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한창 일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자 마자 꺽꺽 대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앉아있기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제자리를 맴돌며 대화를 시도했다.
"정블리. 무슨 일이야? 울면서 이야기하면 엄마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엉엉... 어떤 형아가... 엉엉... 나를... 세게 밀었어... 엉엉... 그래서 내가 넘어졌어..."
"지금 어디야? 학원 선생님은 어디 계셔?"
"너무 무서워서 지금 학원 밖으로 나왔어... 엉엉... 엄마가 데리러 와 주면 안돼?... 엉엉..."
이야기를 들어보니 2학년 형아가 탈의실에서 아이를 밀었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옆에 있던 친구에게 너도 밀으라고 시켜서 우리 아이는 두 번이나 넘어졌다고 했다.
누가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나.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당장 달려갈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차를 타고 출발해도 4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내가 지킬 수 없다면 누가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나. 학원 선생님과 당사자인 우리 아이. 이렇게 두 명을 떠올렸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조금은 단호하게 말했다.
"정블리가 정말 힘들었겠다. 너무 무섭고 기분도 상했겠다. 엄마는 듣기만 해도 너무 슬픈데. 우는 정환이가 이해가 가."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서 말했다.
"엄마가 지금 당장은 데리러 갈 수 없어. 그럼 지금은 누가 정블리를 지켜야 해?"
아이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흑흑... 내가..."
아이가 안쓰럽고 이 상황이 서글프지만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맞아. 우리 정블리가 잘 아네. 지금은 정블리가 정블리를 지켜야 할 때야. 스스로 지켜야 해."
아이가 해야 하는 일을 단호하게 말해 주었다.
"아무도 정블리를 다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할 수 없어. 이런 일은 선생님께 꼭 알려야 해. 엄마가 학원 선생님께 전화드릴테니, 정블리가 가서 학원 선생님에게 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야 해. 할 수 있겠어?"
아이가 조금 더 슬프게 울었다.
"아니, 못하겠어. 무서워서 못 들어 가겠어..."
아이를 다시 설득했다.
"정블리. 엄마랑 통화 하면서 들어가자. 들어가자마자 학원 선생님께 가면 그 형아가 정블리한테 못 올거야."
"엉엉...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옆에서 손을 잡고 토닥여 줄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슬펐다. 마음 같아서는 학원 문을 박차고 들어가 눈을 부라리며 그 학생을 찾아내고 싶었다.
"정블리. 오늘 학원 수업은 안해도 돼. 하지만,다시 들어가서 선생님한테 말씀은 드려야 해. 엄마가 얘기 해놓은 테니까, 정환이가 학원으로 다시 들어가기만 하면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실 거야."
해맑게 웃는 아이를 꽈악 안아주었다.
학원 선생님과 아이들이 다행히 이야기가 잘 되었다. 사과를 받았고 재발방지 약속도 받았다. 다행히 지속적으로 괴롭힌 건 아니었다. 학원으로 들어가 사과를 받고 나니 기분이 풀린 아이는 그날 학원 수업을 듣고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제야 다시 일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퇴근을 했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다. 내가 일을 해서 아이를 바로 도와주지 못한 건 아닐까 생각하니 너무 미안해졌다. 지금은 아이가 기분을 풀었을까? 학원 수업에 흥미를 잃었으면 어쩌지?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집에서 그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학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다.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오는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도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꾹 참으며 심호흡을 했다. 아이가 힘들었던 만큼 한 뼘 더 성장했겠구나 싶은 마음에 대견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편으론 세상 속 그늘과 걱정은 모르고 자랐으면 했는데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다.
아이를 꽈악 안아주었다. 힘껏 안고 쓰다듬으며 말해 주었다.
"우리 정블리 원래도 멋진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해. 무서운 상황에서 다시 돌아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용기내 줘서 정말 고마워. 무섭지만 참고 행동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아무나 할 수 없는 씩씩하고 용기있는 일이야."
아이의 뿌듯한 표정을 보니 이번에 겪은 아이의 두려움과 눈물이 의미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정블리 키도 더 커진 것 같고, 더 단단해 진 것 같아. 오늘 이 일로 정환이 마음도 정말 튼튼해졌을 거야. 어때, 지나고 나니 별거 아니지? 그 형아가 이제 괴롭히지 않을 것 같지?"
"응. 형아가 사과했어. 그리고 나서는 나한테 오지 않더라."
"정말 애썼어. 기특하다, 우리 정블리. 씩씩하다, 우리 정블리."
내가 당장 달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가 한 뼘 성장할 기회가 생긴건가 싶기도 하다. 옆 건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면, 아마도 지체없이 내가 달려가고, 학원선생님과 대화할 때도 내가 옆에 서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아이에게는 든든한 엄마였겠지만, 아이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기회는 사라졌을 것이다.
무섭고 두려웠지만 참고 해냈다는 것.오늘의 경험이 아이의 인생을 위한 값진 마음 예방접종이었기를. 더 힘든 일이 와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