사람의 신청곡이 동방신기의 <주문 MIROTIC>이었다. 춤도, 같이 부를 멤버도 없이 혼자 염불 하듯 부르고 나니 K 씨가 노래를 골랐다. 우에무라 카나의 <토이 레노 카미사마>(화장실의 신). 우에무라 카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단은 곡으로, 아주 천천히 가사를 읊조리며 부르는 포크송이다. 그 곡을 보고  A 씨가 "또!"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자주 부르는 곡이라고. 8분 정도의 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왜인지 할머니하고 살게 됐어."


가사 내용은 이렇다. '나'는 매일매일 할머니를 도와주고, 할머니와 오목을 두기도 한다. 그런데 화장실 청소만큼은 영 잘하지 못하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화장실에는 아름다운 여신님이 있단다. 그러니까 매일 깨끗이 청소하면 여신님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단다."


'나'는 그날부터 반짝반짝해지도록 화장실을 청소한다. 노래를 듣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마도 손녀가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부모가 같이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어린 여자아이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을 테다. 아름다움보다는 직업과 돈이, 화장실 청소보다는 공부가 도움이 되었겠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세상의 규칙으로 손녀를 가르쳤다.


조금 시간이 흘러 손녀는 조금 어른이 되었고, 할머니와 자주 싸운다. 가족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에 가지 않고 늘 남자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와 함께하던 건 다 사라졌다.


"왜일까. 사람은 사람을 상처 입히고 소중한 것을 잃어가."


홀로 도쿄로 떠난 지 2년 후, 할머니의 입원 소식이 들려온다. 살이 빠져 여윈 할머니의 몸에는 뼈만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돌아가"라며 병실에서 손녀를 내보낸다. 그리고 이튿날 찾아온 할머니의 조용한 죽음.


"마치, 마치 내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가라오케 화면에 뜨는 가사를 읽듯 노래를 부르는 K씨도 울고, 그 곡을 처음 알게 된 나도 울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울고 있다.) 나도 K 씨도 할머니와 살았다. (...) 어릴 때는 할머니가 가장 좋은 친구였는데, 커가면서 할머니를 아무도 아닌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것을 잃어간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 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거기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때가 있다. 그런 장소가 있다. 시센도에 걸려 있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진처럼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슬픔으로 끝난 관계들이 가장 반짝거렸을 때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있다.


그 사람과 같이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하는 장소가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장소 찾기의 중독자들이다. 나에게는 시센도가 그런 곳이다. 처음 방문했던 때는 혼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분명 당신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찾지 못했다면 찾기를 포기하지 마시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장소 찾기의 중독자'라는 이다혜 작가의 말은 진실이다. 나는 그 장소에서 우러나는 감상들이 특정한 장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인지, 여행이라는 일종의 의식과 한 장소가 우연하게 결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마법적 장소들을 일상의 순간에서 마주하기 어렵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 낯선 장소와, 낯선 장소로 끝없이 움직이는 현재의 순간이 만나 과거의 한 특정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다혜 작가가 적은 것처럼 아마도 그게 여행의 매력이자 마법일 것이다. 


다소 감상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이유일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다혜 작가가 말한 바로 그 이유로 가끔은 혼자 떠다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실제로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그윽하게 사색에 잠기기보다는 허둥지둥 표를 찾거나, 구글 맵을 뒤지거나, 혼자 식당에서 애매하게 휴대폰을 보는 척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나 교토처럼 산책을 하기 좋은 곳에서 혼자 보물 같은 장소들을 발견하는 것은 실로 멋진 경험이다. 사실 그 보물 같은 장소들은 동네 골목길의 어느 절, 깔끔한 카페, 멋진 상점 등 분명 나만의 장소라고 말하기는 힘든 곳인 경우가 많은데, 그것도 여행을 하다 보면 별로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 나의 야이 기와 기억이 나중에는 알록달록하게 덧입혀지기 마련이므로. 시센도와 할머니는 객관적인 이유에서라면 조금의 연관성도 없을 테지만, 이다혜 작가에게 시센도가 특별한 이유는 그 장소와 그녀의 어떤 기억이 '달칵' 하고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테다. 그런 나만의 장소를 만들어가는 것은 실로 은밀하고 즐거운 일이다. 


아아, 그러나 그런 사치는 언제나 가능하려는지. 나도 혼자라도 좋고, 누군가와 같이 가도 좋으니 교토에 다시금 방문하고 싶다.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의 시센도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도 다이애나 비와 찰스 왕자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싶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커피를 마시고 남이 해주는 아침을 먹으며 구석에 내팽개쳐두었던 기억들을 꺼내 찬찬히 보고 싶다. 그런 상상조차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지는 지금, 지금은 그저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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