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위한 조직관리
- 누가 또 오는 거예요?
- 응, H상무님.
- 아, 뭐예요. 미리 말하셨어야죠.
- 말했으면 코리 너 안 왔을 거잖아.
Y상무는 항상 내게 H상무와 잘 지내라는 조언을 했다. 앞으로 조직의 실세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 이제 모두 다른 조직에서 일하는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해요?
- 사람 일은 모르잖아. 회사원은 두루두루 잘해두면 좋다. 그리고 상무님이 너 과장일 때도 많이 챙기셨어.
H상무와는 예전에 잠깐 함께 일할 기회가 있었다. 과도한 농업적 근면성과 직원들을 불안하게 하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 적응하기 어려워 부서 이동을 고민하던 차에 조직개편이 되어 자연스럽게 결별했다. 아직도 그의 조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가루가 되고 있는 동기들을 볼 때면 다시 생각해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오.. 코리. 오랜만이야. 이번에 팀장 되었다며.
- 아, 네. 상무님.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 이 녀석, 맘에도 없는 소리는 여전하네.
- 상무님이 도와주셨으면 더 빨리 했을 텐데요. ㅋㅋ
Y상무는 내게 '적당히 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 아이고, 그러니까 나랑 같이 일하자니까. Y상무는 요즘 어때? 힘들 것 같은데.
- 말도 마세요. 힘들어 죽겠습니다. 전략실에서 일할 때는 다들 잘하니까 제가 손댈 것이 없었는데.
- 그렇지. 다른 조직은 평준화되어 있지 않아서 조직 관리가 어려워. 그러니까 괜찮은 아이들이 계속 다가오도록 만들어야지. 조조처럼.
H상무는 매번 '전략'을 외치며 삼국지의 조조를 유독 좋아했다. 역시 나와 맞을 수 없는 인간임이 분명했다.
- 그게 어렵더라고요. 상무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데리고 다니세요.
- 데리고 다니다니? 오게 해야지. 내부에서 발굴하기도 하고. 그게 코칭이지.
- 그 비결을 좀 알려주세요. 1년 차라 너무 어렵습니다.
- 일단 술 좀 더 마시면서 이야기하자. 코리도 나중에 더 큰 조직을 관리할 테니 잘 들어둬. 이거 돈 받고 알려줘야 되는 기술인데..
리더들 중에 새로운 조직에 가면 기존에 일을 잘해온 에이스들을 그대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지. 사실 그게 편해. 그동안 잘했던 아이들은 이유가 있어. 하지만 나는 조금 달라. 가장 먼저 그 에이스들을 긴장시킬 메기를 찾지. 그리고 평소였다면 당연히 그 에이스들에게 갈 것 같은 중요한 일을 메기에게 맡겨보지.
그럼 에이스들이 긴장을 해. 아무래도 회사일이라는 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야 성과로 연결되잖아. 시작부터 꼬이면 연말에 평가를 잘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쉽지. 게다가 항상 잘해온 아이들은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더 불안해하거든. 메기의 존재가 그들을 자극하는 거지.
조직에 메기가 안 보일 때는 어떻게 합니까.
물론 찾는 것은 쉽지 않지. 그게 쉬웠다면 이미 중용되고 있지 않았겠어? 그럴 때는 아예 젊은 아이들 중에서 골라. 동기들보다 빠르게 올라가고 싶어 하는 야망가들이 있거든. 그런 아이들에게 몇 번 좋은 신호를 주다가 회식 자리에서 이런 멘트를 한번 던져주는 거지.
K과장. 난 네가 최연소 전략실 팀장이 되면 좋겠어.
아마 그 아이는 로또 번호가 거의 다 맞아가는 순간처럼 뇌에서 도파민이 폭발하겠지. 내가 실수인 것처럼 'K차장'이라고 올려 부르기라도 하면 그것의 의미를 확대 해석할 거야. 그다음부터는 대부분 집에도 늦게 가고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일을 금요일에 던져줘도 월요일 아침까지 해 오더군. 이 정도면 내 덕분에 에이스 된 거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재 육성이자 코칭이지.
와.. 상무님은 진짜 대단하십니다. 조직관리의 신이라더니.
에이스에게는 변수와 불안감을, 메기에게는 생각보다 큰 기대와 보상을 던져주는 거지.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똑똑한 아이들이라 금방 분위기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어. 이다음 이야기가 더 중요하지.
간헐적 강화라고 들어봤나? 레버를 누를 때마다 먹이를 주다가 불규칙하게 주면 미친 듯이 레버를 누른다는 유명한 쥐 실험.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봤지? 그 영화에서 유명한 대사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아이들에게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라고 하지만, 직원들은 그렇게 하면 경쟁이 안돼. 안주하게 되지. 내 라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지레짐작 포기하는 아이들까지 생기니 무주공산이 되는 거지. 그래서 간혹 먹이를 원래 주던 아이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 던져 줄 필요가 있지. 그 영화의 대통령처럼.
아, 그렇다면 작년에 처음 만난 J 차장을 갑자기 승진시킨 이유도?
그렇지.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면 갑자기 설치는 아이들도 있어. 그것을 가만히 두면 그전에 앞서가던 아이들이 불안해서 앞다투어 일을 만들어서 내게 달려오지. 손 안 대고 코를 푼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이득이 있어. 내가 자기 라인만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실력과 성과로 인사를 하는 리더라는 평판까지 만들 수 있지.
캬. 이건 뭐 조조가 아니라 제갈량이네요.
이 정도 가지고 호들갑은.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주말에 사장님이 등산을 가신다고 하셔서 나 혼자 따라가기에는 좀 부담스럽더군. 그래서 최연소 팀장을 불러 같이 가자고 했지. 근데 이 녀석이 고민해보겠다는 거야. 그래서 바로 Yes 할 것 같은 팀장을 수배하고 모른척하고 있었지. 한참 있다가 오후에 그 녀석이 와서 가겠다고 하더군. 다른 팀장이 가기로 했으니 주말은 아주 푹 쉬라고 했지. 그다음부터 그 녀석은 뭘 시켜도 NO 하는 법이 없었어. 하하하하.
마지막도 중요해. 이 정도 되었으면 어느 정도 조직관리 환경이 만들어진 것인데, 요즘 주 52시간 근무 등 조직관리 환경이 꽤 악화되었지. 직원들이 딴짓을 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기 아주 좋은 상황이지. 훌륭한 리더라면 이것까지 관리할 수 있어야 해.
이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넷플릭스 보나?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한 편을 다 보면 클릭도 안 했는데 다음 편이 나오잖아. 심지어 그 드라마를 다 보면 비슷한 다른 드라마가 자동으로 재생되지. 생각할 틈이 없는 거야. 우버도 운전자들에게 일에 대한 가치나 시간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지 못하도록 다음 운행을 연속적으로 잡아준다더군. 즉, 직원들에게 업무 강도를 낮춰주거나 법인 카드로 식사를 하게 해 줄지언정, 삶에 대해 고민하거나 일의 가치를 떠올릴만한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지.
우와.. 대박.. 방금 소름 돋았어요.
몸은 회사를 떠나더라도 영혼은 회사에 유령처럼 남도록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드는 넛지를 설계해둬야 해. 이런 자동화된 늪에 빠져 있는 직원들은 그렇지 않고 딴짓을 구상하는 직원들을 자연스럽게 견제까지 해주니 장기적으로 내게도 편리한 일이지. 물론 이 모든 것은 회사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네. 전무님. 회사 근처입니다. 아, 지금요? 넵. 알겠습니다.
H상무는 갑자기 걸려온 전무의 전화를 받고 가봐야 한다며 일어섰다.
- 와.. 역시 저는 H상무님과는 안 될 것 같아요.
- ㅋㅋㅋ 대단하시지? 똑똑해.
- 직원들이 진짜 모를까요? 저런 생각을.
- 알고 있는 아이들도 많지. 하지만 피할 수가 없어.
- 왜요?
- 우리 모두 동물원 안에 갇혀 있으니까. 내 것을 다른 사람이 먹을까 두렵고, 승진 발표 리스트에 동기나 후배가 먼저 올라가 있는 것은 싫으니까.
함께 일할 때 바람직한 리더십이라고 생각했던 Y상무가 상대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H상무 방식이 맞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 어쨌든 나는 이미 틀렸으니. 너는 계속 투잡을 열심히 해라.
- 뭡니까. 전쟁 영화에서 유언하는 소대장 같은 이 대사는. ㅋㅋ
- 그냥. 너처럼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 회사나 H상무님 같은 사람들이 직원들을 좀 더 존중하고 잘하지 않겠니.
- 아이고. 경쟁자 줄었다며 저분을 뒤를 이을 핵심인재들이 계속 등장할걸요.
- 그런가. ㅋㅋ 그만 일어나자 내일 아침 부사장님 보고 있어서 7시까지 가서 준비해야 해. 너는?
- 저희 부서는 10시까지 출근이라 내일 '테헤란로 커피클럽' 들렸다가 출근할 생각입니다.
- 캬 ~ 역시 부럽다.
- 저는 전략실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한 거잖아요.
- 결국 사는 건 자기가 선택한 몫이 아니겠니. 상무님처럼 우리도 합리화로 승화시켜 보자. ㅎㅎ
- 오래간만에 즐거웠습니다. 상무님. 또 봬요. ^^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맞게 되는 고통을 이겨낼 위안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자기 합리화는 삶을 견뎌내는 유용한 기제이다. - 정재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