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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Dec 19. 2020

지금 쓰이고 읽혀야 할 작품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방랑자들>과 <태고의 시간들>을 읽고 난 후, 이 작가는 참 독특한 글쓰기를 하는구나 싶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고나 할까. 이번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으니,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다음에는 어떤 소재와 주제, 어떤 독특한 형식으로 작품을 내놓을까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한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스릴러, 그것도 추리 소설 형식을 띠고 있다.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살인이 잇달아 일어난다. 어떤 죽음은 영문조차 알 수 없지만, 또 어떤 죽음은 유혈이 낭자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공통점을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은 살해당한 이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과연 범인은 누구인지 추적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살인도 여러 차례이고, 범인도 쉽게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야기는 자꾸만 샛길로 빠져나간다. 매 장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時)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것도 독특한데, 단지 블레이크의 시로 문을 여는 것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들이 즐겨 블레이크의 시를 읊는다. 그중에는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이도 있다. 오랫동안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제는 폴란드 외딴 고원에서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육십 대 여성 ‘두셰이코 야니나’와 그의 옛 제자 ‘디오니시오스’가 블레이크의 시를 즐겨 읽는 이들이다. 사실 이 작품의 제목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도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지옥의 격언>에 등장하는 구절이라고 한다.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 아니 작가는 하필이면 왜 윌리엄 블레이크 시를 계속 읊조리는 것일까? 더욱이 이 책 안에는 여러 개의 삽화가 들어있다. 뭔가 투박한 느낌이 판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판화 느낌이 나는 그림을 삽입한 까닭도 알고 보니 윌리엄 블레이크와 관련이 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하나의 스릴러 작품으로 봤을 때는 크게 흥미진진하지는 않다. 전통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뛰어난 탐정이나 수사관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살해당한 이들의 공통점은 누가 봐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 데다가 주인공 노년 여성은 점성학에 빠져서 무슨 말만 하면 별자리 운운, 점성학을 들이대며 헛소리 같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그러면서도 동물을 끔찍하게도 아끼는 사람이라, 동물과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장 연설을 종종 늘어놓는데, 그이의 장광설을 듣다 보면 아, 내가 지금 추리 소설 읽는 게 아니었던가? 때때로 잠시 현타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재미는, 알고 보니 텍스트 밖에 있었다. 애초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애를 내가 잘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한결 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옮긴이의 후기에 따르자면 블레이크는 시인이자 급진적인 사상가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물질적 타락을 개탄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고독하게 ‘동판화를 새기며(!)’ 시를 썼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예술가로 불리기도 한다. 판화를 연상시키는 이 책 속 간결한 그림체는 결국 생계를 위해 판각사로 일했던 윌리엄 블레이크, 대량 생산 시대에 맞서 자신의 시를 동판화에 새기던 그의 삶과 겹치는 것이다. 제목을 비롯한 각 장 도입부에 인용된 블레이크의 시도 결국은 두셰이코, 디오니시오스 등 이 작품의 소외된 이들의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작품에서 내내 윌리엄 블레이크를 불러온 까닭은 바로 그 반 문명, 생태주의적인 가치관을 이 작품에 담고 싶어서였으리라. 


우리 네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았다. 마치 우리가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처럼. 그리고 한 가족인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손을 번성시킨 것도 아니다. 지금껏 우리는 세상에 유용한 뭔가를 제공한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권려도 없고 보잘것없는 재산 말고는 다른 자원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것을 조금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게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39~340쪽)


두셰이코와 디오니시오스를 비롯해 이웃인 ‘괴짜’, 중고 옷가게 점원 ‘기쁜 소식’ 등 두셰이코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모두 사회 주변부 인물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른바 ‘쓸모 있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눈으로 보자면 낙오자라고 낙인이 찍히고도 남을 이들이다. 그에 비해 살해당한 자들은 저마다 사회에서 모두 한자리씩 차지한 기득권층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옹호되고 정당화되어 아무렇지 않게 사회의 주요 가치관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은 이상한,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는다. 두셰이코처럼 가진 것도 없고, 이제는 변변한 직업도 없는 노년 여성이 주장하는 말이라 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실은 지금 누구나가 귀 기울여 마땅한 이야기가 아닌가. 오히려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관례라는 이름 아래, 사회 통념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고 장려되어 온 기존의 가치관들이 사회를, 자연과 동물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고, 더 나아가 그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성장과 반 성장, 문명과 반 문명, 인간과 자연(동물을 포함한)의 대결 구도를 통해 지금 세계가 나아가는 길이 과연 이대로 괜찮은지, 계속 그렇게 해도 온당한지 질문한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 (148쪽)


첫 번째로 살해당한 ‘왕발’은 사냥감을 유인하는 몰이꾼이다. 그는 목에 사슴 뼈가 걸려 질식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두셰이코는 동물들이 사냥꾼에게 복수하는 것이라고, 인간을 향한 동물들의 복수가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이의 이런 주장은 정신 나간 과격한 동물보호가가 지껄이는 헛소리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어쩐지 정말 동물들이 복수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 속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기후 변화로 인해 동물들이 공격적으로 돌변한 것일 수도’ 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이제 ‘모든 것에 대해 복수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달리 보자면 동물, 자연의 복수가 아니겠는가. 오늘날의 세계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작품 속 이런 주장이 결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낯선 전개만큼이나 작품의 결말 또한 조금 충격적이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될 것 같은, 어쩐지 정의롭지 못하다는, 불편한 느낌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 지구의 기득권층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래서 지구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작품의 이런 결말은 차라리 온당한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한다. 죽은 목숨도 여럿 있고 범죄의 진상도 낱낱이 밝혀지지만 왠지 속 시원하지 않은 느낌.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여전히 남는 느낌. 아마 그런 질문들을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세계에, 그리고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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