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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바 Dec 03. 2023

같이 일하면 안 싸워요?

    병기는 말이 별로 없다. 과묵한데 무겁지는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내 옆에서 말없이 지켜본다. 그러다 필요한 걸 챙겨준다. 내가 쿠키를 만들고 있으면 재료를 계량해 옆에 슥 놓아두기도 하며, 아이들 데리러 가는 길에 마시라며 따뜻한 차가 든 텀블러를 가방 속에 넣어준다. 그럴 때 나는 그가 내 몸의 연장이 된 느낌이 든다. ‘몸이 두 개면 좋겠다.’ 할 때 바로 그 몸 말이다.

    작년에는 첫째가 돌보기로 약속하고 집에 수족관을 들여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흥미를 잃었고 어느새 아이 대신 병기가 수족관 물을 갈아주고 가재 밥을 주고 있었다.

    “당신이 다 해주니까 안 하는 거야.” 내가 핀잔주듯 말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런가? 하다 보니까 재밌어져서…… 난 괜찮아.”

    그러면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낸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날 나는 집에서 매운 소스가 뿌려진 라면을 뜯고 있었다. 나는 매운 음식을 먹으면 항상 배가 아팠기에 병기는 나를 말렸다. 나는 죽기야 하겠냐며 라면에 물을 부었다. 나는 그날 위가 뒤집히는 통증을 느끼며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평소에는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고통이 컸다. 119를 부르자고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먹지 말라는 매운 라면을 먹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것이 아무리 봐도 볼썽사나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통스럽다고 울면서 병원은 안 간다고 손사래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기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소리쳤다.

    “이거 한 번만 더 먹으면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고? 기묘하다. 서울 사람이 사투리를 따라 할 때 특유의 찰짐이 없는 것처럼 그의 화도 내게 그렇게 들렸다. 입이 험한 10대 남자아이들이 저들끼리 놀면서 쓸 법한 말이었다. 거기다 그가 선을 살짝 넘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을 제쳐두고 그가 그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뜻밖에 짜릿함을 느꼈다그 순간 그는 나의 연장이 아닌 그 자신으로 존재했다. 평소의 우유부단함과 다른 매력이 더해졌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그를 잃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버릴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서 같이 일하면 싸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당황했다. 싸우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상적인 부부를 연상시킬 것 같고, 왜 싸우지 않는지(그리고 못하는지)를 말하는 일은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울에서 그에게 프랜차이즈 점장을 그만두고 경주로 내려가 표고 농사를 하자고 했을 때 (적잖은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그는 따라주었다. 그러다 표고 농사도 그만두고 빵집을 차리자고 했을 때 (적잖은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그는 따라주었다. 월세 15만 원짜리 시골 점포에서 교외의 100만 원짜리로 옮기고 공동체를 만들 거라며 일을 벌였을 때도 (적잖은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그는 따라주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다며 가게일은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다닐 때도 그는 보내주었다(이 모든 건 적잖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가 ‘결국’ 따라주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두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 테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려 한다는 그 말을 나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의심해서는 안 됐다.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을 쟁취해야 했고 욕심내야 했다. 나는 일을 벌이고 정리하고 벌이고 정리하며 실험하는 삶을 살아냈고 병기는 그런 나를 곁에서 지원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그를 혼자 일하게 두었다. 그는 일하기 싫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일이 그의 숙명인 것처럼 보였고, 일할 수 있어 기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일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근면성실 덕분에 굶어 죽을 걱정 없이 인생 실험에 몰두했다. 그때가 내 나이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가 둘 있었다.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엔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된장국은 어떻게 끓이는지, 돈은 왜 버는지, 싸운 뒤 화해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우리에게는 병기가 표고버섯과 빵을 팔아 벌어다 주는 돈이 있었고 빚(학자금, 주택 대출..)이 없었다. 나는 배울 시기의 아이처럼 다른 책임들에서 한 발 물러나 배움에 몰두했다.

나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잘 키우고 싶었다. 육아, 놀이, 배움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 아이들이 주체성을 갖고 스스로 배우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원했고 그러려면 나부터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을 다른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성취”라는 랄프 월드 에머슨의 말을 [교육]이라 표시된 노트에 적어두고 아내, 엄마, 일하는 사람 이전에 나는 어떤 존재일까 파고들었다.

    그 후엔 책을 덮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섰다. 모임을 주최하고, 요가를 배우고, 거리에서 환경보호를 외치고, 활자를 떠나 사람을 만나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이 시기에 나는 가게를 의도치 않게 신비주의 컨셉으로 운영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지 않았고, 내가 가게에 머무는 날이 드물었다. 만일 내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자연에 매료되어 숲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나를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처럼 훌륭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모를까). 나는 사람에 매료되었다. 사람이 재밌어서 나는 늘 사람 속에서 사람을 관찰했다. 사는 모습, 말과 행동이 저마다 다양하고, 아름답기도 추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나를 비추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람 속에 있을 때야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선명해졌다. 기쁜 날은 기쁜 날 대로 슬픈 날은 슬픈 날 대로 머리와 가슴이 뜨거워졌다. 통찰이 폭발했고, 나는 매일 같이 병기에게 달려가 내가 얻은 깨달음을 독에 쌀 채워 넣듯 쏟아냈다. 그러면 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실적 좋은 보고서라도 받은 양 의기양양해져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병기의 (과도한)배려심이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해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 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제일 먼저 그에게 말했다. 내가 ‘아이디어’면 그는 ‘실행’이었다. 내가 갓 입사한 신입의 열정으로, 좋아 보이는 것들—아이디어—을 그의 책상에 잔뜩 쌓아놓으면, 그는 실행이 불가능(특히 재정적으로)하다고 나에게 통보했다. 그럴 때 그는 괴로워했다. 거절당한 내가 “왜 맨날 안 된다고만 해!”라고 쏘아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는 나에게 화내지 않았다. 되려 미안해했다. 더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자였다면 다 들어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늘 붙어있으면서도 싸우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의 모와 홈에, 장점과 결점에, 수치심과 수치심에 기막히게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9년, 가게를 연지 6년, 실험을 시작한 지 8년 즈음되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가게로 돌아가서 일을 하자, 마음먹었다. 돌아온 탕자였다.


    돌아온 후 나는 그처럼 새벽에 일어나 빵을 만들었다. 새로운 메뉴를 만들고 그동안 손 놓았던 가게 홍보도 다시 시작했다. 신경 쓰는 만큼 매출이 올랐다. 그는 나의 복귀에 기쁜 내색이었다. 바쁜 오픈 준비를 마치고 잠깐 커피 한 잔 하며 우리는 늘어난 매출을 축하했다. 커피를 홀짝이던 그가 입을 뗐다.

    “혼자 일해서 외로웠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그의 말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말에는 그런 힘이 느껴졌다. 외로웠구나. 나는 몰랐다.

    그는 내게 엄마 같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를 떠올려 보면 엄마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시기는 나밖에 모르는 유아기적 사고를 할 때였고, 아직 엄마라는 존재가 가진 복잡성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여직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그는 요구하지 않았다. 자기 일만 묵묵히 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는데, 그는 울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배우고 애 키우느라 시야가 좁았고, 그는 나를 돕느라 정신없이 뛰었다.

    그는 느림보상점의 제빵사이며, 동시에 나의 남편이고, 나의 사회적 부모이다. 또 그는 제법 운 좋은 투자가이기도 한데, 종종 이 모든 게 자기의 바라지 덕분이라고 생색을 낸다. 물론 그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받은 보상에 행복해할 때 나는 반만 웃는다.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의심한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곁에 있을 차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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