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영도의 공간만 잘 활용한다면!
어느날 갑자기 지구가 종말의 위기에 처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거대한 자연 재해
대량 살상 무기
대규모 전염병
소행성 충돌
외계인 침공
로봇의 반란
뭐 이런 이유들로 말이죠.
자, 대부분의 인류와 동식물이 멸종했고 소수의 인간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인간은 농경사회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문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거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멸종해버린 동물과 식물은 어떻게 해도 되살릴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식물이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동물이 없으니 사냥을 할 수도 없습니다.
문명은 커녕 짧은 생존도 어려울 겁니다
멸종은 이래서 무서운 겁니다.
회복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니까요.
그리고 끔찍하게도, 멸종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굳이 지구 종말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아도 말이죠.
멸종에는 대비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거대한 ‘씨앗 벙커’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각종 식물의 씨앗을 멸종하기 전에 미리 지하 깊숙한 벙커에 보관해 놓는 겁니다.
씨앗만 있다면 어떻게든 식물을 다시 길러낼 수 있고
멸종된 종도 다시 복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벙커를 ‘시드볼트’라고 부릅니다
시드볼트는 전세계에 딱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스발바르에,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에 있죠
시드볼트는 그야말로 완벽한 요새입니다
두꺼운 콘크리트와 철문이 진도 6.0 이상의 강력한 지진이나 핵폭발로부터 씨앗을 보호하고,
내부는 언제나 영하 20도를 유지해 씨앗의 발아와 손상을 막습니다.
전기가 끊겨 냉각 장치가 가동되지 않는 상황이나 빙하가 모두 녹아 지구가 바다에 잠기는 상황에서도
씨앗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재앙은 종종 인간의 상상을 벗어나곤 합니다.
상상도 못한 지진
상상도 못한 핵전쟁
상상도 못한 기후변화가 일어날 수 있죠.
그때에도 시드볼트가 완벽하게 안전할 수 있는지는 100% 확신할 수 없습니다.
더 안전한 벙커는 없을까요?
그렇다면 달은 어떤가요?
황당한 소리 같지만, 논문까지 나온 진지한 연구입니다.
달은 대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도 없구요.
지구에서 핵전쟁이 일어나도 달까지 휘말릴 일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온도입니다.
달의 남극 지역엔 해가 들지 않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곳의 온도는 영하 196도 이하로 일정하게 유지됩니다.
시드볼트에서는 영하 20도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각 장치를 끊임없이 가동시켜야 하고,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는데
달에서는 그냥 가만히 놔둬도 영하 196도의 온도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이정도의 낮은 온도에선 모든 세포가 생물학적 활동 자체를 중단합니다.
늙는 것 마저도 중단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냉동 보관이죠.
그래서 연구팀은 달에 동물의 피부세포를 보관하자고 제안합니다.
후에 피부 세포로 동물을 재복원시키는 연구가 완성이 되면
달에 보관되어 있던 세포를 가져다가 지구에서 살려내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요.
다만 우주에 존재하는 다량의 방사선을 막을 방법이나
지구에 비해 낮은 중력이 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선 아직 연구된 바가 없기에
이 방법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더 조사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연구팀은 일단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실험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하는군요.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한 간절한 노력들을 보면서
사라지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새삼 선명하게 다가오는 연구였습니다.
참고 논문 : Safeguarding Earth’s biodiversity by creating a lunar biorepository (Bioscience, 2024)
참고 논문 : Lunar Pits and Lava Tubes for a Modern Ark (IEEE Xplore, 2021)
참고 뉴스 : Scientists Suggest Freezing Endangered Animals' Cells and Preserving Them on the Moon (Smithsonian Magazine,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