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소설 연대기_1편 : 고딕소설에서 펄프픽션까지
호러의 계절이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밤 펼친 호러 소설에 잔털은 삐죽 곤두서고, 식은땀이 마른 자국엔 서늘함까지 느껴진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사위(四圍)에 위화감을 느껴 괜스레 두리번거린다.
과거 여름철 극장가의 주연은 호러 영화였다. 지금은 그 자리를 '성수기 블록버스터'가 꿰차고 있다. 물론 제작비 대비 흥행 신화를 쓴 몇몇 화제작들이 호러 영화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서점가는 다르다. 절대적인 수는 많지 않아도 탄탄한 장르문학의 독자층은 좋은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출간된 전체 소설 분야 도서 10863권 중 3.1%인 341권이 추리·공포·스릴러·미스터리 소설이다. 2007년 212권(2.3%)에 비해 양과 비중 모두 늘어났다.
왜 사람들은 호러 소설에 매료될까. 지금껏 3억5000만부 이상을 팔아치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호러의 킹'인 스티븐 킹은 자신의 평론집 '죽음의 무도'(황금가지)에서 "(우리가 호러 소설을 읽는 까닭은) 인간으로서 열망하는 질서를 재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허구의 공포를 통해 죽음과 무질서를 체험함으로써 일상과 질서의 소중함을 깨치게 한다는 것이다.
호러 소설은 영화보다 무섭다. 두려움에 상상을 보태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 역시 "진정 무서운 존재는 문 뒤에 존재하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문학사학자인 J A 커든은 호러 소설에 대해 "독자에게 충격을 주거나, 독자를 두렵게 만들고 때론 혐오감을 유발하는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한여름 밤에 서늘함을 보태줄 추천 호러 소설을 시대별로 정리해봤다. 한글로 번역된 작품을 우선했고, 책이 절판돼 구하기 힘든 경우에는 별도로 명기했다.
공포소설의 씨가 잉태되다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의 유일한 소설 '오트란토성(The Castle of Otranto, 1764)'은 고딕 소설의 효시로 알려졌다. 낭만주의의 한 사조이자 공포파(恐怖波) 소설이라고도 하는 고딕 소설은 공포와 로맨스 요소가 결합된 장르로 중세 건축물(고딕 양식)의 고혹적이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서 초자연적인 소재와 섬뜩한 상상력을 이끌어냈다. 오트란토성의 폭군 만프레드와 그의 가족이 겪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18~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고딕 소설의 유행을 가져왔다. 환상문학이라는 큰 범주에 속하는 고딕 소설의 흔적들은 지금도 공포, 추리 소설 등 여러 장르 문학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 수상 로버트 월폴 경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월폴은 문학 애호가이자 작가, 정치인 그리고 '고딕 덕후'였다. 런던 교외의 한 저택으로 이사한 그는 자신의 집을 '스트로베리 힐'이라고 명명하고 건물 안팎을 고딕풍으로 증축했다. 이 저택은 이후 고딕 양식의 부활을 이끈 기념비적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는 건축가와 디자이너 등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리모델링 아이디어를 구했는데, 이 모임의 이름은 '취향 위원회'(Committee of Taste) 혹은 '딸기 위원회'였다. (귀여워!!)
공포소설의 원형들
고딕 소설의 계보는 이후 현대 공포물의 원형으로 손꼽히는 19세기 작품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1819),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1866)-로 이어진다. 재미있게도 프랑켄슈타인과 뱀파이어 탄생에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역할이 컸는데, 그와 친구들이 1816년 스위스 제네바 레만 호숫가 별장에 모여서 주고받은 무서운 이야기들을 발전시키고 다듬어 출간한 것이다. (본격 썰 풀다 소설 쓴 썰.txt)
'뱀파이어(The Vampyre)'는 바이런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존 윌리엄 폴리도리가 민담 혹은 미신 속 괴물이었던 흡혈귀를 현대적인 이미지로 재구축한 소설이다. 이후 많은 흡혈귀 소설들이 나왔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다. 치밀한 연구와 조사를 통해 완성된 이 작품은 흡혈귀 장르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흡혈귀는 자신의 관에서 잔다든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든지, 박쥐를 부릴 수 있다든지 하는 '흡혈귀 장르의 공식'이 집대성된 작품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은 영국의 메리 셸리(1797~1851)가 18세부터 쓰기 시작해 21세 나이에 출간한 작품으로 최초의 SF 소설로 꼽힌다. 그는 루이지 갈바니 교수가 개구리 해부실험 중 발견하고 주장한 동물전기 현상(갈바니즘)에서 영감을 얻어, 괴물을 만들어낸 천재 과학자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는 '보물섬'의 작가로 유명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 소설로, 이중인격을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선량한 지킬 박사와 사악한 하이드 씨를 통해 인간 내면의 악의 존재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헐크도 이 작품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스티븐 킹은 '죽음의 무도'에서 이 세 작품을 현대 호러 장르의 근간으로 평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 스스로가 창조한 재앙으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선악이 뒤바뀌는 두려움, 드라큘라는 절대 악으로서 후대 작품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에 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영국의 교육학자이자 영국예술위원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크리스토퍼 프레이링 경은 자신의 저서 '나이트메어: 호러의 탄생'(1996)에서 "(당시의 호러 소설들은) 무대나 스크린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되고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아이콘을 창조했다"고 평했다.
싸구려 잡지, 호러의 요람으로
펄프 잡지(Pulp Magazine)는 1896년 미국에서 시작해 1950년대까지 유행한 싸구려 소설잡지를 뜻한다. 1923년 창간돼 판타지나 호러를 주로 다룬 업계의 전설 '위어드 테일즈'나 1930년부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SF잡지 '어스타운딩 스토리즈'가 대표적인 펄프 잡지다. 잡지가 값싼 갱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펄프'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권당 10센트 정도에 팔리던 이 싸구려 잡지에는 판타지·SF·추리·공포·모험물·범죄물 등 장르 소설이 주로 실렸다. 종이 질만큼이나 선정적이고 수준이 떨어지는 싸구려 작품들도 많았지만, 펄프 매거진은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 필립 K 딕, 레이먼드 챈들러 등 수많은 유명 작가를 배출한 장르 문학의 요람이기도 했다. 판타지, 공포 장르가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그 위상을 확립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특히 위어드 테일즈의 초대 편집장 에드윈 베어드는 프랭크 오웬, 시버리 퀸,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를 비롯한 여러 인기 작가를 발굴하며 공포 소설에 특화된 펄프 잡지 시장을 개척했다. 그런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라면 바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1890~1937)의 발견이다.
H P 러브크래프트는 신화를 창조한 작가다. 크툴루 신화라고 하는 그의 세계관은 미지에 대한 공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교류도 이해도 저항도 불가능한, 초월적이고 이질적인 존재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인간 군상'을 꾸준히 그려내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를 보여줬다. 크툴루는 그레이트 올드 원이라고 하는 신적 존재 중 하나로, 인류가 존재하기 전 고대 지구의 지배자다. 다른 고대 신들과 함께 해저의 초고대도시에 잠들어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이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사건들이 크툴루 신화의 기본 골격이다.
크툴루 신화의 의의는 완전히 새롭고 독자적인 공포의 원형을 제공해줬다는 데 있다. 신화(mythos)라는 말이 붙었을 정도로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절망적인 세계는 방대하고 매혹적이었다. 러브크래프트의 탁월한 상상력은 다른 동시대 작가와 후배 작가들에 의해 덧대어지고 체계화되면서 현대 호러 장르와 서브컬처, 대중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러브크래프트보다 앞서 활약한 작가 몬터규 로즈 제임스(1862~1936)는 빅토리아 시대의 고딕 소설과 현대 공포 소설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유령 이야기(Ghost Stroies)'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제임스풍 공포 소설에는 20세기 변혁의 물결을 거부한 복고주의자이자 빅토리아 시대의 마지막 교양인이었던 그의 사상이 투영돼 있다. 그는 과거 고딕 소설처럼 주로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하되, 작품에 실제 지명과 실존 인물,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현대적인 기법을 차용하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다.
러브크래프트 역시 제임스풍 공포 소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제임스의 작품에 대해 "수많은 평범한 상황과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상적 삶과 역사에 공포를 짜 넣는 방식은 M R 제임스가 창출한 가장 가치 있는 요소이다. 그는 공포소설가의 모범이다"라고 평가했다.
'공포소설 연대기_2편 : 좀비소설 ~ 모던호러까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