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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낮은 아이가 세 아이 아빠 되다

by hohoi파파

나는 자존감이 낮았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 리코더 수행평가로 기억한다. 그때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리코더를 연주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어찌나 긴장되던지.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잘할 수 있을까.”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됐고 주목받는 것이 불편했다. 틀리면 친구들이 비웃을 것 같았다. 어렵게 리코더에서 손가락을 뗐지만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긴장했고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잘해야겠다고 생각할수록 숨이 턱턱 막히더라. 결국 한 곡을 다 부르지 못하고 수행평가를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시대를 잘 타고났다. 그때 ADHD 검사를 했다면, 100% ADHD 아이였다. 학교에서 산만하고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반면 자존심은 셌다. 남들에게 지기 싫어했다. 그래서 보여주기 식으로 공부했는지 모른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거나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진득하게 생각해서 풀기기보다 참지 못하고 답지를 들춰 봤다. 거짓 꼴로 풀이를 베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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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사고뭉치였다. 말 짓을 하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자주 혼났다. 도망가는 친구에게 돌을 던졌다가 학교 현관 유리문을 깼다. 친구들과 복도에서 축구를 하다가 유리창을 깼다. 동급생 여자 친구를 넘어트려 머리가 다칠 뻔했다. 오지랖도 넓어 골목대장을 자처하기도 했다. 나보다 약한 친구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강해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마음이 여렸다.


눈치를 살피는 아이였다. 심리학적인 용어로 착한 아이다. 어른들의 말 잘 듣고 지나치게 의존적인 성향의 아이였다. 선택해야 할 때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결정권을 미뤘다. 회피하고 자기 방어한 셈이다. 성인이 돼서도 우유부단한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 흔한 자장면 먹을지, 짬뽕 먹을지 메뉴 고르는 것도 친구들이 먼저 고르길 바랐다.


'아무거나'가 나의 대표 메뉴였다. 친구와 다른 선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양보라는 이름으로 나의 선택권을 포기한 것이다. 잘못되거나 나쁜 결과에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거절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미룬 것이다. 어쩌면 주변 눈치를 너무 살핀 탓에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자존감은 왜 중요할까. 자존감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마음이다.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진다. 자존감은 타인과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지 않으면 쉽게 흔들리거나 휩쓸리고 만다. 요즘처럼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강력한 기술이다. 자존감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다.


자존감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중요한 타인, 어린 시절 특히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부모의 인정과 칭찬, 사랑과 관심으로 건전한 자아상을 만든다.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 긍정적인 자아상이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이 키우면서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부정적인 자아상뿐이었다.


문제는 가난이 대물림되듯 자존감도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지금 부모님 탓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모든 것이 부모님 탓만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럴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다.


아이의 자존감은 아빠가 결정한다. 구근회 저자 [잘되는 집은 아빠가 다르다] 책에서 "아빠, 엄마는 네가 우리의 아들(딸)로 태어나줘서 얼마나 행복하니 몰라." "아빠 생각에 너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유일하면서도 아주 특별한 사람이란다." "아빠 생각에는 네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너는 네 목표를 꼭 이룰 수 있을 거야." 아이에게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기 위해 소속감, 가치감, 자신감을 심어주라고 조언한다. 다시 말해 가족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주고, 존재로서 의미 부여하고, 실수하고 실패하더라도 용기를 주는 일이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자.”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상처 많은 내면 아이를 마주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아빠, 아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두 팔 벌리고 목말 태워달라며 등에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케케묵은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낮은 자존감의 대물림을 끊을 때까지 나 자신을 사랑하리.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아빠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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