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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나니 찰리 Jun 18. 2017

호러의 계절이 돌아왔다(상)

공포영화 연대기

호러의 계절이다. 예전에는 여름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전조(?)가 있었다. 여름 특선 메뉴로 등장하는 팥빙수와 극장 스크린에 걸리는 호러 영화가 그것이다. 사시사철 빙수를 파는 디저트 전문점이 생겨나고, 호러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옛말이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 장르는 여름에 즐겨야 제맛이다. 


사람들은 왜 호러 영화를 관람하고, 공포 소설을 읽을까. 기꺼이 돈을 내면서까지 공포에 떨고 유쾌하지 않은 정서를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그냥" "재미있으니까" 같은 성의 없는 대답으로는 부족하니 전문가 한 분을 이 자리에 모셔볼까 한다. 

"공포영화는 의식이 있는 채로 꾸는 꿈과 같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를 산산이 폭발시켰을지도 모를 압력을 무사히 배출할 수 있다." 

'호러의 킹' 스티븐 킹의 말이다. 지금껏 3억5000만부 이상을 팔아치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영화 '쇼생크 탈출'과 '샤이닝' '미저리' 등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그의 전공 분야는 바로 공포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논픽션 '죽음의 무도'(황금가지)에서 우리가 호러 장르에 매료되는 이유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공포 이야기를 읽고 보는 까닭은) 본질적인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자신의 감정을 재확립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허구의 공포 속으로 피신함으로써 현실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 익숙한 침실 풍경에 안도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즉, 우리 모두)이라면 공감하리라. 

왜 보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면 이제 무엇을 볼 것인지 결정할 차례다. 호러 영화의 계보를 살펴보면서 놓쳐서는 안 될 작품들을 소개한다. 


미국의 에디슨 컴퍼니(짐작했겠지만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설립한 영화회사다)에서 제작한 J 설 다우리 감독의 1910년 작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호러 영화다. 10분 남짓한 러닝타임의 무성영화로 1994년 원본 필름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전설 속의 영화' 정도로 여겨졌다. 1920년대 전후 독일에서 번성한 예술사조인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년)과 '노스페라투, 공포의 교향곡'(1922년) 같은 걸작 공포영화들이 등장했다. 

암울한 시대는 걸작 탄생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1950년 미국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은 돈 시겔 감독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6년)에 묘사된 불안감과 공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인간의 형체를 모방하는 외계 생명체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표정도 감정도 없는 '무언가'로 대체된다는 공포는 반공주의 마녀사냥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잭 피니의 소설 '바디 스내처'는 많은 작품에 모티프를 제공했다. 개인적으로는 하이틴 공포물로 재해석한 1999년 작 '패컬티'와 존 카펜터 감독의 명작 '더 씽'(1982년·국내 개봉명 괴물)을 추천한다. 

1960~1970년대는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호러 영화들이 등장한 시기다. '좀비의 대부' 조지 A 로메로 감독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으로 좀비를 공포 영화의 주역으로 부활시킨다. 좀비 장르는 잠시 슬럼프를 거쳐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년)와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2004년)로 다시금 주목받게 된다. 장르 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가 1978년에 내놓은 '핼러윈'(1978년)은 잔혹한 살인마가 등장해 희생자를 난도질해 죽이는 '슬래셔 무비'의 걸작으로, 제작비는 32만달러에 불과했지만 미국에서만 4200만달러(현재 가치로 1억4000만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가면을 쓴 살인마가 젊은이들을 무차별 살인한다는 내용을 충실히 따른 작품들은 1980년대 극장가를 휩쓴 '13일의 금요일'(1980년) 시리즈와 '나이트메어'(1984년) 시리즈를 비롯해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년),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2008년) 등이 있다. 침체기에 빠져 있던 호러 영화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1996년)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성서의 요한계시록에 근거해 적그리스도의 탄생과 인류 종말의 날을 다룬 '오멘' 시리즈도 유명하다.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해 2편까지만 볼 것을 추천한다. 완벽주의자이자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스탠리 큐브릭도 호러 영화를 남겼다. 스티븐 킹 원작의 '샤이닝'(1980년)은 잭 니컬슨의 소름 끼치는 명연기와 큐브릭의 완벽한 연출이 결합된 걸작이다.

1999년은 호러 팬들에게 한 단어로 기억될 해다. '블레어 위치'다. 2만달러(추정)를 들여 만든 이 영화는 2억4800만달러를 벌어들여 기네스북에 올랐다. '촬영한 사람은 죽고(실종되고) 이후 필름만 발견됐다'는 설정의 가짜 다큐멘터리(모큐멘터리) 호러 영화로 이후 '파운드 푸티지(발견된 영상)'라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파운드 푸티지 영화 중에는 '파라노말 액티비티'(2009년)와 'REC'(2007년) 등을 추천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제임스 완 감독의 '쏘우'(2004년) 시리즈가 엄청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극단적인 폭력과 고문, 신체 훼손 등을 묘사하는 고문 포르노(Torture Porn) 장르를 유행시켰다. 고어(Gore) 혹은 스플래터라는 유사한 장르도 있지만 '쏘우' 이후 쏟아져 나온 높은 수위의 작품과 경향을 놓고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로 정착했다. '호스텔'(2005년)이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2000년) 시리즈가 이 장르로 분류된다. 이쪽 계열에서 프랑스 영화들의 약진을 주목할 만한데 2003년 작 '엑스텐션'과 2008년 작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호러 마니아들조차 힘들어할 정도로 공포의 수위가 높다. 

마니아들의 열광과 평론가들의 혹평을 동시에 받은 '고문 포르노'의 시대가 저물고 호러 영화계는 본질적인 공포와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승부하는 영화들이 주목을 받았다. '컨저링'(2013년) '인시디어스'(2010년) 등이 대표적이다.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미스트'를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 '미스트'(2007년)도 추천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안개가 마을을 습격하고, 대형마트에 고립된 주민들의 갈등이 주된 내용이다. 원작과는 엔딩이 다른데, 영화판의 엔딩은 무척 충격적이다. 스웨덴 영화 '렛미인'(2010년)은 좀 색다른 호러 영화다.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가장 훌륭한 모던 뱀파이어 영화"라고 극찬한 이 영화는 비명이 나올 정도로 무섭다기보다는 서늘한 공포와 외로움을 탐미적인 영상으로 그려냈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1976년)나 영국 출신의 닐 마셜 감독이 만든 '디센트'(2005년), SF 호러 작품 중 독보적인 공포감을 선사하는 '이벤트 호라이즌'(1997년), 공포영화의 장르적 클리셰를 비틀어 변주한 '케빈 인더 우즈'(2012년), 일본 호러의 가능성을 보여준 '링'(1999년)도 놓칠 수 없는 작품들이다. 

영화산업의 초창기부터 함께해 온 중요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말초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호러는 저급한 장르로 취급받아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모습과 작품들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공포에 떨게 만드는 호러 영화의 생명력은 장르의 매력과 가능성을 방증한다. 이제 머릿속 밸브를 돌려 근원적 공포라는 이름의 압력을 배출시키는 일만 남았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적은 제작비로 전 세계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고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장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스티븐 킹의 말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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