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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Dec 30. 2020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자의 슬픔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제목을 왜 하필이면 <19호실로 가다>로 선택했는지는 이 책 맨 끝에 실린 단편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나면 명확해진다. 이 단편집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녹록지 않은 삶을 그리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19호실로 가다’는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삶을 단연코 압도적으로  묘사한다.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를 읽을 때만 하더라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찌질함까지 두루 갖춘 한 남자로 인해 24시간 가까이 괴롭힘 당하는 바버라의 모습을 보며 분개했다. 이 작품에서는 그래도 그 거머리 같은 남자가 여자에게 스쳐 지나가는 인물일 뿐이기에 하루만 참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게다가 어떤 면에서는 그 찌질이 ‘그레이엄’이 망신 아닌 망신을 톡톡히 당하면서 끝나는 설정이라 나름 통쾌하기도 했다. ‘옥상 위의 여자’나 ‘남자와 남자 사이’ 같은 단편도 남자들로 인해 인생이, 또는 삶의 한  순간이 일그러지는 여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 작품들은 나름대로 여자가 남성들을 무시하거나(‘옥상 위의 여자’), 한  남자로 얽혀서 때로는 적이었을지도 모를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면서 한 순간일지 몰라도 상처를 극복하는(‘남자와 남자 사이’) 이야기가 펼쳐지기에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작품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인 ‘19호실로 가다’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19호실로 가다>는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서서히, 이 지구에서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온전하게, 인간으로 홀로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맨 마지막 작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다. ‘19호실로 가다’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행복한 한 쌍이 등장한다. ‘수전과 매슈’ 그들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운데 결혼한다. 둘 다 벌이가 좋은 직장을 가진 덕분에 금세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자식들마저  골고루(아들, 딸에 이어 아들딸 쌍둥이까지!) 낳을 정도로 정말로 흠잡을 데 없이 그들의 결혼 생활은 잘 굴러간다. 정원이 딸린  커다란 집과 네 아이. 파출부, 친구, 자동차, 사랑 등등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 


그런데  이조차도 어쩐지 미리 ‘예상한 그대로’였으며 어쩔 수 없이 단조로운 생활이 된다. 그런 가운데 수전은 차츰 자신의 인생이 사막이  된 것처럼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어쩐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게 되면서 수전은 자신이 결혼하고 임신한 순간부터 말하자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긴’ 인생을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결혼한 뒤로 12년  동안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음을,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음을 깨닫고, 드디어 다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이들도 모두 학교에 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 매슈를 뒷바라지하는 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집안일 또한 파출부에게  맡기면 된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기만 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수전은 자기가 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한다. 사실, 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아이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즐기는 나로서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그 시간’이 드디어 주어졌음에도 오히려 집안일을 끊임없이 찾아서 하고 있는 수전의 심리가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왜? 대체, 혼자 있을 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여자는 자기 혼자만의 시간에도 집안일을 하는 거지?’ 이런  심정이랄까. 


그러다가  나는 곧 깨달았다. 수전은 혼자 있었던 적이, 진실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홀로 존재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아무리 집안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주어져봤자, 그 집은 남편과 아이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곳에서  결혼한 주부가 오롯이 혼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애당초 나 같은 사람은 수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수전이 홀로 있고자 애쓰는 모습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연민을 넘어서 어느 순간 슬픔이 밀려온다. 수전처럼 일주일에 한 번  방을 빌릴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하는, 그러므로 자기만의 온전한 방 한 칸을, 철저하게 혼자만의 공간을 누릴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떠오른다. 수전의 ‘19호실’ 그 평온의 공간마저 결국은 침범당하고 마는 것에서 분노와 함께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가 글을 쓰려면(온전한 자기만의 사유를 하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수전은 결혼과 함께 자기만의 방은커녕 그런 공간을 빌릴 돈조차 갖추지 못한 신세가 되고 만다. 결혼 전에는 광고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한 사람으로  당당히 존재했던 그녀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을 하고, 정원 딸린 집에 살면서 파출부까지 두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기만의 ‘돈’도 ‘방’도 없는 것이다. 집 한 곳에 수전의 방. 그러니까 ‘엄마의 방’을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그건 수전의  아이들이 말하듯 ‘엄마의 방’이지 ‘수전의 방’은 아니다. 거기서 과연 그녀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그러다가 드디어 찾은  자기만의 방, 19호실- 그 허름한 공간에서 서서히 혼자가 되어가던 수전. 그러나 남편의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공간마저 탄로  나고 더는 어디에서도 ‘철저히 혼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기에 좌절한 그녀가 내린 선택은 무척 마음 아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주변에서는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어떻게 그게 ‘독립’이냐고 나는 말리는 편이다. 정말로 독립을 바란다면 혼자  있을 ‘공간'을 만들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비혼 여성이 독립해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부모의 반대를 비롯하여,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될 수도 있으며, 막상 그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심리적, 정신적, 또는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를 향한 온갖 위험에 대한 공포) 선뜻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결혼’이라는 전혀 독립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고야 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이 짧은 생에서 단 한순간도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살다 죽게 되는 삶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부모의 우산 아래서 남편의 우산 아래로 편입될 뿐이다.  인간이 그렇게 평생 단 하루도 철저하게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런데도,  많은 여성의 삶은 수전의 ‘19호실’ 같은 공간조차 얻지 못한 채 끝이 나고야 만다. ‘성인 두 사람이 단 1초도 서로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 굴욕적’(‘한 남자와 두 여자’, 123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딸이었다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다시 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남자와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여자라는 성(性)을 잃어버린’(‘남자와 남자 사이’,  227쪽) 채 ‘하루에 18시간씩 남자들의 포부를 지지해주면서 살아가게’(‘남자와 남자 사이’, 234쪽)된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내가 있는 곳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은’(‘19호실로 가다’. 305쪽) 공간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랑도, 결혼도, 가정도, 일도. 인간에게 혼자 있을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을지 <19호실로  가다>는 쓸쓸하게 묻는다. 수전처럼 자기만의 ‘방’을 갖고자 안간힘을 쓰는 여성들의 고단한 삶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기에, 그런데도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는 책을 덮고도 씁쓸한  마음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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