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좀비랜드' 좀 더 읽기
좀비가 나타났다/도망가거나 혹은 놀아주거나
더 이상 좀비는 마이너한 소재가 아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 Dawn of the Dead](2004) 이후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좀비 영화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호러 장르에서의 입지를 키워왔다. 물론 호러 장르 자체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마이너리티'를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흔히 좀비 영화를 얘기할 때 우리는 좀비의 대부 조지 A. 로메로 감독부터 시작한다(주1).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1968) 이후 그가 정립한 '살아있는 시체들'은 끊임없이 참조/재현/변용되는, 이른바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40년이 흘러 좀비는 '클래식'이 됐다. 하지만 뒷방으로 물러나 화투점이나 보며 소일하는 퇴기처럼 '왕년엔 내가 말이야' 라며 옛 시절이나 뇌까리지는 않았다. 기존의 공식을 비틀고, 다양한 장르와의 이종교배를 시도하고, 새로운 메시지와 메타포를 가미하면서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급기야 좀비는 '호러 장르'라는 친정을 박차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꽤 훌륭한 코미디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2004)는 기존 좀비 영화의 공식들을 재치 있게 패러디했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이 "자신의 3부작 이후 최고의 좀비 영화"라고 극찬하기도 한 이 작품은 기존 좀비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본다. 좀비로부터 도망가기 바빴던 선배들과는 달리 '한바탕 놀아볼까?'라며 판을 벌렸기 때문이다. 울면서 도망가느니 웃으면서 농담을 걸겠다는 후배들의 도발에 좀비의 대부가 찬사를 건넸다. 이에는 '답습이야말로 좀비를 두 번 죽이는 일, 나만 따라오지 말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시게나 후배님들'이라는 거장의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말고.
이 영화 [좀비랜드](2009)도 마찬가지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기존의 공식을 비틀고 뒤집어 웃음을 이끌어 냈다면 [좀비랜드]는 좀비라는 소재만 빌려왔을 뿐, 공식 따윈 깡그리 무시한다. 좀비 영화 좀 봤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자동적으로 떠오를 몇몇 장면들 - 동료의 희생, 고립된 생존자 집단, 내부의 갈등, 기타 등등 - 이 [좀비랜드]에는 없다.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핵심 동력이 좀비가 아니란 얘기다.
주인공 일당들은 고립무원의 황폐한 세상이 마치 무릉도원이라도 되는 양 사냥하고 털고 깨고 부수고 웃고 떠든다. 심지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장소는 놀이동산이다. 대충 감이 오지 않는가? 이 영화의 모토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좀비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일말의 고민도 갈등도 생각도 없는 영화로 여기면 곤란하다. 좀비에 대한 고민이 없을 뿐이다. [좀비랜드]는 "으악좀비다도망가안돼잡히겠어우걱우걱우린안될거야아마"라는 호러/좀비/고립/탈출 위주의 전개에서 벗어나 '붕괴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관계와 주인공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주2). 거참, 제목은 더할 나위 없이 좀비스러운 주제에 건방지지 않은가.
주1) 최초의 좀비물은 [화이트 좀비 White Zombie](1932)로 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좀비의 원형은 조지 A. 로메로의 업적이다.
주2) 그러나 이 영화는 [더 로드] (2010)가 아니다. 우리가 B급 코미디 영화에 기대하는 수준, 딱 그 정도로 가벼운 영화다. 초점은 맞추고 있되 그 심도가 엄청나게 얕다고 할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는 말자.
세상이 변했다/룰도 변했다
여기 주인공이 있다. 포비아(공포증) 투성이의 겁쟁이 청년, 콜럼버스다. 빨간 코의 광대(주3)만 보면 기겁을 하고, 식당 테이블을 닦는 행주조차 무서워한다.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앓고 있는지라 화장지 없는 화장실은 상상만 해도 졸도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세상을 두려워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엔, 나는 사람들이 좀비라도 되는 것처럼 피해 다녔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죽고 사라진 지금, 나는 그들이 그립다.
친구도 없이 매일 밤 온라인 게임(주4)으로 소일하며 방구석 폐인이자 호드의 늠름한 영웅으로 살아온 잉여 청춘이다. 그다지 살갑지 않던 가족들도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질한 주인공이 어찌 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 그가 '좀비랜드'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규칙을 지켰기 때문이란다.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세상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칙(My Rules)을 철저히 준수한 콜럼버스는 그리 길지 않은 생존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첫 번째 규칙은 운동(cardio). 좀비보다 느리면 끝장이다. 제일 먼저 사라져간 옛 세상의 뚱보 친구들에게 애도를. 두 번째 규칙은 확인 사살(double tap). 죽은 줄 알았던 좀비로부터 습격을 당하는 어리석은 친구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좀비가 등장하는 호러 게임 [바이오 해저드]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확인 사살에 총알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을 거다. 그 밖에도 화장실을 조심할 것, 안전벨트를 맬 것, 짐은 가볍게, 준비운동은 필수... 수십 가지 행동수칙들을 수첩에 적어놓고 고지식할 정도로 지키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승리했다.
루저면 어떤가. 장 트러블타면 어떤가. 대인공포증이 있으면 또 어떤가. 이상한 기준(예를 들면 180cm)을 세우고 그 이하는 루저라고 규정짓는 사회 자체가 붕괴됐다. 거북살스럽게 마주 보고 명함을 교환해야 할 사람도 죄다 죽어버렸다(그리고 좀비가 됐다). 그렇게 세상이 변했고, 룰도 변했다.
주3) 광대 공포증(Coulrophobia) : 서양에서 공포증을 언급할 때 자주 나오는 소재. 표정과 행위의 불일치에 기인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다. 광대 살인마로 알려진 존 웨인 게이시, 스티븐 킹의 [그것 It]에 등장하는 광대 등 비범한 캐릭터들이 많다.
주4) 두말하면 무엇하랴, 그렇다 WOW다. 세상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록타! 오그아르!!
가족을 잃었다/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콜럼버스의 꿈을 한번 들어보자. "자신과 함께할 배우자와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게 내 꿈"이란다. 콜럼버스도 울고 나도 울고 전미가 울었다. 어쨌든 좀비랜드에서 그는, 가정을 꿈꾼다.
터덜터덜. 주차장이 되어버린 고속도로를 걸어가던 콜럼버스는 터프가이 탤러해시를 만난다. 좀비라면 일단 쏘고 보는 호쾌한 이 남자. 오로지 트윙키(주5) 하나 먹기 위해 미국-좀비랜드를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다. 무모하다고? 원래 망조가 들면 뭐 하나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한복에 집착하는 아무개 씨도 있지 않던가.
콜럼버스와 탤러해시, 규칙과 일탈의 만남인 셈이다. 뻔하다면 뻔한 인물 설정이지만 반발하면서도 조화되는 두 캐릭터의 앙상블이 썩 훌륭하다.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쾌한 장면 중 하나다.
여차저차 탤러해시와 동행하게 된 콜럼버스는 트윙키를 찾아 들어간 가게에서 위치타, 리틀록 자매와 만나게 된다. 미국이 좀비랜드가 되기 전부터 남자들 등골 빼먹으며 생계형 꽃뱀으로 살아온 그녀들까지 여정에 동참하면서부터, 그토록 굳건했던 콜럼버스의 룰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동생인 리틀록은 [님스 아일랜드 Nim's Island] (2008)에 출연했던 아역배우 아비게일 브레슬린이다...긔엽긔.
하지만 룰이 흔들리는 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사람이 두려웠던, 그래서 관계 맺기에 서툴렀던 주인공 콜럼버스는 차츰 변해간다. 앗, 이거 성장 영화였잖아! 소심남, 쾌남, 꽃뱀, 그리고 작은 꽃뱀. 이 엉뚱한 4인조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세상 어느 가족보다 피를 많이 본(?), 죽음과 좀비로 이어진 유쾌한 가족이다. 콜럼버스의 소박하고도 원대한 꿈은, 이렇게 이뤄졌다.
좀비 영화를 가장한 가족/성장/청춘 영화 [좀비랜드]. 좀비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권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은 '좀비'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장바구니에 담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사들은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좀비 팬들은 언제나 배고프다(주6). 좀비를 싫어하는 이들에겐 권하고 싶다. 심각함을 벗어던진 좀비 영화가 얼마나 신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미국의 영화 평론가 고(故) 로저 에버트(주7)는 이 영화에 별 넷 만점에 세 개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누가 이처럼 재미있는 영화를 좀비 소재로 만들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Who would have guessed such a funny movie as "Zombieland" could be made around zombies?
내 말은 미덥지 않더라도, 로저 영감님의 말은 믿어보자.
주5) 트윙키 : 미국 Hostess社에서 만든 불량식품의 대표주자. 노란 케이크 안에 다디단 크림이 들어있다. 불량 식품답게 '절대로 상하지 않는다'는 도시괴담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1998년부터 보관 중인 트윙키가 부패하지 않았다는 증거 사진도 있다. 관련링크
주6)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배탈 나는 경우도 많다. [좀비 스트리퍼스 Zombie Strippers] (2008)를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주7) 로저 에버트(Roger Ebert) : 1942~2013. 시카고 선 타임즈의 영화 평론가. 지금은 작고한 진 시스켈(Gene Siskel)과 함께 Siskel and Ebert 라는 영화 토론 TV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때 두 사람이 함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한 영화는 'Two Thumbs Up'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진 시스켈 타계 이후에는 리처드 립퍼(Richard Roeper)와 함께 진행했다.
그리고 좀 더 읽기
이 영화의 오프닝은 최근 몇 년 동안 본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다. 아래 첨부했으니 감상해보자. 초고속 촬영과 타이포그래피를 잘 활용한 감각적인 영상이 돋보인다. 이후 영화 본편에서도 적재적소에 타이포그래피가 쓰이는데 활자들이 인물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등 참신한 영상이 매력적이다. 오프닝은 꽤 고어하지만 영화의 수위는 이보다 낮으니 안심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