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이라는 게 있나? 내게 이별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지독하게 뜨겁거나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나는 연예 기사면에 종종 등장하는 ‘좋은 동료 사이로 돌아간다’는 투의 말이 우습다. 사랑했던 사람과 서로의 건투를 빌어줄 수 있는 이별이란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마음을 조절할 수 있을 만큼만 서로를 좋아했다든지, 나이를 무척 많이 먹고 호호할머니가 되어 누군가와 잠시 연인 사이로 지냈었더라면. ‘오픈 릴레이션쉽’의 연애방식을 상호간의 합의하고 지속한 관계라면.
그런 특이한 상황을 제외한다면 나는 상상 속에서도 그 누구와 쿨하게 이별할 수 없다. 이별은 늘 그랬으니까. 정신 차리지 못 할 만큼 온몸을 뒤 흔들어 놓고 태연하게 멀어지곤 했으니까.
그 중에서도 참 서툴고 서툴렀던, 나의 가장 순수한 시절의 연애. 그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에게 ‘그 사람’이란 생각만 해도 험한 말이 동반되는 존재다. ‘쓰레기’였고, ‘똥차’였으며, 길에서 만난다면 기어이 눈알 빠지도록 노려보기라도 할 사람.
그 사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었다. 처음 느껴 본 연애 감정은 사람을 하루종일 각성 상태로 만들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것, 내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것. 그 진부하고도 고전적인 표현을 모두 갖다댈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망치는 것을 모두 허용했다. 표준 체중보다 조금 덜 나가던 내게 살을 빼라고 하면 굶어서라도 뺐더랬다. 내 옷차림과 화장법을 간섭하고, 나를 은은하게 무시하던 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견뎠다.
그는 데이트 약속을 꼭 지네 집 앞에서 만나도록 잡았다. 버스를 한 번 환승해서 50분을 가야하는 거리. 난 하이힐을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로 그 거리를 갔었다.
데이트 비용을 70% 이상 내가 부담했고, 아깝지 않았다.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들. 내게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을 모두 등지고 그 사람만 봤다. 내가 그러는 동안 그는 단 한 순간도 나와 같지 않았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보다 더 답답한 건 과거의 나였다.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녔을까. 답은 간단했다. 사랑했으니까.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할만큼, 그가 좋았으니까.
그 어여쁘고 찬란하던 시절을 모두 그에게 바치고도, 결국 버려진 것은 나였다. 그는 소위 말하는 환승연애를 했고 그 사실을 안 뒤 얼마 간 폐인처럼 지냈다. 헌신하다가는 헌신짝 된다는, 나는 아닐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 말이 정통으로 와 닿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 이별은 앓던 이를 빼어낸 것처럼, 내게 더 후련한 내일을 데려다 주었다. 결국 나는 지금의 나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환승연애를 했던 이와 헤어지고 두어번 또 다른 연애를 했다. 그 사이로 술 주정처럼 내게 연락을 해 오는 일이 많았다.
그의 말을 옮겨보자면 ㅡ우습지만ㅡ이러했다. 우리가 그 순수한 시간을, 오래 만났는데 연인 사이는 끝났어도 가끔 안부를 물으며 지낼 수는 있지 않을까? 그 말을 듣고는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연결이 닿을만한 모든 수단을 차단하고 나서야 그는 주사를 멈췄다.
그런데 그가 결혼을 한다고? 나는 아주 작은 미련도 없는, 순전한 호기심으로 그의 SNS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비 부부의 형태를 갖춘 두 사람을 보았다.
여자는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 내가 그랬듯. 그리고 그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는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얼굴과 말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변했듯 그도 변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예물 반지를 나눠낀 채 다가올 미래를 설레게 기다린다.
한 때는 그를 저주하기도 했다. 마음으로 오래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모든 것은 퇴색되었다.
나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다른 이와 영원을 약속한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에게도 좀 그렇게 애써주지, 하는 아쉬움과 저 여자한테는 충실하게 잘해라. 하는 마음.
그와 나는 최악의 이별을 했었고, 떠올리기 힘들만큼 나 스스로가 가여웠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모든 것은 사라졌다. 나를 몇 번이나 절망케하던 사랑도 이별도 미움도 질투도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내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나’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놓지 않는다면 최악이었던 이별도 모두 지나가버린다. 나의 지금처럼.
그의 소식을 들어도 내 중심이 전혀 흔들리지 않을 삶이, 기어코 온다.
그러니 이별이 당신을 너무 오래 갉아먹지 않도록, 짧게 아프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