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엄마랑 순례길 - 스페인 성당에서 울리던 엄마의 독서 낭독
10월 29일
프랑스길 Astorga - Rabanal del Camino 20km
비록 어제 기분 나쁜 일도 있었지만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은 기운차게 라바날 델 까미노로 향한다.
오늘은 일요일.
인터넷의 카미노 카페에서 한국인 신부님이 아스토르가에서 20km 거리의 라바날 델 까미노에 계시고, 그곳에서 미사를 진행하신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른 시간부터 발걸음을 재촉한다.
워낙 이른 시간에 출발한 터라 깜깜한 아스토르가를 떠나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 나름의 아쉬운 맛이 여행의 일부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아름다운 아스토르가의 성당을 한번 더 눈에 담고 새벽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면서 엄마는 묵주기도를 바친다. 묵주기도를 하면 하염없이 시간이 잘 가기도 하고, 본당에서 주기적으로 세 개의 신비를 돌아가며 지정해주기도 해서란다. 엄마가 혼자 바치는 묵주기도에 나도 합류한다. 각 단이 무엇이었는지 까먹었지만 아직도 성모송이나 영광송 같은 기도들은 자동응답기처럼 자연스레 나온다. 엄마와 함께 묵주기도를 암송하며 길을 걷는다. 요 며칠 계속 눈에 띄는 중년의 브라질 단체 순례단들도 그들의 언어로 묵주기도를 마치는 모양이었는데, 우리의 기도 소리를 듣더니 눈을 찡긋하며 인사한다.
동녘에서 해가 떠오를 때쯤 만난 마을의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한다. 그때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먹이를 주지나 않을까 하고 우리 주위를 맴돈다. 아무리 애교를 부려도 영 소득이 없자 빈 의자에 가 앉아 그루밍을 한다.
그루밍하다 사진 찍으니 쳐다보는 고양이.
솔직히 말하면 순례하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은 우리 집 고양이 씨옹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씨옹이에게있어서 나는 서열 아래의 관심 없는 인간이지만 내 안의 고양이 순위는 단연 씨옹이가 1위. 내 열렬한 씨옹이에 대한 그리움은 프랑스 스페인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다시 불타올랐다.
하늘이 너무 쾌청하다. 이건 위험한 징조다. 오늘 낮에는 아주 뜨겁고 더우리라. 미사 시작시간도 시간이지만 반드시 정오 전에는 도착해야 우리의 정수리가 불타오를 일이 없을 것 같다. 발걸음을 더욱 재우친다.
길을 걷다 보니 철망에 나무 십자가들이 잔뜩 걸려 있는 곳을 지난다. 사람들이 각기 지고 사는 십자가들을 생각한다. 내가 내려놓을 십자가와 엄마가 내려놓은 십자가들, 그리고 앞으로 지고 가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중간에 잠시 벤치에 걸터앉아 간식을 먹고 우리는 그야말로 라바날 델 까미노까지 정말 열심히 걸었다. 그 덕분인지 오전 11시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이제 20km 정도는 4시간 반 정도로 걸을 수 있는, 걸음이 아주 빠르고 날랜 엄마 덕분이기도 하겠다.
신부님이 알려주신 알베르게에 짐을 푼다. 우리가 1등인 모양이다. 다행히 가방은 미리 도착해있었다. 가방을 놓자마자 엄마와 나는 미사를 드리러 간다.
카톡으로 미리 인사드렸던 신부님과 다시 인사를 한다. 이 먼 땅의 시골 성당에서 한국인 신부님을 만나니 기분이 묘하다. 미사를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침에 함께 출발했던 브라질 순례단이 미사를 드리러 들어온다. 눈인사를 나눈다.
그때 신부님이 나에게 제 2 독서를 요청하신다. 나는 전례부 활동을 한 지 너무너무 오래되었던 지라 걱정이 되어 손사래를 쳤다. 대신 요 수년간 전례부로 일주일에 두세 번씩 미사 전례를 담당하고 있는 엄마를 추천해 드렸다. 엄마는 부끄러워했지만 약간 막무가내인 내가 더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그렇게 엄마는 제 2 독서를 담당하게 되고 미사 직전에 급하게 연습을 하신다.
엄마가 연습했던 독서 2.
그렇게 미사가 시작되고 말씀 전례가 이어진다. 드디어 엄마 차례인 독서 2. 엄마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성당을 울린다. 몇 번 들어서 익숙한 목소리지만 이 곳에서 듣는 엄마의 독서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왠지 내가 다 뿌듯하다. 무음으로 사진을 찍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둔다. 엄마의 짧고도 긴 독서를 바라보며 그 시간 자체를 만끽한다.
미사가 끝나고 실수가 있었다며 부끄러워했지만, 이 시간이 엄마에게도 기쁨으로 다가간 모양이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만족스러운 미소로 우리 가족 5명을 위한 초를 바치고 성당을 나섰다.
바깥에 나가니 신부님에 계셔서 인사를 하고 함께 기념사진도 찍는다. 신부님께서는 함께 말씀 나누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떤지 제안하셨지만, 우리의 차후 여행 일정도 있고 해서 정중히 거절한다.
미사도 끝났겠다, 밥을 먹을 시간이다. 신부님이 추천한 성당 너머의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겉에서 보았을 땐 작아 보였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꽤 넓은 실내를 자랑한다. 엄마와 나는 오래간만에 순례자 정식이나 간단한 음식 대신 메뉴 델 디아를 즐기기로 한다. 아빠가 주신 용돈 찬스를 쓸 때가 온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러운 점심식사. 엄마의 고기는 맛있었으나 내 고기는 약간 누린내가 났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맛은 나름 괜찮았다.
그 뒤 알베르게로 돌아와 샤워도 하고 빨래도 맡긴다. 시간도 남겠다 빨래집게나 먹을 것 등등을 사러 동네 슈퍼로 간다. 그 길에서, 카스트로헤리즈에서 함께 묵었던 캐나다 소방관 청년을 마주쳐 인사를 나눈다. 보아하니 우리가 묵는 알베르게에서 묵을 모양이다. 엄마는 이 청년이 어쩜 그리도 이쁘게 생겼냐며 감탄하신다. 솔직히 너무 웃겼지만, 애써 참았다. 엄마, 저 녀석 여자 한두 명한테 전화하는 게 아니던데요..? 하하
보아하니 오늘 이 알베르게, 한국인 총집합이다.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서 처음 만난 젊은 부부가 우리 옆 침대. 레온에서 마주쳐서 계속 신경 쓰였던 한국인 젊은 청년 둘과 누가 봐도 친구들끼리 온 것 같은 청년 셋. 이 전부가 우리가 묵는 알베르게에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이 모두 모여 맥주 한잔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순례길 이야기가 나온다. 레온에서 마주쳐서 신경 쓰였던 젊은 청년 중 하나. 이 청년은 피레네를 넘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한숨을 내쉬며 웃는다. 나와 엄마의 순례길에 대해 묻길래 내 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준다. 르퓌 길에 대해서 듣더니 그 청년, 고개를 젓는다. 자신이라면 그런 비싼 예산을 들여서까지 그런 길은 걷지 않겠단다.
저렴한 예산으로 많은 곳을 다니는 여행이 좋다는 건 알겠지만, 남이 하는 여행이 잘못되었다고 훈수를 둘 것 까지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불쑥 내 안에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둔다.
내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이리도 좁고 내가 완벽한 인간이 아닐진대, 저 이에게 내 의견을 이야기해봤자 그가 그의 생각을 바꿀 것도 아닐 게다.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는 스스로밖에 없으니까. 내 기분이 언짢은 걸 눈치챈 엄마는 나에게 맥주를 더 주고(엄마는 내 기분을 푸는 요소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빨래를 널러 가자신다.
길게 늘어져가는 햇빛 아래에서 엄마와 나는 빨래를 넌다. 그리고 늦은 저녁, 주방에서 밥을 해 식사를 한다. 거의 죽 같은 밥이지만 이렇게 꿀맛이 아닐 수 없다. 밥이 좀 남을 것 같아 젊은 부부에게도 식사를 권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어서 기분이 좋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 알베르게는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많고, 워낙 크기도 하고, 천장도 너무 높아 소리도 울릴 것 같다. 문 바로 앞의 캐나다 소방관 청년이 잘 못 잘까 봐 걱정하던 엄마는 이내 잠에 빠지신다. 나도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