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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자냥 Dec 31. 2020

문학이 한 세계를 창작할 때

이언 매큐언, <스위트 투스>



문학 또는 예술이 도구로 쓰이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선전선동을 위한 문학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친일문학가나 정권 찬양을 노래한  시인에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리라.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저 유럽에서도 나치 독일에 부역한  문인이나 예술가, 철학자들은 그 이유로 사람들의 외면을 받거나 바로 그 전력이 가장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만일 문학이 냉전시대에 어느 한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고 그 세계를 지키는 데 일조하거나, 또는 반대로 상대 진영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면 어떨까?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은 파시즘 및 소련의 전체주의 사회를  풍자, 고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그 조지 오웰이 영국 외무부 정보조사부(IRD)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으며 임종  당시 IRD에 공산주의 동조자 명단을 정부에 넘겨주었다면? 그리고 그 대가로 IRD는 <동물농장>을 여러 나라 언어로 출간될 수 있도록 돕고, <1984>를 위해서도 온갖 좋은 일을 해주었다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오웰에 대한 감정이  예전과 똑같을 수 있을까? 실제로 오웰은 찰리 채플린, E.H. 카, 역사학자 아이작 도이처를 비롯한 38명을 ‘서방을 위한  선전자(propagandists)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지명해서 넘겨주었다. 

오웰뿐만이  아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에 따르면 조지 오웰을 비롯해, 이사야 벌린,  레몽 아롱, 버트런드 러셀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 지성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이름이 여럿 등장한다. 미국은 냉전을 확산하고  연장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동원하고 이용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미국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반공 성향의 지식인들을  내세운다. ‘세계문화자유회의’ 같은 선전선동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민간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세계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인카운터>를 비롯한 수많은 잡지를 발행했다.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에도 이런 내용이 언급된다.  인카운터는 CIA 자금으로 운영되었으며, CIA는 1940년대 말부터 그들이 지식층 문화라고 여기는 것을 후원해 왔다고. 대부분은  한 발 물러서서 ‘다양한 재단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목적은 중도 좌파 유럽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꾀어내고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것이 지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만드는 것’(<스위트 투스>, 157쪽)이다. 

<스위트  투스>는 바로 이 시기, 1970년대 초 영국 보안정보국 MI5을 배경으로 삼는다. 아름다운 외모의 ‘세리나 프룸’은  케임브리지대학 수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수학과에 진학한 것은 모두 어머니 때문이다.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는 세리나가 케임브리지대학에 가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의무’라고 말한다. 문학이 아닌, 과학이나 공학이나 경제 분야에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통 이 분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세리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문학, 그것도 온갖 종류의 소설 읽기에 푹 빠진다. 당연히 전공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데 이런  세리나에게 운명처럼 한 남자가 나타난다. 전(前) 보안정보국 요원이자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 교수 ‘토니 캐닝’- 캐닝은 세리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가능성을 알아본다. 두 사람은 곧 연인 사이가 되는데, 토니는 세리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심어주고 마치 선물이라도 주듯 보안정보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세리나는 토니로부터 배운 온갖 지식을 동원해 훌륭히 면접을 치르고  입사에 성공한다.

제아무리 케임브리지를 졸업해도 여성인 세리나는 요원으로 일할 수 없다. 1970년대 영국은 남녀차별이 심해 정보국에 들어간 여성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저  사무 보조원으로 만족해야 했다. 세리나 또한 사무직 말단으로 몇 달을 보내며 희망 없는 상대와의 연애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던 중, 드디어 그녀에게  임무다운 임무가 주어진다. 암호명 ‘스위트 투스’- 이 작전은 지식인들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서방 자유세계를 옹호하는 입장을 대중에게 널리 퍼뜨리도록 은밀히 조종하는 것이다. 작가를 포섭하기 위해 "현대의 저술, 그러니까  문학, 소설에 훤한" 세리나가 적격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세리나는 ‘세계 곳곳에서 예술의 탁월성과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자유국제재단 소속’으로 위장하고 이제 막 데뷔한, 장래가 촉망되는 소설가 ‘톰 헤일리’를 찾아간다. <스위트 투스>의  진짜 재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리나는 톰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자신이 담당할 작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단편들을 섭렵하는데, 읽을수록 이 남자가 궁금해진다. 자기 멋대로 그에 관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실제로 만났을 때 톰의 외모는 세리나의 상상과 달라 뜻밖이지만 그래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톰 헤일리도 세리나의 미모에 반했는지 첫날부터 은근히 작업을 건다. 톰은 자유국제재단에서  자기를 콕 집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의아해하고, 반신반의하지만 조건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소설만 쓰고  싶은데,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직업을 가지면 소설 쓰기는 어려워질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던 그에게 이런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은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들을 위해 자신이 뭔가 특별히 해야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톰은 세리나가 국가 정보부에서 왔는지 전혀 모르니까). 게다가 자기 담당자인 세리나도 꽤 매력적이고……. 거절할 이유가 없던 그는 덥석 이  제안을 물고, 재단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이 아름다운 여자를 연인으로 얻어 소설 창작에 몰두하는 꿈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것이  자신에게 덫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모르는 채. 

이렇게만 적어놓으니 <스위트 투스>는 단순한 첩보 스릴러 같지만, 사실 문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광이라고 부를 만한  세리나가 바로 그 문학에 대한 탐닉 때문에 보안요원이 되고, 또 그로 인해 평생의 사랑이나 마찬가지인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도 문학 때문에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리나가 톰과 사랑에 빠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 소소한 견해 차이는 있지만 늘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작가가 좋아, 저 작가가 더 좋아, 이 작품 읽어 봤어?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독서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것이다. 심지어 세리나는 톰의 새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평해주는 충실한 독자이자 때로는 편집자 역할도 해준다. 톰의  작품을 읽고 그를 이해하고 알게 되면서 점점 더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는 세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아니 진실을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사실 이 책 맨 앞부분에 사랑에도,  임무에도 실패했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세리나와 톰의 사랑이 파국을 맞는다는 것, 그러고 나서 회한에 차서 그 모든 일을 세리나가 기록하고 있음을 독자는 알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언 매큐언은 그렇게 쉽게 독자가 바라는 대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는 않는다. 세리나의 첫사랑인 토니의 숨겨진 비밀, 톰과 세리나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 등등 독자의 예상을 살짝 비껴나가면서 참으로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빚어낸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너무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페미니스트의 작고 단단한 씨앗을 깊숙이 간직한 어머니’와 달리 토니와 톰, 또 그 밖의 남자들의  말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세리나라는 캐릭터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고, 여자가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고? 아닐 거 같은데, 이언  매큐언 당신이 좀 잘못 아는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종종 있는데, 이 작품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 모든  의구심이 풀리면서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맨 앞 장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앞서 언급한 <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이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언 매큐언은 이  책 끝부분에서 손더스의 이름과 함께 바로 이 책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를 통해  얼핏 접했지만 부드러운 냉전 시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프로파간다 도구로 쓰였는지 더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문학이라는 한 세계를 빚어내지만, 그 문학이 도구로 쓰일 때는 그 도구를 쓰는 이들이 원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냉전은  끝났지만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문학과 예술은 그렇게 이용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스위트 투스>는 작품 안팎으로  무척 흥미로운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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