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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Dec 18. 2020

옛날 옛적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사샤 스타니시치, <출신>



좋아하는 테니스 선수 가운데 ‘노박 조코비치’가 있다. 워낙 뛰어난 선수라 테니스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의 이름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네에서 허물어진  담벼락에 공을 튀기며 테니스 연습을 한 기억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한 수많은 인터뷰 중에서 왜 유독 이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무너진 담벼락에 테니스공을 튕기는 어린 소년의 모습…….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는 있었을까? 세계 랭킹 1위를 밥 먹듯이 하는 선수임에도 그는 이상하게 ‘페더러’나 ‘나달’에 비해서는 스폰서가 많이 붇지 않는다. 그 두 선수에 비해 인기도 떨어지는 편이다. 그 이유를 조코비치가 태어난 나라, ‘출신’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이제는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고 현재는 ‘세르비아 ’ 선수로 분류된다.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코소보 전쟁 당시 세르비아의 독재자이자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로 말미암아 일어난 각종 전쟁범죄로  국제사회, 특히 유럽에서 치명적으로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고, 아직도 그 이미지는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1987년에  태어난 조코비치가 성장기 내내 내전을  감당해야만 했던 일도, 세르비아 ‘출신’이라는 사실도 결코 그의 뜻은 아닐 것이다. 그저  ‘우연’ 일뿐이다.


우리  모두의 고향은 우연에 의해 탄생한다. 이런 우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 자기 집을 떠날 수 없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운이 없다. 그러나 떠나고 싶지 않아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운이 좋다. 본인이 살고 싶은 곳에 살 수 있는 소원을  이루는 사람은 운이 좋다. (<출신>, 165쪽)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사샤 스타니시치’ 그 또한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현재 그가 태어난 나라는 이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 나라가 존재할 때만 해도 스스로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르비아 출신이 아버지와 보스니아-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어머니처럼. 하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을 소개할 때 유고슬라비아 사람이라고 이야기할까? 사라진 조국,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 어디쯤……. 태어나 나고 자란 자신의 나라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로서는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다.  분명 그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 땅을, 공간을 포함한 ‘국가’라는 실체는 사라진 현실. 해마다 11월 29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수립된 그날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유고슬라비아풍 분위기가 가득한 여러  상징적인 장소에 모여든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모두 먼 전설 속 이야기, 전설 속의 용과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이다.

<출신>이라는  어찌 보면 조금 촌스러운 제목의 이 책은 이제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출신인 ‘사샤 스타니시치’ 그가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때 성장하고 꿈을 꾸었을 그 나라를 이야기한다. 그는 그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떠나온 지 오래이며,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치매를 앓으며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혈통과 출생지가 분류 기준의 특징으로  이용’되고 ‘국경선이 새로 정해지고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립된 나라의 메마른 늪에서 국익이 등장하는 시대’, 그리고 ‘타민족  배척이 정책 프로그램으로 다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시대’에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의 ‘출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진부하고  참으로 파괴적인 것처럼 생각’ 되더라도 그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의 흐려지는 기억과 마주한 지금이 바로 그  적기이다. 그가 출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질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장소를 결정하는 데에도,  가족이 있는 곳에 결코 함께 살지 못하는 데에도 이 ‘이질성’이 오랜 세월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는 전쟁도 하나의 출신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세르비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를 넘어 독일로 도망쳐서  1992년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다. 아버지는 세르비아 국경 너머로 그들을 데려다주고 비셰그라드로 돌아가 할머니 곁을 지킨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아버지도 독일로 뒤따라왔다. 발칸에서 도망쳐 온 그의 아버지는 독일어를 하지 못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정치학자였던 어머니는 큰 세탁 공장에 떨어져 5년 반 동안 뜨거운 수건에 파묻혀 살았고, 경영학자였던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일한다.  그렇지만 이 삶마저도 불안정해서 1998년,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 비셰그라드로 추방되기 전에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한다. 그리고 현재 부모님은 미국 연금생활자 신분으로 연금을 받으며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선 늘 1년씩밖에  체류할 수 없다. 조국은 사라지고 가족은 흩어지고 계속해서 어딘가를 떠돌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삶. 이것이 모두 그들이 바란  삶일까? 아니다, 그저 ‘우연’ 일뿐이다.

서른다섯  살 때 그의 어머니는 비셰그라드에서의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추억, 성공, 개인적인 행운으로 넘쳐났던 장소를 떠나 그곳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어머니는 사샤 스타니시치, 그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꾸며낸 이야기’로 채우지는  않는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어머니에게 출신은 ‘고향 땅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움찔하는 몸짓’과  같다(162쪽). 그런데 정말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 일뿐일까? 추억과 성공, 행운으로 넘쳐났던 장소를 떠나,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일이 그저 지나간 일일뿐일까. 아마도 머리로 기억하고 몸에 각인된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될 때면 늘 움찔하게 되지  않을까. 

조국에서는 엘리트였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낯선 나라를 떠돌며 노동 계층 사다리에서 가장 아래 단계에 놓인 삶을 살아갔던 것만큼 ‘나’의 삶 또한 쉽지만은 않다. 작가로서  독일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하고 발칸반도 출신임에도 사회에 잘 적응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갈 일원임을 또  ‘증명’ 해야 한다. 예의 바른 사람이며 ‘체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 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독일어로 얘기하라는  강요를 받는 등 사람들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모든 규칙’을 상기시킨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그들에게 늘 ‘이곳에서 너희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화약고 같은 발칸반도 출신이기에,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기에 그의 가족들은 편견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공격적이고 야만스럽고 불법적이지 않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운다. ‘알뿌리와 싹. 다른 식물에  붙어사는 식물’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유고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유고 사람이 아닌 친구들에게 그가  유고에서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감당할 수 없는 차별들…….

그러나 <출신>은 나라  잃은 민족, 나라 잃은 사람에 대한 차별과 그들 삶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샤 스타니시치의 할머니 이야기이다. 할머니는 여든일곱 살이지만 때로는 열한 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일곱 살 소녀이다. 할머니의 서서히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는 비셰그라드에서의 행복했던 삶,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그래서 행복했다고 기억할  순간순간들이 펼쳐진다. 할머니로 인해 ‘나’ 또한 멀리 떨어져 기억에서 사라져 가던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도 있다. 할아버지는 용을 퇴치한 전설 속 용사 게오르기우스를 숭배하는 마을 출신이다. 잊고 지낸 용 모양 펜던트나 용  모티브 자수, 용을 닮은 양초 등등을 보며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할머니와 손을 잡고 유년 시절, 이제 사라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파편화되어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어쩌면 이제는 기억조차 사라져서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할머니는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수많은 기억과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사라진 유고슬라비아, 그 땅 곳곳에서 흩어져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전설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한 마리의 용처럼 또 다른 전설이 되어갈 것이다. ‘옛날 옛적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로 시작될 전설. 그 이야기들이 완전히 잊혀 쓸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지기 전에, 조금씩 복원해  기록되어 추억할 수 있는 하나의 전설이 되기를,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 고향을 떠나온 난민의 자녀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자녀를 두고 그 아이들이 세계 곳곳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금,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그래서 조금이나마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기를, 무언가를 잃어버린 그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 아닐지. ‘옛날 옛적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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