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나라에서 오신 손님들
외국인 대상 쿠킹 클래스를 시작한지 벌써 3년차에 접어 들다보니 푸에르 토리코, 룩셈부르크 등등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여행오신 손님들을 만나면서 이제는 어떤 나라도 처음 온 손님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전 카자흐스탄 손님들의 예약이 들어왔다.
예약을 받고 나의 쿠킹 클래스 파트너인 친정 엄마께 말씀 드렸더니, "카자흐스탄? 우리 카자흐스탄 손님은 첨이다~ 그치?" 하신다. 맞다. 처음인데다, 직감적으로 혹시 고려인 아닐까 싶어 손님의 프로필 사진을 봤는데, 그런것 같았다. 예약일이 다가올수록 그 분들의 음식이, 삶이, 언어가, 다 궁금했다.
10여년 전, 유네스코에서 주관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본인의 나라에 대한 초중고생 대상 국제이해 수업에서 통역 자원봉사 교사로 몇년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우즈베키스탄 수업 통역을 하게 되면서, 까레이스키와 1937년 고려인 강제 이동에 대해 나 또한 새롭게 알게 됐고, 초겨울 이미 혹독한 추위속 한달동안 달려온 기차 화물칸에서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툭 내려진 수십만의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뭐라 말 할 수 없는 먹먹함이 느껴졌었다. 일본의 지배 당시 연해주로 건너가 살 고 있던 수 십만의 사람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것을 염려한 스탈린의 명령으로 하룻 저녁 난데없이 좌석도 없는 가축, 화물을 싣는 기차 칸에 올라야 했고, 그렇게 도착한 추운 벌판에서도 마음대로 이동도 못했다고 했다. 잘 못 한 일이 없는데 죄수처럼 살아야 했다는 한 증언이 그 상황을 다 설명한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 기차에서 내려 정착한 우슈토베 지역" by Базарбеков Ғалымбек under CC BY-SA 3.0
80년전 바로 그 기차에서 내린 분들의 3대 후손들이, 오늘 나의 주방으로 오셔서 함께 불고기, 잡채를 요리하고 순두부찌개를 끓였다. 마늘을 다지고 당근을 채썰면서 손님 중 한 분의 손녀가 다음달에 돌잔치를 한다고 하셔서, 우리의 돌잡이 문화 얘기를 해 드렸더니 신기해 하시며 본인은 손녀 돌상 위에 돈만 올리고 싶단다. 사람 마음이 다 같은가보다.
요리 도중, 옆에서 반찬을 준비하시던 엄마가 집 된장을 꺼내시는걸 보고 그 분들이 조금씩 찍어서 맛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본인들 할머니 된장 맛이란다. 또, 마켓 투어를 하면서 김장 문화를 말씀드렸을 때엔 이 분들도 김장철이 있는데 10월 쯤이라고 하시면서도 우리의 김치냉장고라는걸 너무 궁금해 하셔서 집에서 보여드렸다. 이 분들이 김치를 '짐치'라고 하신다는 얘기를 들으신 엄마가, 옛날 엄마의 할머니도 김치를 짐치라고 하셨단다. 또, 어떤 전통 과자를 설명하시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보여주시는 사진을 보니 우리의 유과와 비슷한데 겉에 쌀튀밥이 붙어 있지 않은 유과였다. 8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먼 나라에서 김치를, 된장을, 유과를 먹고 있는 분들을 보니, 순간 역사속 장면들과 현재가 중첩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잡채를 볶으면서 볶음 주걱과 젓가락으로 당근, 양파, 쇠고기를 볶는걸 보여드렸더니 이 분들이 막 웃으시면서 일단 젓가락질을 배워야겠다고 하신다. 젓가락질을 배워야 한다고? 그럼 밥은 뭘로 드시냐 했더니 숟가락과 포크만 사용해서 젓가락은 한 번도 써 본적이 없으시단다. 김치도 포크로 드신다는걸 알았다. 요리가 다 끝나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숟가락과 젓가락만 준비했던 상에 부랴 부랴 포크들을 갖다 드렸다.
또 이 분들이 식사하시면서 대화 나누는 언어가 카자흐어라고 생각했는데, 러시아어라고 하시며 고려인들은 주로 카자흐어는 잘 모르고 러시아어만 하신다고. 한국어는 아예 못하지만 요즘엔 한국 드라마 덕분에 한국어를 좀 알게 됐다고 하신다. 본인들의 할머니들도 한국어는 조금만 하실 수 있고, 몇년 전에 할머니가 한국에 처음으로 오셨었는데, 할머니 고향은 북한이어서 고향은 못가셨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고 자란 고향에 평생 가지 못하고 러시아어를 하며 사신 그 분들의 인생은 그 자체로 다큐멘터리다 싶었다. TV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대신, 한국의 청년들이 그 분들을 가서 만나고 그 인생 이야기들을 음악, 웹툰, 전시, 영상 등등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 보는 프로그램이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 역시 그 동안 TV에서 고려인들에 대한 여러 다큐멘터리들을 봐 왔지만, 오늘처럼 많은 생각과 감정이 일어난 적은 없었던 듯 하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다식을 만들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 분들은 연령대가 다 다른데 어떻게 만난 사이일까? 함께 온 손님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절대 먼저 묻지는 않는다는게 내 철칙이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 룰을 한 번만 어기기로 했다.^^ 내 질문에 넷 다 웃으시면서, 서로 다 모르는 사이인데 이번 여행을 함께하려고 만났단다. 한 분이 유명 블로거이고 다른 분들은 그 분의 인스타그램 팔로어인데, 그 분의 여행 계획과 제안을 보고 만났단다. 세상에나. 순간 깨달았다. 내 고정 관념을. 사실 이 분들을 만나기 전까지 내 머릿속의 고려인은 황량한 벌판에 기차에서 내려져 악착같이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교육시킨 분들 까지만 저장되어 있었나보다. 인스타그램으로 만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의 요리, 찜질방, 시장 등등을 체험하러 함께 여행을 온 그녀들이 내 고정 관념을 시원하게 깨 주셨다.
티타임까지 마치고 나가시기 전에, 모두들 엄마와 큰 허그를 하셨다. 그리고 지하철 역 까지 가면서, 오늘 정말 여러 감정이 느껴진 좋은 추억이 남았다고 하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