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룩쥔장 May 10. 2023

육지병 걸린 큰아이

제주에서 자영업하기_'발효의 시간' #4

제주에서의 첫가게 이야기_ 세번째에 이은 네번째 이야기입니다.

https://brunch.co.kr/@soccumi/209



"엄마가 뭐라고 해도 고등학교는 육지로 갈 꺼야. "

눈물범벅이 된 큰아이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문을 쾅 닫고 제 방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이제 중3이 된 큰아이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순하고 워낙 사교성이 좋은 아이였습니다. 숱한 전학에도 등교한 첫 날 친구를 데리고 집에 오던 아이라 알파벳도 제대로 떼지 않고 떠났던 미국에서조차 등교한 첫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인도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을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아이도 중2병은 어쩔수 없었던지 제주로 이사오기 싫다는 아이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배에 태우고 온후 1년이란 시간이 흘러 나름 잘 적응하고 있나 했는데 역시 그건 저의 착각이었던가 보았습니다. 육지로 이사못갈 것 같으면 자기라도 혼자 자취하게 해달라는 말에 저 역시 부아가 치밀어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식당도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다 두고 어딜 가? 어쩜 넌 네 생각만 하니? 제주도가 어때서?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땐 네 맘대로 살라고 했잖아."

그렇게 큰 아이와 1년여에 걸친 치열한 모녀간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식당은 '그 어느 날의 대박사건' 이후로 안정을 찾은 상태였습니다. 한번 괘도에 오른 매출은 지속적인 매출로 이어졌고 '평균의 법칙'처럼 점심시간이 바쁘면 저녁시간이 조금 한가하거나 점심시간이 한가하면 저녁시간이 바쁘거나 하며 나쁘지 않은 결과를 꾸준히 보여주었습니다. 다행히도 인복이 있었던지 이후 채용한 이들 모두 큰 힘이 되어주었기에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일할수 있었습니다.


아이를 둔 같은 엄마들로 점심시간을 함께 해줬던 H와 J. 아이들이 모두 아직 어려 식당으로 불러 함께 밥먹는 시간도 많았던 그들은 개인적으로 힘들 때에도 늘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의리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싹싹하게 일을 너무 잘해줬던 예쁜 얼굴의 S. 어린 나이에도 마감청소까지 구석구석 해냈던 그녀는 낮에는 치위생사로 일하고 저녁에는 알바를 하느라 퇴근시간마다 종종걸음으로 뛰어오곤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러 식당에 자주 오던 청년도 있었는데 결국 그녀는 다른 제주남자와 불타는 연애를 시작했더랬지요. 모두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장사란 것이 참 그런 것 같습니다.

매출이 안 나오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사장 혼자 고군분투하게 되고

사람의 한계가 있는지라 체력적으로 힘이 들면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곱게 나갈 수가 없고

그러다 보면 가게 문을 여닫는 시간도 들쭉날쭉해지고 운영도 시들해지는 악순환이 됩니다.

반대로 매출이 좀 나오면 직원을 쓰게 되고

함께 하는 노동은 힘겨움을 이겨낼 즐거움을 주고 손님을 대하는 자세에 여유가 있으며

꼭 사장이 아니더라도 굴러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니 사업은 성공적으로 유지되는 선순환이 되는 것이겠지요.


가게는 안정화에 접어들었지만 사장인 제 몸은 점점 지쳐갔습니다.

가게에서는 들이닥치는 주문들을 쳐 내느라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두 손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머리로는 다음 스텝을 계산하고 두 다리는 굳건히 지탱해주었지만, 그 모든 게 끝나고 집에 오는 길은 손 하나 까딱할수 없을 정도로 파김치가 되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는게 이렇게 힘든 건가 싶고, 사장으로의 책임을 다한다는 게 이렇게 무겁고 외로운 건가 싶어 낯선 곳에서의 서러움이 사무치게 아파왔습니다. 가끔은 친하게 지내는 동네 동생을 불러 매운 닭발에 술 한잔 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육체와 정신적 한계가 알코올의 힘을 빌려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고 집으로 향하는 길엔 머리위 뜬 달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거친 욕을 퍼붓곤 했습니다.


몸도 맘도 지쳐갈 무렵, 큰 아이의 고입 시험은 다가오고 있었고 전 또다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이의 손을 들어주기로 말이죠. 제주에 올 때도 아이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행했던 만큼 큰 아이에게 미안한 게 너무 많았고 평소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어필한 적이 별로 없던 아이의 집요함이 간절함으로 읽혔기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나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제주 첫 식당은 사실 '빚'으로 만들어진 가게였고, 매출이 올랐다 해도 생활비와 년세, 대출금을 갚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죠. 이런 식이라면 그 장소가 어디든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한다 해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고등학교 3년이 지나면 이제 아이는 성인이 될 터이고 더 이상은 품안의 자식이 아니니 그 3년만이라도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 결심했습니다.


결론이 나자 이제 남은 건 가게를 처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여름부터 몇몇 부동산에 내놓은 상태이긴 했으나 첫 가게였던 만큼 욕심을 버릴수가 없어 과도한 권리금을 욕심낸 탓에 6개월이 넘도록 입질이 없었습니다. 더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권리금도 대폭 낮추고 그동안 비공개로 했던 매물도 과감하게 오픈했습니다. 온라인인 까페에도 올리고 교차로에도 상호명이 찍힌 사진과 함께 매출도 오픈하겠다 했습니다.


사실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와중에 매물을 오픈한다는 것이 많이 꺼려지기도 했고 워낙 좁은 곳이라 금새 소문날 것이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마냥 부동산의 소식만 기다릴 수는 없없습니다. 제주 이후로도 운영하던 가게를 여러번 매매했었는데 경험상 제가 느낀 점은 '부동산을 신뢰하지 마라'입니다. 그들로서는 여러 매물 중에 하나일 뿐이고 권리금이 많다 싶으면 성사확률이 떨어지니 적극적으로 판매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브리핑에도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가게를 팔아야겠다는 '절박함'은 가게 주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거래에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겨울이 시작되었고 육지로 올라가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학교 배정도 받아야 하고 교복도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 해를 넘기면 너무 늦겠다 싶어 과감하게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꼭 올라가야 한다면, 올라가기로 한 거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간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가게가 처분 안될 때는 제주에 남기로 한 남편에게 맡기기로 마음을 비웠습니다. 가게를 처분한다면 자금을 들고 올라갈 수 있으니 도움은 되겠으나 역시나 그 또한 안 된다면 더 작은 원룸으로 이주할 각오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기적같이 가게를 인수하겠다는 적임자가 나타났습니다.



To be continued...


직원들과 함께 먹었던 식사들







매거진의 이전글 대박은 일어났으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