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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재난이 작동하는 방식

영화 '터널' 좀더 읽기

by 망나니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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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영화 '터널'을 봤다. 한적한 국도로 귀가하던 자동차 딜러 정우(하정우)가 터널 붕괴에 휘말려 갇히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정우와 그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 양쪽의 이야기가 영화 터널의 중심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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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공간을 넓게 쓰는 능수능란함.' 터널의 첫 인상이다. 예기치 못한 재난/사고에 휘말려 고립된 생존자의 이야기는 밀도가 높다. 대니 보일 감독의 '127시간'이 그랬고 '베리드' 역시 그랬다. 하지만 밀도를 높인 만큼 한계도 분명해진다. 그 한계는 고정된 공간만큼이나 이야기도 그 운신의 폭이 좁다는 것이다. 영화마다 반전, 플래시백(회상), 환각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보지만 쉽지 않다.


반면 터널은 한정된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다. 정우와 함께 갇혀있는 관객이 답답해 할 무렵 변화가 생기고 그 변화는 공간의 확장, 이야기의 전환으로 이어진다. 마치 뚜껑을 닫아놓은 치약 튜브의 이곳 저곳을 눌러 내용물을 옮기듯, 네모난 틀 안 블록을 이리저리 옮겨 퍼즐을 맞추듯 터널은 이야기의 밀도는 유지하면서 다양한 상황과 호흡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탁월하고 돋보이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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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은 지독한 블랙코미디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는 재난 상황의 심각함을 순간 휘발시키는 하정우와 오달수의 능청스런 연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는 '재난 이후의 대한민국'이 놀라울 정도로 현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터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세월호 사고 이후 숱하게 봐온 뉴스 화면과 신문 지면과 정부의 퍼포먼스와 우리들의 데자뷔다. 높은 분의 기념 사진을 위해 허비되는 구조 골든타임,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애도마저 '그만 하라'고 종용하는 언론, 경제적 가치/손실로 계산되는 그 모든 가치, 실종자 가족들이 죄스러워 해야 하는 그 모든 상황. 터널은 적나라하되 무리하지 않고 거치고 날선 비판 대신 살짝 비켜가는 재치로 재난 이후의 우리 사회를 묘사해낸다. (이 영화를 두고 '정치적 선동'이라고 몰아세우면 그 사람은 굉장히 촌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절묘한 수위다)

연기보다 먹방이 화제가 되는 하정우지만, 그의 이번 연기는 만족스럽다(영화 소재상 먹방할 음식이 없기도 하다) 홀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그의 장악력은 이미 영화 '테러 라이브'에서도 증명된 바 있지만, 터널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유머러스하고 인간적인 정우라는 캐릭터는 하정우 특유의 무심하게 툭툭 던져 웃기는 대사톤과 만나 매력을 뽐낸다. 정우의 아내 역을 맡은 배두나 역시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수위를 지키며 바깥의 이야기를 끌어간다. 구조대장 대경을 연기한 오달수는 감초를 넘어 이야기를 지탱하는 축이자,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최고의 신스틸러는 배우 김해숙인데, 그의 활약은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터널은 '한국형' 재난영화가 아니다. 잘 만든 재난영화이자, 능수능란한 호흡으로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나홀로 생존영화다. 다만 영화 속에 담겨있는 '안전하지 못한 나라'는 오롯이 한국이다. 127시간이 인간만 남기고 '샌 안드레아스'가 성조기만 남겼다면 터널은 한국에서 재난이 작동하고 소비되는 방식을 보여줬다.


별점은 ★★★★☆(8/10)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팁 몇 가지

-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가 속해있는 방송국은 SNC다

- 물이나 콜라는 챙겨가지 말 것(자연스럽게 4DX 체험)

- 극중에서 항상 등장하는 돌가루와 먼지는 콩가루다 하정우는 인터뷰에서 입만 열면 미숫가루 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 썰전에서 실시한 세월호 1주기 설문조사에서 '세월호 관련 뉴스가 지겹다'라는 항목에 60세 이상 응답자의 65%가 그렇다고 답했다 6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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