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개봉/2011년
감독/캐리 후쿠나가
출연/미아 와시코우스카, 마이클 패스벤더, 제이미 벨, 주디 덴치
함께 볼만한 영화
어톤먼트(2007) 처연하게 아름다운 화면
폭풍의 언덕(2011) 언니 샬럿 브론테의 작품을 봤다면 동생 에밀리 브론테의 작품을 보는 것이 인지상정
레버넌트(2016) "자연광을 담을래!" 감독의 취향이 촬영감독의 눈물로 화했다
그리고 좀 더 읽기
나는 20자평에 집착한다. 20자평을 쓰는 일에 영화평에 쏟는 모든 열정과 정성의 7할 정도를 소진한다 - 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빼어난 20자평은 단지 몇 개의 단어로 한 편의 영화와 그에 대한 평가를 온전히 전달한다. 압축의 미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며 표현력의 경연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제인 에어]의 20자평 역시 짧지 않은 고심의 결과물이다. 물론 결과물의 완성도가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슬프지만, 여하튼 과정이 그렇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섬세하게 세공된' 이란 표현을 썼다가 이내 지우고 '섬세하게 직조된' 으로 고쳐 썼다. 세공(細工). 잔손을 많이 들여 정밀하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보통 보석이나 귀금속의 가공에 사용되는 단어다. 그에 반해 직조(織造 weaving)라는 단어는 연속적인 물체를 짜서 만든다는 의미로, 씨줄과 날줄을 교차해 직물을 짜는 제직(製織) 등의 단어와 혼용되기도 한다. 다만 직조에는 통상적으로 수작업으로 짜는 수직(手織)의 경우처럼 소단위의 공예적인 뉘앙스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여담으로, 기계를 이용한 직조는 방직(紡織)이라고 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을 다룬 영화에는 세공보다 직조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 제인 에어라는 인물의 삶은 원석을 깎고 정밀한 장식을 덧붙여 반짝이는 보석을 만드는 과정이 아닌, 씨줄과 날줄처럼 삶의 작은 조각과 인연이 교차하고 쌓이고 엮이면서 (그 결과물이 성기든 촘촘하든) 세월과 노력이 배어 있는 직물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인생이든, 깎여나간 원석이 무(無)에 수렴하는 것에 비유되기 보다는 점차 보태지고 덧대지는 직조의 과정에 비유되는 것이 바람직하게 않겠는가.
제인 에어는 1847년 영국 요크셔의 작은 도시 하워스(주1)에서 태어났다. 아니, 쓰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매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브론테 자매의 맏언니인 샬롯 브론테. 그녀는 어머니를 빼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샬롯 브론테는 자신이 경험한 삶의 부침을 작품 속에, 제인 에어의 모습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규율과 볼품없는 시설의 기숙학원에서 두 명의 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한 일은 작품 속 '로우드 학교(Lowood School)' 에피소드로 재현되며, 가정교사를 하며 생활했던 일, 벨기에 브뤼셀 유학시절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가 좌절했던 경험 등이 [제인 에어]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자신의 보고 들은 일들을 작품에 녹여낸 대선배 제인 오스틴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작 샬롯 브론테는 '오스틴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랑에는 정열이 빠져 있다(주2)'며 깠다고(...).
주1) 하워스는 바람이 많이 부는 시골 지역으로 오늘날에는 풍력발전소가 많이 세워져 있다. 샬롯의 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의 대표작 [폭풍의 언덕] (1847)에 영감을 준 것도 이 지역의 벌판에 위치한 폐가 Top Withens 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이 자매들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인 듯.
주2) 출처 : 위키피디아 '제인 오스틴'
제인 에어는 무려 스물하고도 두 번이나 부활했다(주3). 아니, 리메이크됐다.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 (1813)이 영화로는 여섯 차례, TV 드라마로는 다섯 차례나 만들어졌다지만, '나란 여자 당찬 여자' 엘리자베스 베넷([오만과 편견]의 주인공)도 제인 에어의 생명력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까. 그녀가 세상에 나온 지 165년이나 되었건만 그녀를 향한 열렬한 구애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원작이 지닌 매력의 깊이를 새삼 깨닫게 된다.
주3) 영화로만 스물 두 번이고, TV 드라마까지 합치면 스물 일곱 번째라고 한다. 첫 번째 영화는 1914년 존 찰스 감독 작품이다.
캐리 후쿠나가 감독에 의해 부활한 스물 두 번째 제인 에어는 영민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풍광도 바람소리도 촛불의 흔들리는 불빛까지도 여운을 남기는, 그런 영화다. 영상은 처연하게 아름답고, 음향은 차분하게 속삭인다. 인공조명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 방식 덕분에, 화면 속 빛깔들이 마치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 그 질감을 달리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두운 실내의 벽난로 앞에서 까칠한 대화로 서로를 재보는 두 남녀는 벽난로의 일렁이는 불빛과 어둠 속에 절반씩 잠겨 있다. 이상한 소리에 놀라 촛불을 들고 집안을 배회하는 제인의 얼굴은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깜빡이는 불빛에 파리하게 빛난다. 황량한 고택을 비추는 햇살은 따뜻하기 보다 창백하지만, 제인이 사랑에 빠져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만큼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구도 역시 매력적이다. 특히 도입부에서 부감으로 보여주는 광막한 벌판의 원경과 그곳을 정처 없이 헤매는 제인의 모습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각적인) 즐거움이었다. 절제된 음향은 벌판을 내달리는 스산한 바람소리와 제인의 숨죽인 호흡, 치마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한 영역에 주력한다.
구성 상의 특징도 빼놓을 수 없다.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는 장면을 과감히 도입부에 배치하고, 플래시백 기법을 활용해 제인이 과거를 회상하는 서술 방식을 택했다. 선배 [제인 에어]들과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시도라고 본다.
감독은 철저한 고증을 위해 모든 옷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작가, 평론가이자 역사가인 제니 유글로(Jenny Uglow)에 자문을 구해 당대 하인들의 식사 시간, 응접실에서의 오락거리, 음식 등 빅토리아 시대의 '소소한 일상'까지 재현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19세기의 영국을 가감 없이 재현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운명 앞에 당당한 여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제인 에어 역할을 맡은 미아 와시코브스카는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이름을 알린 호주 출신 배우다. 발레리나 출신으로 젊은 나이(89년생)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외모와 연기력을 갖춘 재목이라는 평.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헐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에 그녀를 캐스팅하며 미아 와시코스브카에 대해 "오드리 헵번처럼 우아하고 니콜 키드먼처럼 도전적이다. 영어권 최고의 여배우로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고 칭찬했다고. 가녀린 몸과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 굳게 다문 입술과 깊은 눈빛. 청초하고 우아한, 그리고 어딘가 쓸쓸함이 배어 있는 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제인 에어는 무척이나 근사하다. 그녀의 절제된 (어느 정도는 자기방어적인) 표정이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그렁그렁한 눈물과 봄볕 같은 미소로 화(化)하는 장면은 관객의 마음까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제인 에어라는 캐릭터는 무심한 듯 시크해 보이지만(주4) 그 속에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정열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면서 말이다. 다만 '평범한 외모'라는 원작의 설정을 파괴하는 미모가 문제라면 문제다.
주4) 무심한 듯 시크하게 : 가수 보아가 패션잡지 보그의 화보를 촬영하면서 했던 인터뷰에서 썼던 표현.
이제 미아 와시코브스카와 호흡을 맞춘 마이클 패스벤더 얘기를 할 차례다. 그가 연기한 에드워드 페어팩스 로체스터는 고집스럽고 제멋대로며 음울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매력적이기도 해서 피츠윌리엄 다아시([오만과 편견]의 주인공)의 뒤를 이어 빅토리아 시대의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 타이틀을 계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로체스터는 다아시보다 더 거칠고, 그만큼 더 섹시하다. 특히 자칫 손발이 오그라들 수 있는 문어체의 대사에 미묘한 감정을 실어 전달하는 패스벤더의 연기는 로체스터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마이클 패스벤더는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액션 블록버스터와 정극을 넘나들 수 있는 귀한 배우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쪽 계열 배우를 꼽자면 러셀 크로우 정도가 있겠다.마이클 패스벤더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300] (2006)이다. 그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한데 (그 영화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그렇듯) 그는 '전장에서의 죽음을 예찬하는' 밀덕(밀리터리 덕후) 스파르타의 전사 스텔리오스 역할을 맡았다. 올해 개봉 예정인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젊은 매그니토를 연기한다고 하니,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액션 블록버스터와 정극을 넘나들 수 있는 배우를 한 명 더 발견한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한 명 더'라고 쓴 김에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쪽 계열 배우를 꼽자면 러셀 크로우 정도가 있겠다.
영화는 정적이다. 감정은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으며, 영화는 과장된 연출도 과잉의 기교도 없이 담담하고 느긋하게 흘러간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통통 튀는 제인 에어나 퇴폐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로체스터는 없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숨기고 들키고 모른 척 하고 확인하고 마침내 털어놓는 그 모든 과정 – 그렇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밀당(밀고 당기기)은 연애의 기본이다 – 은 손 한번 제대로 잡지 않은 채 의뭉스럽게 전개된다.
하지만 어느덧 19세기의 감수성에 동화된 관객들은 제인 에어가 느끼는 환희와 절망, 그리고 시대의 편견과 한계에 맞서 나아가려는 그녀의 의지에 공감하게 된다. 그녀가 진정한 사랑을 찾는 순간,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여리고 조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보다 강인했던 제인 에어처럼, 자못 얌전하게만 느껴졌던 스물 두 번째 [제인 에어]는 어느새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고전, 여전히 아름다운 제인 에어의 이야기를 이처럼 기분 좋게 맞이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덧) [제인 에어]처럼 영상이 처연하게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나면, 후유증이 오래 간다. 함께 보면 좋을 영화의 리스트를 만들어 봐야겠다. 생각나는 건 [어톤먼트] (2007), [배리 린든] (1975), [씬 레드라인] (1998). 뜬금없지만 황량한 풍광을 담은 [센츄리온] (2010)도. 참고로 [센츄리온]의 주인공은 마이클 패스벤더다.
또덧) [오만과 편견]에서 '까칠함 종결자' 캐서린 공작 부인 역할을 맡았던 주디 덴치 여사가 이 영화에서는 적당한 호들갑에 훈훈한 참견을 아끼지 않는 미시즈 페어팩스를 연기했다. 두 역할의 간극을 생각해보면 주 여사의 연기 공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달까. 또 [빌리 엘리엇] (2000) 제이미 빌의 훈훈한 모습도 볼거리.
또또덧) 화면이 아름답고 디테일한 영화라 블루레이 감상이 필수인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출시되지 않았다. 네이버의 VOD 서비스에는 480P의 조악한 화질로만 올라와있어 경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